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조회 수 34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한인일보 특별기획 : 중앙아시아 아리랑 로드를 따라서

 

아리랑은 한반도에서 태어났지만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따라서 만주와 연해주로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퍼져나갔다. 하와이와 미국 그리고 유럽에서도 아리랑은 불려졌다. 그래서 한민족의 해외 이주 경로는 곧 아리랑 로드이기도 하다.
고려인의 이주로이며 애환의 길이기도 한 ‘중앙아시아 아리랑 로드’는 고려인 최초 정착지 우슈토베의 카라탈 강변에서부터 시작된다. 한반도를 떠나와 연해주에서 살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이주 후 또 한번의 재이주 과정을 통해 중앙아시아 각지로 퍼져나가게 된다. 재이주는 헤어진 가족들과 상봉하기 위해서 또는 좀 더 생활여건이 나은 곳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 아리랑 로드를 따라가면서 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2017년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80주년을 앞두고 한인일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만든 아리랑로드를 따라가는 특별기획을 마련하였다. 이번 취재는 아리랑로드를 따라 가는 것이었지만 과거의 관점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고 더불어, 알려지지 않는 사실들을 발굴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분명 우리와 함께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동포들이 때문이다.
이 길을 걸으며 우리는 신한촌에서 출발하여 갖은 고초와 역경을 겪으면서도 동포들 속에서 우리말과 전통문화를 보존하는데 애를 쓴 고려극장을 만나게 되었고 끄즐오르다와 아랄해의 항구도시 아랄스크시가 고려인의 도시라는 것도 새삼 발굴하게 되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카라탈군의 로고에 벼 그림이 있는 이유
⦁ 우슈토베에서 만난 고려극장의 흔적
⦁ 크즐오르다, 고려인의 땀으로 중앙아시아 최대 벼생산지가 되다.
⦁ 고려인의 도시 아랄스크…. 아랄해의 물고기는 고려인 선장들이 잡았다.


⦁ 카라탈군의 로고에 벼 그림이 있는 이유
취재의 시작, 카라탈강
 1.png

 


<카자흐어로 ‘카라탈군’이라고 적혀 있는 문양 한가운데 말과 함께 벼를 형상화한 이미지가 들어가 있다>
카라탈강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발하쉬 호수를 향해 흘러가는 세미레치예지역(알마티주에 해당)에 있는 7개의 큰 강 중의 하나이다. 흉노가 한무제에게 패한 후 재기를 도모한 주요 거점 중 하나가 바로 카라탈 강변이다. 그리고 유라시아의 마지막 유목제국을 건설한 준가르(몽골족의 일파)가 청나라의 토벌에 끝까지 저항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카라탈 강변은 건조한 중앙아시아 스텝중에서도 만년설이 녹아 내린 물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었다.
이런 곳에 고려인들이 이주를 해왔다. 바로, 1937년 가을이었다.  37년 10월초, 미하일 할아버지가 한 달간 타고 온 기차에서 내린 곳은 카라탈군 우슈토베역이었다. 소년 미하일과 4명의 형제들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말술게’라고 하는 말수레를 타고 다시 한 시간 가량 걸려서 바슈토베에 짐을 풀었다.
“우리는 땅굴을 파고 그 앞에 숱한 갈대를 꺽어 와서 불을 땠다. 거기서 그렇게 동삼(한겨울, 겨울철의 3개월인 음력 10월, 11월, 12월을 말함)을 보내고 38년도 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소” 미하일 할아버지는 기자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한 기억력을 자랑하며 당시를 회고하셨다.
바슈토베 언덕에는 고려인들이 첫 해 겨울 보낸 토굴이 보존되어 있고, 그 앞에 강제이주기념비가 서 있다. 그리고 시선을 언덕쪽으로 돌리면 한글이 새겨진 철 비석이 서 있는 고려인 공동묘지가 눈에 들어온다. 바슈토베는 카자흐어로써 ‘우두머리 봉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단 2~3분 만에 올라갈 수 있는 높지 않은 이 언덕은 북쪽 스텝을 지나온 차가운 삭풍을 막고 서서 토굴과 공동묘지를 품에 안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2.png

