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호동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

 

 

촌락에 이슬람 최대도시인 ‘카이로’‘바그다드’이름 붙이고

‘비비 하늠’모스크 거대한 건축물 건설, 이슬람 최고 문화도시로

 

북쪽의 우즈베크, 서쪽의 이란‘사바피’에 밀려 동남쪽으로

후예 바부르, 인도 정복하고 무굴제국 창건 고도의 문명 이어가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에 비해 ‘티무르’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는 같지 않다. 하지만 티무르가 정복을 위해 보낸 시간과 다녔던 지역을 보면 칭기즈칸의 패업(覇業) 오히려 빛을 잃을 정도이다. 사실 칭기즈칸은 생애의 대부분을 몽골 초원의 통일로 보냈고, 그가 참가했던 대외원정은 군데, 서하•금나라•호레즘뿐이었다. 그러나 1336년에 출생한 티무르는 1369 중앙아시아의 유목부족들을 통합하는 성공한 , 1405년에 중국을 치러 가다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40년을 유라시아 사방 각지를 원정하고 정복하는 몰두했다. 칭기즈칸이 ‘세계정복’의 문을 열었고 실제로 그것을 완수한 것은 그의 후손들이었다면, 티무르는 자신의 일대에서 ‘세계정복’의 과업이 끝나버렸고 그의 후손들은 가만히 앉아서 과실을 향유했을 뿐이었다.

  스페인의 카스티유 국왕이 파견한 클라비호(Clavijo)라는 사신이 1412 사마르칸트를 방문하여 티무르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보고를 통해서 티무르의 진면목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 티무르의 이름은 이미 전부터 유럽에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떨게 했던 동방의 군주들이 모두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를 지배하던 몽골계 킵착 칸국의 군주 톡타미시(Toqtamish) 원래 티무르의 지원으로 권좌에 올랐지만 칸이 뒤에 티무르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자 티무르는 1391 볼가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고 킵착 칸국의 수도였던 사라이(Saray) 폐허로 만들었다. 러시아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진 것이 러시아인들의 애국적 투쟁 ‘키에프인들의 피’ 때문이었다고 해석하지만, 사실은 티무르의 원정으로 인해 킵착 칸국이 결정적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티무르는 서구를 위협하던 하나의 대국을 강타했다. 1402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야지드 1세가 이끄는 군대를 앙카라 부근에서 격파한 것이다. 전투에서 바야지드는 포로가 되고 결국 1 적국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유럽에서 티무르의 명성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것이 1587~1588년에 영국의 작가 말로(Christopher Marlowe) ‘탬벌레인(Tamburlaine)’이라는 희곡이다. 줄거리는 주인공 탬벌레인이 페르시아 제국과 터키와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마침내 자신이 신보다 위대하다고 외치며 ‘꾸란’을 불태우는데, 오히려 그것이 그의 저주가 되어 다음 해에 사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희곡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던 당시 영국의 지적 분위기와 부합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정복자’ 티무르는 아주 적합한 주인공이라고 있다. 바로 ‘탬벌레인’이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티무리 (Timur-i lang),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말을 부정확하게 옮긴 것이다. 그가 젊었을 한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근육이 수축되어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여진 것이다. 1941 학자들이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의 무덤 구리 미르(Gur-i Mir) 열어서 그의 시신을 조사했다. 특히 게라시모프(M. M. Gerasimov)라는 소련 학자는 티무르의 해골을 근거로 그의 얼굴을 복원했으며 생전에 절름발이였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티무르의 무덤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전설이 있었다. 그것은 누구라도 티무르의 무덤을 열면 나라에 파멸이 닥치리라는 것인데, 정말 그의 무덤이 개봉된 사흘 뒤에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칭기즈칸을 무색케 정도였던 희대의 정복자 티무르도 자기 마음대로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칸(khan)’이라고 부를 없었던 것이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등장한 이래 그의 후손이 아니면 누구도 ‘칸’을 칭할 없다는 것은 이미 유라시아 지역에 통용되는 불문율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티무르조차도 칭기즈칸의 후손 가운데 하나를 허수아비 칸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칭기즈칸 일족의 여자와 혼인한 ‘구레겐(g?regen), 부마(駙馬)라는 칭호로 만족해야 했다.

