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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화 (고려인마을 후원회장, 광주U대회 조직위 부위원장)

 

  지난 9월 7일 광주에 전국최초로 ‘고려인종합지원센터’가 문을 열었다. 센터를 개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정용화 고려인마을 후원회장이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2부작 “유라시아를 잇는 희망, 고려인”의 출연자로 제작팀과 함께 동행한 것이다. 정용화 후원회장이 보고 온 고려인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카자흐스탄의 하늘은 어느 곳보다 크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위가 모두 하늘이다. 징키스칸의 후예로 자부하는 카자흐민족에게 경계는 달리는 말이 지칠 데까지였을 것 이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땅보다 하늘이 더 눈에 들어왔을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국기는 하늘색 바탕에 노란 태양이 그려져 있다. 한반도의 12배 크기지만 인구는 1,800만이니 얼마나 많은 땅이 ‘버려져’있을까 부러움이 앞선다.

  이 기회의 땅에 강제이주로 도착한 고려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1937년 10월 9일 우슈토베역에 짐짝처럼 부려진 고려인들은 우선 추위부터 피해야 했다. 하지만 온통 평지라 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아줄 언덕부터 찾았다. 역에서 북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몰려갔다. 그 아래에 토굴을 짓고 이듬해 4월까지 겨울을 꼬박 그 속에서 보내야 했다.(사진1) 말이 평야지 사막에 가까운 황무지에 식량 한 톨 구할 수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는지 통계조차 없다. 토굴 옆은 바로 공동묘지가 되었다.

 

황무지를 옥토로

 

겨울이 지나자 고려인들은 습관처럼 농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물이 없다. 멀리 떨어진 카라탈강에서 물을 끌어와야만 했다. 남녀노소 모두 달려들어 수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논의 형상을 만든 다음 소금기가 빠져 볍씨를 뿌릴 정도가 되도록 기다렸다. 그동안 또 굶주림에 얼마나 죽어나갔는지 모른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식들 교육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든 민족적으로든 이 불행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교육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강제이주 이듬해, 거처가 정해지자마자 마을 입구 제일 좋은 땅에 학교를 지었다. 이름은 ‘원동학교’, 강제이주 전 연해주에 있던 학교이름을 그대로 썼다.

  시간이 지나자 노력의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우슈토베 인근 수백만평이 농토로 변했다. 고국에서 보던 황금벌판이 다시 펼쳐졌다.  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다시 끌어올렸다. 블라디보스톡의 위도가 43도이고 우슈토베가 45도이니 2도를 끌어올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슈토베마을의 마크에는 벼가 그려져 있다.

 

탁월한 민족성

 

원동학교에서 공부한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소련 전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김유리씨는 카자흐스탄 독립시 헌법제정을 주도했고 이후 법무장관, 헌법재판소장을 지냈고, 김아나톨리씨는 소련의 국민작가로, 빅토르최(초이)는 전설적인 록 가수로 구소련 전역에서 사랑받았다. 우슈토베가 속해있는 카라탈 군수를 지낸 김로만씨는 현재 하원의원이자 고려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외에도 최유리 전 상원의원,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가장 신임해 오랫동안 금고지기로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했던 이블라지미르씨, 세계적인 구리광산을 소유한 카작므스의 김블라지미르씨 등 많은 고려인들이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고려인이 10만 6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0.6%에 불과하지만 50대 재벌 중 5명이 고려인이며, 카자흐스탄 130여 민족 중에 3대 민족으로 꼽힌다.(광주U대회 카자흐스탄 선수단장의 말)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고려인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교통부장관이자 국영항공사 사장인 장발레리씨, 고려인협회장이자 하원의원인 신블라디미르씨, 상원의원인 박베라보리소나씨, 역사연구소 부소장인 한발레리씨, 화가 신니콜라이(신순남)씨 등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정부로부터 ‘최고 교수’칭호를 받은 하바로프스크 국립대학의 강엘레나씨, 물리학분야의 권위자인 홍유리안드레예비치 박사, 소수민족출신으로 최초의 대학총장이 된 김게오르기니콜라이비치 국립공업수산대학 총장, 하원의원인 장류보미르씨 등이 있다. 

고려인들의 성공요인은 무엇보다 교육열과 특유의 근면, 성실성이라고 한다. 해당국가의 관대한 소수민족정책도 주요 배경이다. 여기에 최근 한국기업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한국에 대한 호감이 더해져 타민족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성공사례를 남기고 있다고 한다. 우즈벡의 고려인 안내자는 “우즈벡정부가 한국을 보고 고려인을 대접하고 있다”고 까지 말한다.

 

언어의 문제

 

  우슈토베에 고려인이 중심이다 보니 이주해 온 다른 민족들도 고려말을 거의 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원동학교는 예스켈디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220명의 초중고과정 학생 중 고려인은 30명에 불과하다. 고려인 선생님도 전체 30명 중 7명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갔기 때문이다. 한국어교실에는 태극기와 단군초상이 전면에 걸려있고 벽에는 한국의 풍습과 자연 사진이 붙어있고, 뒷쪽에는 장구, 북 등 소품이 놓여있다.

  한국어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고려인아이들이지만, 이들에게도 한국어보다 시급한 것이 카자흐어라고 한다. 고려인들이 지금 대부분 한국말을 못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지금도 구소련시대처럼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쓰이지만 1992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점차 카자흐어, 우즈벡어가 중심이 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카자흐민족이 60% 정도이기 때문에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즈벡민족이 85%정도이고 민족주의가 강화돼 우즈벡어가 단일한 국어이고, 러시아어는 여러 민족간에 통용어로 쓰이지만 공용어로서 위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우즈벡에서 제1외국어가 러시아어가 아니고 영어라고 하니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고려인들의 처지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새 국어를 배워야 하는데 나이들어 새 언어를 배운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런데 흥미롭고도 슬픈 사실이 카자흐나 우즈벡 민족들 보다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더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자흐어나 우즈벡어는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계통이어서 어순이 같지만, 러시아어는 영어와 어순이 같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카자흐나 우즈벡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우리가 일본어를 배우는 것과 같고,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것과 같은 구조다. 실제로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때 통역자원봉사로 온 고려인과 카즈흐인 대학생 중 카자흐인이 우리말을 훨씬 잘해 고려인으로 착각한 적이 있다.