<천 미하일 할아버지>
 

3.png

<천 미하일 할아버지의 뒤뜰 텃밭, 농촌 고려인들은 아직도 텃밭에서 직접 야채를 재배하는 등자급자족 생활을 한다>
 4.png

<천 미하일 할아버지의 뒷뜰 창고 벽면에 걸려 있는 호미 모습>


“그러나 38년 봄부터 고려인들이 바로 벼농사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소. 카라탈군내에만 고려인들의 꼴호즈(농업조합)가 20여개가 만들어졌지만 벼농사는 3~4년 뒤부터 짓기 시작했소. 메마른 땅에 물만 댄다고 벼농사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니거든. 이후 대조국 전쟁시기(2차대전 시기: 1941~1945)에는 이미 카라탈강변을 황금물결이 춤추는 벼농사 지역으로 탈바꿈시켰소. 그래서 우리 군의 상징문양에 벼 그림이 들어가 있질 않소. 오시면서 길가에 서 있는 대형 상징판을 못 보았소”
기자는 주의깊게 보지않으면 지나치기 쉽상인 도로표지판 옆 상징판을 보았다고 대답하자 “그 뿐 아니고 우리 카라탈군에서는 윤 세르게이라는 노동영웅을 배출했소.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만 해도 카라탈강변의 수백만평의 농토에는 매년 9월초가 되면 황금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소!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부모님이 생각나 눈물이 나오….. 우리 어시~(부모라는 의미의 고려말)들이 손으로 수로를 파고 만든 논들이거든” 천 미하일 할아버지(91)는 이렇게 기자에게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나, 2016년 현재, 카라탈 군의 사정은 미하일 할아버지의 기억 속 과거와는 너무나 사정이 달라져 있다. 농사를 짓는 젊은 고려인이 없는 것 뿐 아니라 거주하는 고려인 수 자체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겨우 3000명 정도가 살고 있을 뿐이다. 또한,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 후 제일 먼저 지었다는 카라탈군 원동마을에 있는 ‘원동학교’는 카자흐 이름인 ‘예스켈디학교’로 바뀌었고, 220명의 초중고과정 학생 중 고려인은 30명에 불과했다. 고려인 선생님도 전체 30명 중 7명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갔기 때문이다.
한국어교실에는 태극기와 단군초상이 전면에 걸려있고 벽에는 한국의 풍습과 자연 사진이 붙어있고, 뒷쪽에는 장구, 북 등 소품이 놓여있지만 정규수업으로써의 한국어 수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아직도 특활활동의 하나로 한국어를 선택하는 고려인 학생들이 있긴 하지만 언제 폐강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이들에게도 한국어보다 시급한 것이 카자흐어학습인 것이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한국어 교실을 운영하는 교사 김 예브게니야 씨는 “수강생이 10명도 안된다”고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기자가 둘러본 이 학교 박물관에는 이 학교출신 유명인사들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었다. 김유리 카자흐스탄 초대헌법위원장, 김로만 하원의원 등 정계, 문화, 학술, 스포츠 분야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분들이 사진들이었다. 이들은 바로 카라탈 강변에서 태어나 벼농사를 짓는 부모를 보면서 자라나서 고려인의 위상을 크게 떨친 분들이었다.
기자는 카라탈 강변의 갈대밭을 옥토로 바꾼 현장에서 화려했던 고려인들의 과거역사와 함께 그리 밝지 않은 미래의 모습도 오버랩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하일 할아버지나 안발렌티노씨(77) 등 중앙아시아 이주 1세대와 2세대들의 시대가 아닌 차세대들이 주역이 될 가까운 미래에도 저 영광들이 이어질까? 우리말을 못하는 현재의 고려인들과 모국과의 연계는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등의 의문이 일어났다.
또한 기자는 중앙아시아 이주 직후 고려인 지도자들이 동포들에게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고 말하며 현지 정착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부을 것을 역설했든 것처럼, ‘모국과 소통해야만 살 수 있다’라고 외쳐주길 기대해 보았다. ‘ 이젠 모국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후원하였습니다)

 

 

⦁ 우슈토베에서 만난 고려극장
  5.png

<우슈토베 시내 공원 한가운데 있는 강제이주기념탑>


우슈토베에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공원엔 피라미드 모양을 한 ‘강제이주 기념탑’이 있다. 모국에서 이산된 고려인의 현 상황을 잘 형상화 한 이 기념탑은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온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기념탑은 한국과 카자흐스탄이 국교를 수립하고 난 뒤에 세워진 것으로 이 탑을 뒤로 하고 공원을 나와서 왼쪽으로 꺽으면 바로 과거 고려극장이었던 터가 나온다. 미하일 할아버지와 염 따지아나 할머니 등의 도움으로 찾아간 고려극장은 현재는 공터와 함께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1932년에 구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원동변강조선극장’이라는 명칭으로 신한촌에 세워졌던 고려극장(현재는 고려극장이라고 불려지지만 당시엔 조선극장이라고 했다)은 37년에 대표적인 민족교육문화단체인 ‘선봉’신문사, 원동사범대학과 함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했었다. 그러나  고려극장은 2차세계대전의 시작이라는 엄혹한 상황속에서 우슈토베로 이주를 하게 된다. 김 겐나지 전 고려극장장은 “2차세계대전(위대한 조국 전쟁 – 소독전쟁 -)이 발발하면서 당시 극장 일꾼들은 노력전선에 동원되었다. 배우들은 후퇴해 온 사람들과 야전병원들에서 부상자들을 상대로 출연하였고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을 위해 헌 옷들을 모아 보내주고 각종 선물도 보내주었으며 탱크 제조를 위한 기금 모집도 했다. “고 증언해 주었다.
 