  티무르의 최종 목표는 몽골세계제국을 자신의 힘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몽골제국은 이미 분열되고 약화되어 옛날과 같은 영광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가 유라시아 각지를 원정했던 까닭도 바로 사라진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몽골제국의 본부가 있었던 중국을 자신의 최종 목표로 삼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405 그는 총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소집하고 드디어 중국원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의 영락제(1402~1424) 통치하고 있었다. 물론 영락제는 몽골에 대한 5차례 친정(親征), 환관 정화의 인도양 원정 등으로 중국사에서도 보기 드문 공격적인 군주였지만, 집권 초기의 상황은 상당히 불안했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였던 건문제를 시해하고 즉위했기 때문에 그의 집권에 대해 내부의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이런 처지의 영락제가 수십 동안 원정을 통해서 단련된 티무르의 기마군단을 막아냈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던 티무르가 시르다리아 강가에 위치한 오트라르(Otrar)라는 변경도시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고, 이로써 중국은 끔찍한 참화를 면하게 것이다.

  티무르의 정복전은 엄청난 파괴와 살육을 수반했다. 도시는 페허로 변해버리고 높은 미나렛(이슬람 사원의 첨탑) 있었던 곳에는 수만 명의 해골로 이루어진 탑이 쌓였다. 파괴의 정도는 칭기즈칸 시대를 능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그를 문명의 ‘도살자(butcher)’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가 파괴만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건설자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수도로 삼은 사마르칸트는 세계 각지에서 끌어모은 기술자들과 재물로 화려하게 장식되기 시작했다. 말로의 희곡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를 표현하고 있다.

  ‘내 고향 사마르칸트는 대륙의 가장 곳까지 유명해지리라. 그곳에 나의 왕궁이 세워질 터인데, 빛나는 탑으로 인해 하늘이 무색해지고 트로이의 탑이 떨치는 명성도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그는 사마르칸트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도시 주변에 있는 촌락들에 당시 이슬람권 최대의 도시인 ‘카이로’‘다마스쿠스’‘바그다드’‘시라즈’ 등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에는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것이 자신의 무덤인 구리 미르, 그리고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는 비비 하늠(Bibi Khanim) 모스크이다. 건축물들은 단지 무덤이나 모스크의 용도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사원, 학교, 수도원, 묘지, 병원, 호텔 등이 연결된 일련의 콤플렉스 빌딩이었다.

 

티무르의 후손들은 조상의 군사적 천재성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건축을 장려하고 예술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는 티무르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도 사마르칸트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레기스탄’이라는 중앙광장이다. 혹자는 베니스의 마르코 광장을 빼놓고는 중세 어느 곳에서도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에 견줄 만한 곳을 찾아볼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곳에는 개의 커다란 건축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울룩 벡’ ‘시리 도르’ ‘틸라 카리’라는 이름의 마드라사가 그것이다.

마드라사는 ‘신학교’를 뜻하기 때문에 이들 건물이 신학교이자 동시에 모스크의 용도로 지어졌음을 있다. 특히 울룩 마드라사의 건설자인 울룩 (1449 사망) 티무르의 손자였는데, 1428 그곳에 반경 36m 천문관측대를 건설하였다. 1437 그는 자신의 관측을 토대로 1년의 길이를 계산했는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정확하게 58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으로, 기록은 후일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경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학문의 세계에 몰두하느라 정치는 뒷전이었고 결국 자기 아들에 의해 살해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폐허로 남아 있는 비비 하늠 모스크.

