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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몽골

 

  고비 사막은 거대했다. 울란바토르에서 꼬박 24시간을 가야 내몽골의 수도 후허하어터(呼和浩特)에 달한다. 드문드문 쌍봉낙타가 보이고, 뜨문뜨문 게르도 있었지만, 마을이라 할 만한 곳은 딱히 드물었다.

  한 나절이 지나서야 거대한 풍력 발전소를 만났고, 비닐봉지와 페트병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흔적이다. 외몽골의 국경 도시 자민우드에 도착한 것이다.

  사막 한 복판에서 국경이 갈렸다. 간단한 출국 수속을 마치자 곧 오성기가 보였고 한문이 눈에 들었다. 중국의 국경 도시 얼롄하오터(二连浩特)였다. 불과 100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이번에는 입국 수속이 진행되었다. 번거로울 일은 없었다. 모든 절차가 기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짐 검사도 눈 시늉이다.

  의아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입국 심사를 마친 기차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더니 한 격납고 안으로 들어간다. 광궤의 차이로 기차 바퀴를 교환해야 했던 것이다. 몽골은 여전히 소련이 깔아준 철도를 사용하고 있다.

  덕분에 역 밖으로 나가볼 수 있었다. 국경 도시의 풍경을 잠시나마 맛보았다. 중국임에도 여전히 키릴 문자 간판이 여럿이었다. 내 지갑에는 몽골 돈이 약간 남아 있었다. 구멍가게에 들려 사용할 수 있냐고 중국어로 물었더니, 주인아저씨는 몽골어로 대답한다. 눈치 상 되는 것 같다. 캔 맥주 둘을 샀다. 북경의 옌징 맥주도 아니고, 산동의 칭다오 맥주도 아니다. 흑룡강의 하얼빈 맥주이다. 역시나 이곳은 북방이었다. 그래도 잔돈이 남았다. 혹시 중국 돈으로 바꿀 수도 있어요? 그 분은 이번에도 몽골어로 대답하고 환전을 해주셨다. 말은 달라도 뜻은 통했다.

  역으로 돌아왔더니 기차의 생김새가 달라졌다. 내가 타고 왔던 몽골 기차 뒤로 중국 기차 다섯 칸이 붙었다. 몽-중 국제선에 중국 국내선을 합친 것이다. 국제선은 여전히 몽골 안내원들이, 국내선에는 중국 안내원들이 자리했다. '일차양어(一車兩語)'의 풍경이었다. 레일을 바꿔 단 기차는 쌩쌩해졌다. 한결 속도가 붙었다. 과연 철도 대국, 중국이었다.

  내몽골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리 간판들이었다. 몽골의 옛 문자들이 고스란히 쓰이고 있다. 몽골 문자와 한자가 병용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시내버스 안내는 몽골어가 먼저이고, 중국어가 그 다음이었다. 키릴 문자가 전면화 된 외몽골과는 딴 판인 것이다.

  외몽골에서 키릴 문자 전용 정책이 도입된 것은 1941년이다. 몽골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민주화'와 함께 몽골 문자 복원을 선언했지만, 20년이 되도록 거의 실현되지 못했다. 근 두 세대 만에 전통 문자를 완전히 소실한 것이다.

  내몽골서도 문화 대혁명 시절에는 몽골어 교육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개혁 개방과 함께 초등학교부터 다시 보급되었다. 몽골어 전용의 컴퓨터 자판도 만들었다. 지금은 모든 공공장소에서 몽골어와 한자가 함께 표기된다. 이중 언어 생활, '일지양어(一地兩語)'의 실천이다. 한마디로 제국의 유산이다. 소련/(외)몽골과 중국/내몽골의 운명을 가른 기저라고 하겠다.

 

제국의 유산

 

  중화인민공화국은 몽골의 독립(과 대만의 미수복)을 제외하면 대청제국의 영토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현재 중국 땅의 절반이 18세기 만주족이 정복한 것이다. 그만큼이나 내/외몽골의 운명에도 대청제국이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내몽골은 대청제국 초기에 병합되었다. 만주족은 고비 이남의 내몽골과 연합하여 중원을 장악한 뒤, 고비 이북으로 진격했다. 외몽골(당시 할하 몽골)까지 정복을 완수한 이가 강희제이다. 즉, 고비 사막을 경계로 내/외몽골은 약 반세기의 차이를 두고 대청제국에 따로 편입된 것이다. 20세기 내/외몽골이 분화하는 먼 기원이었다.

  대청제국에서 변경 통치를 담당한 기관이 이번원(理藩院)이다. 한족 관료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었던 배타적 통치 기구였다. 이곳에서 몽골족에 행한 정책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몽골족과 한족의 교류를 차단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억의 산물이었다. 몽골은 한족(송나라)과 연합하여 여진족(금나라)을 멸했던 바 있다. 그 여진족의 후예가 바로 만주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몽골족과 한족의 결혼도 금지했고, 몽골에서의 한문 교육도 배제했다. 그래서 대청제국 내내 몽골족과 한족은 서먹하고 소원했다. 한 지붕, 딴 가족이었다.

  내/외몽골 간 접촉도 방지했다. 대청제국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갖되, 몽골족 전체를 아우르는 정체성을 배양하지는 못하도록 했다. 몽골에서의 활불(活佛)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칭기스칸의 핏줄에서 활불이 등장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오로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만 인정함으로써 몽골에서 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리더십이 출현하는 것을 봉쇄한 것이다. 몽골족의 티베트 방문까지 제한시켰을 정도이다. 대신에 몽골 왕실과 귀족, 라마승들에게는 높은 지위를 보장하는 회유책을 구사했다.