6.png

<고려극장 단원들이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공연을 하는 모습>


겐나지 선생은 “고려극장이 끄즐오르다에서 우슈토베로 옮겨온 이유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가장 큰 격전지였던 스탈린그라드전투가 벌어질 당시, 나찌독일과의 최전선이 카자흐스탄 국경에 가까워 옴에 따라 1942년 1월 13일 전격적으로 우슈토베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이때 너무 어려워서 극장의 정원수는 최대한 축소되었고 이사올 때에는 가장 필요한 무대도구만 겨우 갖고 왔다.”면서 “그래도 극장은 살아남아서 오늘까지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지 않은가?”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조국을 위하여 전투에로>, <인민의 아들들은 전투에로>, <제8근위사단> 외에 국민들이 즐겨 부른 전시의 노래들이 이길수, 태장춘, 채영의 번역에 의해 우리말로 불리워진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한편, 태장춘은 항일독립운동 열사인 전설적 영웅 홍범도 장군에 대한 희곡을 창작, 상영했다. 또한 전후 채영 희곡작가는 카자흐스탄 고려인 꼴호즈 의 성과에 대한 이야기 해주는 <즐거운 생활>을 상연했다.
겐나지 선생은 "이 당시 고려극장 극작가들의 작품들에는 민족적 자각성, 조상 땅의 운명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감정이 담긴 희곡들이 창작되었다."면서 태장춘의 <38년 이남에서>, 연성용 작 <불속에 휩싸인 조선> 등 연극을 예로 들었다.
이때는 극장의 모든 인원을 다 합쳐봐야 29명 밖에 안될 정도로 궁핍하였다. 그럼에도 1년에 6~8개월씩 순회공연을 했으며 56년 부터는 소련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발전을 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59년 5월 30일, 고려극장은 우슈토베 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크즐오르다로 옮겨오게 되었다.
“고려극장의 우슈토베시절은 정말 궁핍의 연속이었소. 겨울에 카라탈 강변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배우들의 몸을 굳어버리게 만들었소.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연습과 공연을 했지만 동포들은 ‘춘향’과 ‘심청’을 보기위해서 주변 꼴호즈에서 몰려들었소” 염 따지아나 할머니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연해주 시절 고려극장의 주요 멤버들 즉, 무대예술을 열광적으로 사랑한 태장춘, 연성용, 채영, 이길수, 김해운, 김진, 리함덕, 최봉도, 정후경, 최길춘, 이경희, 정 빅토르, 오철남 등이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우수토베 시절이 끝나갈 무렵엔 원년 배우들이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연로해졌거나 세상을 타계하기도 했기 때문에 새로운 배우의 충원문제가 끝없이 제기되었다.