사마르칸트는 티무르의 수도였지만 그가 사망한 뒤에는 오늘날 아프간의 헤라트로 도읍이 옮겨졌다. 그곳은 처음에 티무르의 막내아들이자 후계자인 샤루흐(Shah Rukh1447 사망) 다스렸고, 1469년부터 1506년까지는 후세인 바이카라(Husayn Bayqarah)라는 인물이 통치하면서 일약 이슬람권 최고의 문화도시가 되었다. 그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각지에서 시인, 화가, 종교인이 모여들었다. 특히 이란과 터키 문학사에서도 이름이 높은 자미(Jami1414~1492) 나바이(Navai1441~1501), 세밀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비흐자드(Bihzad1450~1535) 등은 당대의 가장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15세기 후반의 헤라트는 전쟁과 혼란의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안식처이자 오아시스였다고 있다.

 

그러나 이들 도시의 안정과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500년을 전후하여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요동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가지 방향에서 나타났는데, 하나는 북쪽의 초원에서 ‘우즈베크’라는 새로운 유목민 집단의 남하이고, 하나는 이란 서북부 지방에서 ‘사파비(Safavi)’라는 신비주의 교단을 핵심으로 하는 세력의 출현이었다. 이들은 각각 중앙아시아와 이란을 장악한 이슬람권의 패권을 두고 쟁패를 벌이게 되었다. 결국 북쪽과 서쪽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견디지 못한 티무르의 후예들은 사마르칸트와 헤라트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지도자가 바로 바부르(Babur1483~1530)였으니 그가 바로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제국을 창건한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무굴’이라는 명칭도 사실 따지고 보면 ‘몽골’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바부르를 비롯한 티무르의 후손들은 자기들이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주위의 이란이나 인도의 주민들은 여전히 그들을 ‘야만적’인 유목민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바부르와 그의 후손들은 정복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죽느냐 사느냐 목숨이 걸린 전투를 먹듯이 치르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여 비망록을 남겼는데, 그것을 당시의 문학어인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자신의 모국어인 투르크어로 기록했다. ‘바부르 나마(Babur Nam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글은 지금까지 중세 투르크 문학의 금자탑으로 여겨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도를 통치한 그의 계승자들, 예를 들어 아크바르(치세 1556~1605) 자항기르(치세 1605~1627) 자한(1628~1658) 같은 사람도 모두 고도의 문학적 수준을 자랑하는 글을 집필하거나 타지마할과 같은 위대한 건축물을 세운 것을 보면, 문화의 보호자로서 티무르 일족의 면모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갔던 것을 있다.

 

 

축성 장면을 그린 비흐자드의 세밀화.

비비 하늠 모스크의 전설

 

비비 하늠 모스크의 건축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건물이 한창 지어지는 도중에 티무르는 인도로 원정을 떠났고, 건축가 사람이 비비 하늠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건물을 지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비비 하늠이 예쁘게 색칠한 40개의 계란을 그에게 갖다 주면서 색깔은 달라도 맛은 마찬가지라고 하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공사에 전념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얼마 지난 건축가는 40개의 호리병을 갖고 와서 내놓았는데 가운데 39개에는 물이, 나머지 개에는 포도주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비 하늠이여! 이들은 모두 똑같이 보이지만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페르시아 출신 장인이 비비 하늠과 사랑했다가 티무르에게 들통이 나서 미나렛 꼭대기까지 올라간 거기서 뛰어내려 도망쳤다고 하기도 한다. 109m×167m 장방형의 규모에 입구 현관의 높이만 30m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그럴싸한 일화들도 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진으로 인해 대부분이 무너져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

  1. No Image

    구글 픽셀 버드가 초래할 변화들

    40개 언어 동시 음성번역이 가능한 구글 픽셀 버드(Google Pixel Buds)가 출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픽셀 버드는 음성을 이용한 실시간 번역 기능이 지원됩니다. 이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연결된 픽셀 2 핸드폰이 ...
    Date2017.10.12 Views21
    Read More
  2.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80주년 기념 특별기획 – “80년전의 기억속으로” ] 2. 우리말과 전통문화를 지키며 사는 원동마을 세자매