 

더 심각한 우즈벡 고려인

 

  광주고려인마을에 거주하는 3천여명의 고려인 중 90%가 우즈벡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고국을 찾은 주된 이유는 첫째는 일자리 때문이다. 우즈벡은 농광업 등 1차산업이 60%로 산업화가 미진하여 3천만의 인구에게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1인당소득이 3,000달러로 빈국에 속한다. (참고로 카자흐스탄은 12,000달러) 둘째는 언어문제가 있다. 카자흐에서는 러시아어로 버틸 수 있지만 우즈벡에서는 러시아어만으로는 버티기가 점점 어렵게 되고 있다. 우즈벡어를 배워 우즈벡민족처럼 살던가, 러시아로 이주하던가, 조상의 땅 한국으로 돌아가던가 해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에 온 고려인들이 대부분 한국어도 못하기 때문에 변변한 일자리도 갖지 못하고 막노동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동포인 조선족은 우리말에 거의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다방면에 취업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막노동에 취업한 고려인들은 현장에서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적기 때문에 고국에서도 정착을 못하고 대부분 겉돌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집단촌 시온고마을을 방문했는데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마을이장 댁에는 4대가 모여 추석 차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게는 가족사진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이장님 부부의 회갑잔치를 기념하여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한마디로 밝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것이 작은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한국의 고려인들이 어두운 표정에 기를 펴지못하고 막노동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과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민족인데 한국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시온고마을 노인회관에서는 할머니들이 노래방기계에 맞춰 아리랑・늴리리 맘보와 같은 노래를 배우고 있었다. 몇 마디 우리말은 해도 한글을 읽지 못해 발음기호를 적어두고 있었다. 우리말을 배우고 지켜나가기 위한 몸부림이 느껴졌다.

 

고려인에 먼저 손 내민 광주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고려인1세 천미하일 어르신(91세)이나 고려인2세 중에서도 안발렌티노씨(75)처럼 식자층에서는 한국어 소통에 불편함이 없지만 그 이하는 한국어가 거의 안되는 형편이다. 그 이유는 집에서도 부모들이 한국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소련시절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던 김병화씨는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고 하여 현지 정착에 심혈을 기울였고, 1992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만 해도 강제이주 당했다는 것조차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타쉬켄트 시내에 있는 세종학당을 방문했다. 교장은 전남대를 졸업한 허선행씨여서 더 반가웠다. 허교장은 한국과 우즈벡이 수교를 맺은 직후인 92년에 이곳에 와 24년째 생활하면서 한국어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초기에는 김중채 임방울재단 이사장, 전남도의회, 신정훈 나주 시장 등 광주 전남의 유지들의 지원으로 유지되었고, 경기도에서 도서관을 신축해 주면서 한글학교다운 면모를 갖추었으며, 2011년 부터는 세종학당으로 지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고려인과 가장 먼저 인연이 맺어진 곳이 광주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운 감동을 느꼈다.

  세종학당에는 우즈벡 청년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그들에게 적지 않은 학비를 부담하고도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한국에 유학을 가거나, 한국과 관련된 기업에 일하고 싶거나, K-팝 ・ 한국요리 등 한국이 좋아서 라는 등 다양했다. 국력과 함께 국어의 힘도 비례한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유라시아를 잇는 희망 고려인

 

  이번 여행은 고려인을 과거의 관점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본의 아니게 그곳에 갔지만 미래 유라시아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고려인들이 불쌍하니까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유라시아를 잇는 매개자로서 육성하자는, 미래투자로서 의미를 새롭게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미래는 미국, 일본, 중국을 넘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특히 고려인이 많이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우리나라와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나라다. 그 나라에는 넓은 땅과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지만 기술과 자본이 부족하고, 우리는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인종이 같은 계통이라 쉽게 친해질 수 있다. 실제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대통령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도 한국을 아주 좋아하고 경제협력 사업을 늘려가고 있다.         

  고려인은 유라시아시대의 매개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이 78년 동안 피땀으로 닦아놓은 터전에 고국의 발전이 짝을 이루어 한국인을 부르고 있다. 우리가 러시아어, 카자흐어, 우즈벡어를 새로 배우지 않아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고려인들이 고국에서 우리말을 제대로 배워 더 나은 일자리도 찾고, 자존감을 회복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이 부모와 함께 살기 위해 돌아가더라도 한국과 매개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려인가정과 자매결연하자

 

  고려인동포에게 영주권을 주고 정착을 지원하는 특별법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들이 한국어를 하지 못하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요체는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빨리,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독려하는 것이다. 광주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는 고려인들의 한국어 교육에 비중을 늘려나갈 것이다. 지자체에서도 한국어교육지원에 더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말을 배우는 가장 빠른 길은 함께 먹고 자며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으니 우선 고려인가정과 일반가정의 자매결연을 제안한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상호방문하여 음식도 나누고 대화도 하고 어려운 점을 보살펴준다면 그들의 정착도 더 쉽고 빨라질 것이다. 일반가정에서는 유라시아시대의 언어 러시아어를 배울 수도 있다. 다시한번 다정다감으로 세계를 열어가는 광주시민의 모습을 함께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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