 이 문제는 고려극장이 크즐오르다로 재이주를 한 이듬해인 1960년부터 해결되기 시작했다. “이때(1960년) 부터 고려극장은 타쉬켄트 극장대학을 졸업한 전문 배우, 연출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나중에 카자흐탄 인민배우로 된 김 블라지미르, 공후배우들이 문 알렉산드로, 손 올라가 박소피아, 림로자 등이다. 이들이 바로 고려극장의 제2세대 배우들이다”고 겐나지 선생은 증언해 주었다.
겐나지 선생은 “2016년 현재, 극장의 주축을 이루는 50대 후반의 백 안또니나, 최로만 등은 제4세대 배우에 해당될 정도로 세월이 흘렸는데, 지금 극장의 문제는 구소련의 해체로 인한 혼란기(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때 후배 배우들이 들어오지 않아서 약 20년간 공백이 생김으로써 극장의 전통이 아래 세대로 이어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면서 “그러나 최근 30대와 20대의 젊은 배우들이 고려극장을 다시 찾고 있다”고 다행스러워했다.
한편, 그는 “고려극장의 <크즐오르다 시기>에 정인묵 작곡가의 지도하에 창설된 악단이 1968년부터 극장내에서의 자립적인 오케스트라 콘서트 ‘아리랑’이란 지위를 받게 되는데, 성악가, 가수, 민족무용가들이 ‘아리랑’ 가무협주단에 망라돼 일을 했다”면서 “이 ‘아리랑’ 가무협주단은 고려인들 뿐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캄차트카 까지, 무르만스스크에서 떼르메즈에 이르기까지 소련방방곡곡에서 관중들의 사랑과 인기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카자흐스탄에서 생존해 있는 유일한 인민배우 김 림마선생은 “난 원래 우즈베키스탄에서 발레를 전공하는 꿈많은 소녀였습니만 아리랑 가무단의 초청으로 고려극장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면서 “고려극장이 우리의 민족무용과 전통문화를 보존 발전시킨 측면에서 본다면 1946년부터 1986년까지 고려극장을 지도해온 조정구 극장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의 노력에 의해 우즈베과 카자흐에 나뉘어져 있는 공연예술단을 하나로 합쳐서 오늘의 강한 고려극장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어요.”라고 조 전극장장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뻬레스트로이카 의 시작과 소련의 해체는 다른 극장가 마찬가지로 고려극장에도 시련의 시기였다. 88년부터 96년까지 겨우 몇 편의 연극만 무대에 올렸고 그 유명한 아리랑 가무단은 사실상파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시에 90년 5월에 서울국립극장과 자매결연을 맺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과 교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형편이 나았고, 급기야 카자흐정부의 도움으로 현재위치에 고려극장 전용 건물을 받기에 이르렀다. “고 겐나지 선생은 말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400여편의 희곡, 연주회, 기타 작품들을 선보인 고려극장은 연해주를 출발해서 끄즐오르다, 우슈토베, 다시 끄즐오르다시대를 거쳐 1968년부터 알마티 시대를 열고 그 어려웠던 소련해체 후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카 문화교류의 첨병이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전통문화와 고려말을 유지, 보존하는데 더 큰 업적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후원하였습니다)

 

 

⦁ 크즐오르다, 고려인의 땀으로 중앙아시아 최대 벼생산지가 되다.
아직도 기억되는 이름 ‘최정학’, ‘김만삼’
 7.png

< 빛이 바랜 홍범도 장군 기념공원 안내표지판 >
 8.png

<홍범도 장군 기념공원의 모습>


기자는 홍범도 장군이 안장되어 있는 크즐오르다시 홍범도 장군 묘역에 들러 참배한 뒤 인근에 있는 ‘아방가르드’와 ‘제3인터내셔날’ 등 고려인 꼴호즈를 취재하기 위해 나설 계획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에서 차량으로 15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는 홈범도 장군 묘역에 도착했다. 안내 입간판은 빛이 바래고 페인트칠이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가서 제대로 읽기가 어려워서 도저히 안내간판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묘역의 출입문 격인 ‘통일의 문’은 더 가관이었다. 쇠사슬과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옆 개구멍(사람들이 출입했는지 울타리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깨진 보도블록 사이로 잡초가 무성한 홍장군 묘역은 따가운 8월의 햇살이 음산하게 느껴질 정도로 쓸쓸하고 황량함을 주었다. 21년전, 기자가 처음 방문했을 때 보았던 그 묘지보다 우리정부의 지원으로 조성된 묘역이 더 초라해 보이는 듯했다.
씁쓸함을 뒤로 하고 기자는 먼저, ‘제3인터내셔널’꼴호즈를 향했다. 끄즐오르다 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2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제3인터내셔널’ 꼴호즈에는 8월말인데 벌써 벼수확이 한창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벌판에 마치 손톱만한 크기의 콤바인과 트럭이 벼수확을 하고 있었다. 기자는 마을에 들러지 않고 바로 벌판으로 향했다.
 