    전통문화를 지키며 사는 원동마을 세자매 “고향 한번만 가봤으면 얼마나 좋겠소” <원동마을에 사는 세자매. 왼쪽부터 김따냐(59) 김알료나(61) 김안나(65) > 우리는 원동에 살다가 카자흐스탄 실려왔소 첨에는 고생 하면서 구차하게 살았소 고생하...
    Date2017.10.05 Views7
    Read More
  3. No Image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80주년 기념 특별기획 – “80년전의 기억속으로”]

    육성 증언 : 천 미하일 다닐로비치(92. 당시 12세) “강제이주 당시, 중국으로 넘어간 고려사람들도 많았소.” 자료를 통해본 강제이주 – 80년전을 기록한 카자흐스탄의 고문서 자료들 홍범도 장군이 묻힌 곳, 끄즐오르다 급감하는 고려인 공...
    Date2017.09.20 Views27
    Read More
  4. No Image

    알마티의 첫 느낌

    어느 나라고 공항에서 처음 나왔을 시각이 어두운 밤이면, 미지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조금 움츠러들게 된다. 알마티도 그랬다. 밤 10시가 넘어서 공항에서 나서자, 연구소 대표님께서 픽업을 나와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어두운 거리때문에 조금 주눅이 ...
    Date2017.07.17 Views78
    Read More
  5. No Image

    LG G6 콘서트장에서의 단상

    어제 저녁 국내 대기업의 스마트폰 론칭행사에 K-POP 그룹과 러시아의 유명 여성그룹이 출연한다고 해서 보러 갔다. 큰 딸은 한국에서 온 그룹들이 유명하지 않다고 안 갔지만 나는 나머지 남자 애들 셋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반강제로 콘서트 관람을 강행했...
    Date2017.06.06 Views81
    Read More
  6. No Image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 전망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는 저유가 국면에서 탈출하여 소폭 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난 4월 22일 IMF는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성장 전망을 발표하였습니다. 2017년 카자흐스탄의 경제성장률을 2.5%로 예측하였고, 2018년에는 3.4%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
    Date2017.06.06 Views134
    Read More
  7. No Image

    [건강] 힘든 봄, 그리고 저녁 굶기

    봄철 건강을 위해 겨울에 잘 쉬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이번 겨울에 잘 쉬지 못 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땅에 사는 모두가 공감하듯 시절이 너무 난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겨울이 되면서 모처럼 시간이 난 농촌에 사는 이웃들과 그동안 하지 ...
    Date2017.05.31 Views43
    Read More
  8. 우슈토베를 다녀와서

    5월 20일 한글학교가 주최하고, 총영사관 (재외동포재단)과 LG가 후원한 '알마티 한글학교 20주년 , 고려인 정주 80주념 기념 역사 탐방이 있었다. 한글학교 중고등부와 학부모를 비롯하여 교민들까지 총 54명이 LG버스 두대로, 고려인 마을, 고려극장, ...
    Date2017.05.23 Views55
    Read More
  9. [신년사] "올해는 한-카 수교 25주년, 고려인 동포 정주 80주년, 고려극장 설립 85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 한민족의 위상을 높일 계기"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알마티총영사관 전승민 총영사입니다.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2016년 한 해 동안 총영사관에 아낌없는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신 동포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재 카자흐스탄 경제는 전 세계적인 경기...
    Date2017.01.03 Views231
    Read More
  10. [신년사] "붉은 닭의 해, 과욕이나 부족함이 없도록 조화를 유지하는 한해되시길...."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 밝았습니다. 먼저, 독자 여러분들의 가정과 일터위에 만복이 깃드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16년 병신년(丙申年)은 그 어느 해보다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했던 한 해였습니다. 모국은 사상 초유의 '...
    Date2017.01.03 Views174
    Read More
  11. No Image

    [특별기획] 러시아인, 그들은 누구인가?