9.png

<제3인터내셔널 쌀 창고에 쌀을 내리는 트럭의 모습>


손톱만큼 작아 보이던 콤바인은 다가갈수록 굉음의 크기만큼 웅장한 모습으로 기자의 눈앞에 다가왔다. ‘끝없는 지평선에선 거대한 트럭과 콤바인도 이렇게 작게 보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찰라, 작업반장인 예르잔(37)씨가 기자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작업반원들은 그가 “까레이츠(고려인이란 의미의 러시아어)’라면서 기자와 대화를 나눠보기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우리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옆에 있던 50대 후반의 카자흐인은 자신의 한국어 실력을 뽐내듯 ‘술이’, ‘밥이물이’ ‘개장국’ 등 고려말 어휘들을 뱉었지만 그는 우리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고려인 어머니와 카자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한-카 혼혈이었다.
기자는 그로부터 제3인터내셜날 꼴호즈에 대한 많은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우리 마을에는 3천 헥타르(30km2)정도의 논을 가지고 있지만 끄즐오르다에는 이런 집단농장들이 수십개 있다”면서 “이 꼴호즈는 고려인 ‘최정학’이 만든 것이다. 이 꼴호즈는 최정학의 분신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그의 땀방울이 배어있고 지금까지도 주민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고려말 어휘들을 나열하며 기자와 작업반원들을 웃음으로 몰고갔던 로히트(53)씨는 “우리 읍내에는 ‘최정학’ 거리가 있다”면서 “‘찹쌀’이라는 쌀을 재배했다”고 자랑하였다.
순간, 그가 러시아어로 말했지만 ‘찹쌀’만은 우리말로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에 솔직히 움찔했다. 이 꼴호즈의 제1대 조합장(또는 집단농장장)이었던 최정학은 카자흐스탄에서 쌀생산 증대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였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시 총력생산체제로 전환된 상황에서 세계기록차원의 쌀을 생산하여 국가에 납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수확량과 생산성이 강조되던 그 시기에도 선조들이 재배해왔던 그러나 생산량은 품종개량된 벼에 비해 형편없이 작은 ‘찹쌀’을 재배했던 것을 로히트씨를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여튼, 구소련시기에 만들어진 카자흐스탄 문서보관소에는 농업집단화로 인한 생산 증대의 성공적인 사례 영상 또는 기록물로 남아 있는 것을 기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
제3인터내셔날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꼴호즈가 있었다. 역시 끄즐오르다에 있는 고려인 꼴호즈‘아방가르드’였다. ‘아방가르드’꼴호즈에 사는 라리사(67) 할머니는 “우리 꼴호즈는 당시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의 배우였던 이 함덕(고려인들 사이에서는 춘향 ‘함덕이’로 더 잘 알려진 인민배우), 이 니콜라이의 고려말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는 국가영화필름도 있을 정도였다.”고 증언해주었다. 
그녀는 “이 국가영화필름에는 아방가르드 꼴호즈의 설립 및 변천사, 농사짓는 법, 집단 농장내의 한국어 중등학교, 농장장 김만삼의 지도아래 이루어지는 적극적인 벼농사 과정, 현지의 카자흐인과 협동작업을 하고 있는 농장 가축작업반, 수확된 벼의 국가납부 장면, 집단농장의 전체 총회 모습, 집단농장에서의 여가생활, 가을걷이 후의 결혼식 및 축제, 가을걷이 축제에 출연한 크즐오르다 고려극장 공연 등을 소개했다”고 기억해 주었다.
기자는 두 꼴호즈를 방문하여 동포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면, 1937년 중앙아시아 정주 후 불과 몇 년만에 전 소련에 모범이 될 정도로 고려인집단농장이 활성화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려인 김만삼은 이외에도 벼 도정공장 및 꼴호즈 조합원들을 위한 문화회관 건립 등의 업적으로 최소한 크즐오르다 고려인들의 가슴에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한편, 기자는 아방가르드에서 운좋게도 1952년 카자흐스탄 북쪽 쿠스타나이주(州)에서 밀농사에 종사했던 고려인들의 얘기도 듣게 되었다. 1937년 강제이주 당시 약 4,000명의 고려인이 남부 시베리아에 해당되는 이 지역에서 밀농사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고려인들이 벼농사에만 국한해서 종사한 것이 아니라 연해주 시절 각자가 이주된 지역에서 기존의 농업체계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인에 대해 좀 더 다양한 방면에서 깊이 있는 취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함을 실감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후원하였습니다)

 

 

⦁ 고려인의 도시, 아랄스크….. 아랄해의 물고기는 고려인 선장들이 잡았다.
 10.png

<사막으로 변해버린 아랄해 한가운데 덩그렇게 남은 폐선이 이곳이 과거에는 바다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11.png

<그물을 손질하는 아랄해의 어부들. 아랄해에는 아직도 어업을 생업으로 삼는 어부들이 있다>
 

12.png

<아랄해 어부들의 모습>


기자는 끄즐오르다의 ‘제3인터내셔널’꼴호즈에서 “요즘엔 예전 쌀 수확량의 2/3정도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말라버린 아랄해서 소금바람이 불어와서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아랄해의 생태환경 변화 때문에 아무다리아강변의 비옥한 땅이 점점 박토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랄스크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이를 확인해 보기로 취재일정을 수정했다.
‘아랄스크 호텔’에 여장을 푼 기자는 이 지역의 지리를 잘 아는 현지인을 찾기 위해 호텔 종업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호텔이라는 이름과 전혀 걸맞지 않을 정도로 매우 열악한 시설이었지만(1940~50년에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아랄스크를 상징하듯 침대 스프링이 늘어나서 등이 구부정해 질 것 같은 침대와 뚜껑 없는 화장실 변기, 장판으로 된 바닥은 대충 50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순수한 눈빛으로 투숙객을 맞는 직원들에게 아랄해 소금사막의 지리를 잘 아는 분을 수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난 모른다”였다. 이번 취재가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밀려왔다. 기자는 허기진 배도 채울 겸 호텔 맞은편에 있는 ‘친선’이라는 고려인 식당으로 갔다. 이 식당은 6년 전, 기자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방문을 앞두고 아랄해의 생태환경을 취재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발굴해 놓은 고려인 김 세르게이씨와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것으로써, 아랄스크 시청사 맞은편 시내 요지에 위치해 있다.
기자가 갈 때마다 식당은 현지인 손님들로 늘 붐벼서 그 비결이 궁금했었는데, 이날도 현지 카자흐인들이 여기저기에 앉아 고려 당근채(현지인들은 마르코프채라고 한다)와, 국시 또는 감자배고자를 시켜놓고 먹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기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르게이는 바로 알아본 듯, 금니로 씌운 앞니를 드러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본관이 같은 김해 김씨인데, 기자를 자기와 친척이라고 매우 환대해주었다.
어쨋던, ‘친선’식당은 모래바람이 부는 아랄스크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 준 장본인답게 이날도 기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고 더불어 과거 아랄해에서 잡은 물고기로 통조림을 만들던 공장이며, 선박 수리소와 잡은 물고기를 하역하던 선창가들을 안내해 주었다.
세르게이는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해서 점점 말라가는 아랄해의 소금사막을 눈으로 확인시켜주기 까지 했다. 옛 선창가에서부터 출발하여 약 1시간 반 동안 아랄해 한 복판을 향해 달렸다. 그는 “아랄해는 시르다리아강과 아무다리야 강물이 흘러들어가서 만들어지는데, 그 물을 중간에서 다 빼써버리니까 물이 줄어들어서 이렇게 사막으로 변해 버렸소”면서 “바닷물이 말라버려서 사막 한가운데 덩그렇게 남은 배가 수십 척 있었소”라고 말해주었다.
사막속에 놓여 있는 폐선을 찍은 사진은 아랄해의 생태문제와 함께 여러 차례 전세계에 소개되어 익숙해져버렸지만 실제로 와서 본 아랄해의 모습은 과연 여기가 불과 30여년 전까지 바다였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카자흐스탄의 여느 스텝과 사막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말 녹슨 폐선만 없었다면 거짓말 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랄해가 바다임을 증명해주는 그 많던 폐선들도 고철상들이 잘라가 버렸기 때문에 단 1척 만이 남아있다고 했다. 세르게이는 기자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사방이 모래와 가시덤불 속에 정말 녹슨 폐선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좀 더 달려서 어부들이 한창 고기잡이를 하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슬라바(27)씨는 “아랄해에는 강물이 유입되어 만들어진 바닷처럼 넓은 호수이지만 호수 바닥이 소금기가 워낙 많은 땅이기 때문에 바닷물처럼 짠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바다에서 잡히는 대표적인 어종인 가재미도 잡히지만, 강물이 인입되는 부분에서는 민물고기도 많이 잡힙니다”고 말해주었다.
또한 그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소련 군인들은 이 곳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통조림을 먹고 나찌 독일군과 전쟁을 했다고 할 정도로 40~50년대에는 풍부한 어획량을 자랑했다”고 말해주었다. 그 흔적은 아랄스크 시청 앞 거리 벽화 잘 나타나 있었다. 작은 타일을 붙여 만든 벽화에는 갈매기와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어선, 그리고 출렁이는 아랄해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도시이지만 과거엔 대표적인 어항으로 이름을 날렸던 곳임을 짐작케 했다. 그런데, 이 아랄스크를 대표적인 어항으로 만든 이는 놀랍게도 고려인들이었다.
아랄스크 시청에서 출발하여 소금사막을 지나 약 65km를 달려 다녀온 아랄해 바닷가에서 만난 마랏(56)씨는 “쏘련시절, 아랄스크에서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분이 딱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은 바로 아랄해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업꼴호즈 소속의 선장이었습니다”라고 했다.
 