    전적이고 극단적인 사랑과 우정 극한 추위, 팽창과 좌절의 역사에서 형성 <이 원고는 Chindia Plus 2016년 12월에 기고한 글입니다.> 올해 23세인 안젤리나 니콜라우(Angela Nikolau)는 루퍼(roofer)다. 루퍼는 높은 건물이나 초고층에 침투해 사진을 찍는 사...
    Date2016.12.19 Views246
    Read More
  12. 한인일보 특별기획 : 중앙아시아 아리랑 로드를 따라서

    한인일보 특별기획 : 중앙아시아 아리랑 로드를 따라서 아리랑은 한반도에서 태어났지만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따라서 만주와 연해주로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퍼져나갔다. 하와이와 미국 그리고 유럽에서도 아리랑은 불려졌다. 그래서 한민족의 해...
    Date2016.11.11 Views343
    Read More
  13. [기고] 홍범도 장군 묘소,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무성한 잡초와 깨진 보도블록이 황량함 더해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 수석연구원)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소. 2016년 9월2일. 사진 = 김상욱> <홍범도 장군 기념공원 안내판. 2016.09.02 사진 = 김상욱> 며칠전, 모 공중파 방...
    Date2016.09.22 Views936
    Read More
  14. No Image

    유럽 문명 짓밟은 '정복자' 티무르 사마르칸트를 '세계문명의 중심'으로(상)

    김호동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 촌락에 이슬람 최대도시인 ‘카이로’‘바그다드’이름 붙이고 ‘비비 하늠’모스크 등 거대한 건축물 건설, 이슬람 최고 문화도시로 북쪽의 우즈베크, 서쪽의 이란‘사바피’에 밀려...
    Date2016.08.16 Views286
    Read More
  15. No Image

    사드와 러시아 : 러시아가 중국보다 덜 적극적인 이유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해 러시아는 중국보다 덜 요란스럽다. 물론 러시아는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고 향후 극동지역에서 불필요한 군비 경쟁을 우려하였다. 러시아는 사드에 탐지되지 않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력을 강화하거나 동부 군관...
    Date2016.07.26 Views255
    Read More
  16. No Image

    살아나는 러시아 경제

    러시아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 지난 4월 무디스는 러시아의 국가 신용 등급을 국제사회의 예상을 깨고 기존 Ba1 등급을 유지하였다. 세계은행은 2016년 러시아 GDP 하락률을 기존 전망치 1.9%보다 적은 1.2%으로 수정하였으며 2017년에는 1.4%, 2018년은 1.8% ...
    Date2016.07.12 Views181
    Read More
  17.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3

    한국, 유라시아 유목제국의 역사를 밝히다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지난 25일, 이쉭박물관에서는 열린 내년 한-카 합동 발굴조사에 대한 업무협정 체결식 후 양측 대표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지난 토요일(25일), ‘황금...
    Date2016.06.29 Views297
    Read More
  18. <수도의 날을 축하하며> 내가 본 ‘아크몰라’와 ‘아스타나’

    <수도의 날을 축하하며> 내가 본 ‘아크몰라’와 ‘아스타나’ ’상전벽해’는 이를 두고 하는 말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 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1997년 눈보라가 치는 12월 중순, 필자는 ‘아크몰라’를 처음으...
    Date2016.06.29 Views229
    Read More
  19. No Image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2

    중앙유라시아의 이슬람화와 투르크화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아랍 침략을 받기 전 중앙유라시아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했다. 메르브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산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가장 유력했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야곱...
    Date2016.06.21 Views173
    Read More
  20. No Image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1

    중앙유라시아의 이슬람화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알마타 시민들 뿐만 아니라 이 도시를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명소 중에 하나가 바로 ‘침불락’이다. 주말이면 연인이나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로 붐비는 &lsqu...
    Date2016.06.16 Views276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