13.png

<아랄스크 시내 모습>


이 작은 바닷가 도시에서도 노력영웅이 배출되었구나 싶었는데, 마랏씨 “그 분은 바로 민 알렉산드르 라는 고려인 선장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우리 도시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기로 유명한 선장들은 대부분 고려인들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은 연해주 시절, 블라디보스톡 앞바다와 동해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로 구성된 어업꼴호즈도 있었던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기자는 그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랏씨는 “저녁에 그물을 던져놓았다가 아침에 그물을 걷으면 보통 55킬로 정도는 잡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희 아버지는 고려인이었던 선장과 함께 아랄해를 누볐다고 어머니로부터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고 증언해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모기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모래바람이 음식과 함께 입 속에 들어와서 도저히 사람이 살기 힘든 죽음의 도시인 듯한 분위기였던 아랄스크가 고려인 선장들이 활약하던 그런 항구 도시였구나라는 사실을 알고 보니 갑자기 시청 앞 벽화가 가슴과 또렷이 각인되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후원하였습니다)

?

  1. No Image

    구글 픽셀 버드가 초래할 변화들

    40개 언어 동시 음성번역이 가능한 구글 픽셀 버드(Google Pixel Buds)가 출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픽셀 버드는 음성을 이용한 실시간 번역 기능이 지원됩니다. 이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연결된 픽셀 2 핸드폰이 ...
    Date2017.10.12 Views12
    Read More
  2.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80주년 기념 특별기획 – “80년전의 기억속으로” ] 2. 우리말과 전통문화를 지키며 사는 원동마을 세자매

    전통문화를 지키며 사는 원동마을 세자매 “고향 한번만 가봤으면 얼마나 좋겠소” <원동마을에 사는 세자매. 왼쪽부터 김따냐(59) 김알료나(61) 김안나(65) > 우리는 원동에 살다가 카자흐스탄 실려왔소 첨에는 고생 하면서 구차하게 살았소 고생하...
    Date2017.10.05 Views4
    Read More
  3. No Image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80주년 기념 특별기획 – “80년전의 기억속으로”]

    육성 증언 : 천 미하일 다닐로비치(92. 당시 12세) “강제이주 당시, 중국으로 넘어간 고려사람들도 많았소.” 자료를 통해본 강제이주 – 80년전을 기록한 카자흐스탄의 고문서 자료들 홍범도 장군이 묻힌 곳, 끄즐오르다 급감하는 고려인 공...
    Date2017.09.20 Views19
    Read More
  4. No Image

    알마티의 첫 느낌

    어느 나라고 공항에서 처음 나왔을 시각이 어두운 밤이면, 미지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조금 움츠러들게 된다. 알마티도 그랬다. 밤 10시가 넘어서 공항에서 나서자, 연구소 대표님께서 픽업을 나와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어두운 거리때문에 조금 주눅이 ...
    Date2017.07.17 Views74
    Read More
  5. No Image

    LG G6 콘서트장에서의 단상

    어제 저녁 국내 대기업의 스마트폰 론칭행사에 K-POP 그룹과 러시아의 유명 여성그룹이 출연한다고 해서 보러 갔다. 큰 딸은 한국에서 온 그룹들이 유명하지 않다고 안 갔지만 나는 나머지 남자 애들 셋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반강제로 콘서트 관람을 강행했...
    Date2017.06.06 Views79
    Read More
  6. No Image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 전망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는 저유가 국면에서 탈출하여 소폭 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난 4월 22일 IMF는 2017년 중앙아시아 경제성장 전망을 발표하였습니다. 2017년 카자흐스탄의 경제성장률을 2.5%로 예측하였고, 2018년에는 3.4%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
    Date2017.06.06 Views132
    Read More
  7. No Image

    [건강] 힘든 봄, 그리고 저녁 굶기

    봄철 건강을 위해 겨울에 잘 쉬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이번 겨울에 잘 쉬지 못 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땅에 사는 모두가 공감하듯 시절이 너무 난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겨울이 되면서 모처럼 시간이 난 농촌에 사는 이웃들과 그동안 하지 ...
    Date2017.05.31 Views41
    Read More
  8. 우슈토베를 다녀와서

    5월 20일 한글학교가 주최하고, 총영사관 (재외동포재단)과 LG가 후원한 '알마티 한글학교 20주년 , 고려인 정주 80주념 기념 역사 탐방이 있었다. 한글학교 중고등부와 학부모를 비롯하여 교민들까지 총 54명이 LG버스 두대로, 고려인 마을, 고려극장, ...
    Date2017.05.23 Views55
    Read More
  9. [신년사] "올해는 한-카 수교 25주년, 고려인 동포 정주 80주년, 고려극장 설립 85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 한민족의 위상을 높일 계기"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알마티총영사관 전승민 총영사입니다.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2016년 한 해 동안 총영사관에 아낌없는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신 동포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재 카자흐스탄 경제는 전 세계적인 경기...
    Date2017.01.03 Views231
    Read More
  10. [신년사] "붉은 닭의 해, 과욕이나 부족함이 없도록 조화를 유지하는 한해되시길...."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 밝았습니다. 먼저, 독자 여러분들의 가정과 일터위에 만복이 깃드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16년 병신년(丙申年)은 그 어느 해보다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했던 한 해였습니다. 모국은 사상 초유의 '...
    Date2017.01.03 Views174
    Read More
  11. No Image

    [특별기획] 러시아인, 그들은 누구인가?

    전적이고 극단적인 사랑과 우정 극한 추위, 팽창과 좌절의 역사에서 형성 <이 원고는 Chindia Plus 2016년 12월에 기고한 글입니다.> 올해 23세인 안젤리나 니콜라우(Angela Nikolau)는 루퍼(roofer)다. 루퍼는 높은 건물이나 초고층에 침투해 사진을 찍는 사...
    Date2016.12.19 Views244
    Read More
  12. 한인일보 특별기획 : 중앙아시아 아리랑 로드를 따라서

    한인일보 특별기획 : 중앙아시아 아리랑 로드를 따라서 아리랑은 한반도에서 태어났지만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따라서 만주와 연해주로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퍼져나갔다. 하와이와 미국 그리고 유럽에서도 아리랑은 불려졌다. 그래서 한민족의 해...
    Date2016.11.11 Views340
    Read More
  13. [기고] 홍범도 장군 묘소,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무성한 잡초와 깨진 보도블록이 황량함 더해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 수석연구원)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소. 2016년 9월2일. 사진 = 김상욱> <홍범도 장군 기념공원 안내판. 2016.09.02 사진 = 김상욱> 며칠전, 모 공중파 방...
    Date2016.09.22 Views936
    Read More
  14. No Image

    유럽 문명 짓밟은 '정복자' 티무르 사마르칸트를 '세계문명의 중심'으로(상)

    김호동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 촌락에 이슬람 최대도시인 ‘카이로’‘바그다드’이름 붙이고 ‘비비 하늠’모스크 등 거대한 건축물 건설, 이슬람 최고 문화도시로 북쪽의 우즈베크, 서쪽의 이란‘사바피’에 밀려...
    Date2016.08.16 Views286
    Read More
  15. No Image

    사드와 러시아 : 러시아가 중국보다 덜 적극적인 이유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해 러시아는 중국보다 덜 요란스럽다. 물론 러시아는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고 향후 극동지역에서 불필요한 군비 경쟁을 우려하였다. 러시아는 사드에 탐지되지 않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력을 강화하거나 동부 군관...
    Date2016.07.26 Views255
    Read More
  16. No Image

    살아나는 러시아 경제

    러시아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 지난 4월 무디스는 러시아의 국가 신용 등급을 국제사회의 예상을 깨고 기존 Ba1 등급을 유지하였다. 세계은행은 2016년 러시아 GDP 하락률을 기존 전망치 1.9%보다 적은 1.2%으로 수정하였으며 2017년에는 1.4%, 2018년은 1.8% ...
    Date2016.07.12 Views177
    Read More
  17.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3

    한국, 유라시아 유목제국의 역사를 밝히다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지난 25일, 이쉭박물관에서는 열린 내년 한-카 합동 발굴조사에 대한 업무협정 체결식 후 양측 대표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지난 토요일(25일), ‘황금...
    Date2016.06.29 Views296
    Read More
  18. <수도의 날을 축하하며> 내가 본 ‘아크몰라’와 ‘아스타나’

    <수도의 날을 축하하며> 내가 본 ‘아크몰라’와 ‘아스타나’ ’상전벽해’는 이를 두고 하는 말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 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1997년 눈보라가 치는 12월 중순, 필자는 ‘아크몰라’를 처음으...
    Date2016.06.29 Views225
    Read More
  19. No Image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2

    중앙유라시아의 이슬람화와 투르크화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아랍 침략을 받기 전 중앙유라시아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했다. 메르브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산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가장 유력했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야곱...
    Date2016.06.21 Views170
    Read More
  20. No Image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 11

    중앙유라시아의 이슬람화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알마타 시민들 뿐만 아니라 이 도시를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명소 중에 하나가 바로 ‘침불락’이다. 주말이면 연인이나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로 붐비는 &lsqu...
    Date2016.06.16 Views273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