  대청제국은 분할 통치의 선구자였다. 중원은 군현제, 변방은 봉건제를 구사하여 대일통(大一統)을 달성했다. 몽골은 왕족과 라마승들이, 서장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귀족들이, 신장은 이슬람 율법을 따르는 토착 관료들이 제 각기 중앙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개별적으로 통치했다.

  매우 급진적인 형태의 '다문화주의'였고, 매우 조숙한 형태의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s)'였다. 하여 몽골족과 장족, 회족, 한족들은 각기 만주족과 주종(主從) 관계를 맺되, 상호 간의 교류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대청제국의 천하(天下)는 물리적 결합이었지 화학적 통합은 아니었던 것이다. '중화 민족'이라는 20세기의 용광로(Melting Pot) 모델과는 전혀 달랐다.

 

제국에서 제국'들'로

 

  제국의 유산은 20세기에도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국에서 국민 국가로의 전환이라는 통상적 진술도 실상에 딱히 부합하지 않는다. 하나의 제국이 붕괴하자 여러 제국이 각축했다.

  먼저 1911년 독립을 선언한 몽골부터 제국을 지향했다. 티베트 불교 서열 3위의 인물을 '복드칸(Bogd Khan)'으로 등극시켜 티베트와 연합하는 라마 불교 제국을 모색했다. '복드'는 몽골어로 신성하다는 뜻이다. 칭기스칸의 핏줄을 이어받은 활불을 재차 정치적 지도자로 삼은 것이다.

  외몽골은 이 점을 십분 활용하여 내몽골과의 통합도 도모했다. '근대화=중국화'를 추구하는 신해혁명에 내몽골 지배층 또한 반발이 거세었기 때문이다. 몽골족의 입장에서 신해혁명은 한족이 만주족을 전복한 종족 혁명에 다름 아니었다. 황제를 대체한 총통이라는 제도 또한 낯설기만 했다. 종교적 신성함이 없는 세속적 지도자에게는 좀체 권위를 느낄 수 없던 것이다. 전통과 언어와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상이한 중화민국을 사절했던 것이다.

  공화파 혁명가들은 변방의 귀족과 종교 지도자들을 혐오했다. '멍청한 몽골인(愚蒙)'이 시세를 전혀 따르지 못하는 구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을 포용한 것은 역설적으로 '반동파'로 간주되었던 위안스카이였다. 그는 라마 불교 세력을 중시했다. 몽골제국을 복원하자며 내몽골을 유혹하는 복드칸에 맞서, 위안스카이는 대청제국이 보장했던 내몽골의 귀족과 승려들의 권리를 계승하고, 더 높은 직위와 더 높은 급여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1912년, 21살짜리 내몽골 라마를 깍듯하게 예우하며 광명대국사(光明大國師)라는 직위까지 부여했다. 대청제국 시절보다 신분을 상승시켜 준 것이다. 그의 부모와 형제, 스승도 작위를 수여했다. 공화국 안에 제국을 품고자 했던 것이다. 아니 위안스카이는 서둘러 공화정을 거두고, 제정으로 복벽할 것을 도모했다.

  위안스카이의 실각으로 중화민국은 복원되었으되, '제국의 근대화'는 지속되었다. 라마들에 대한 대접은 더욱 후해졌다. 봉급을 더욱 높여주고 경호원까지 제공했다.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의 등장은 중화민국에 도리어 기회였다. 공산 국가의 불교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불교 지도자들이 베이징으로 대거 피신한 것이다. 그들은 종교를 거세하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기보다는 중화민국의 품에 안기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들이 베이징에서 조우한 이가 판첸 라마이다. 판첸 라마는 영국의 지원으로 독립을 추진하는 달라이 라마에 불만을 품고 티베트를 떠났다. 판첸 라마의 견해는 단호했다. 중화민국이야말로 대청제국을 계승한 유일한 국가이기에, 외몽골도 티베트도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몽골의 소련, 티베트의 영국 모두 라마 불교에는 무지한 외세였을 따름이다. 즉, 대청제국이 달라이 라마를 모셨듯, 중화민국은 판첸 라마를 모시기로 했다. 1931년 판첸 라마는 호국선화광휘대사(護國宣化廣輝大師)가 되었다. '왕족을 존중하고, 활불을 공경하라(尊重王公, 恭敬活佛)'는 선전 구호가 널리 확산되었다.

  중화민국이 판첸 라마에 정성이었던 것은 대일본제국과의 경쟁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도 판첸 라마에 무척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의 구호에 맞추어 판첸 라마를 적극 활용코자 했다. 나가사키에서 열린 범아시아 대회에 초청하고, 선양에서 열린 반소련 대회에도 초빙했다. 만주국 수립 이후에는 몽골로 진출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불교를 더욱 드높였다. 한편으로는 서구와 동구에 저항하며 동아의 문명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대일본제국에 도전하는 몽골 민족주의를 견제하기 위하여, 초국가적인 성격을 담지한 라마불교를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대일본제국의 공세에 맞서 중화민국 또한 '범아시아주의'를 설파했다. 몽골, 티베트는 물론 인도, 버마(미얀마), 태국(타이)까지 불교를 통해 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활불과 승려들을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초청하여 성대한 불교행사를 치르고, 쑨원의 무덤도 함께 참배했다.

  답례로 승려들은 난징, 상하이, 항주(항저우)를 순례하며 불법을 설파하고 중국의 통일을 강조했다. 그들은 몽골과 티베트, 만주는 중국임을 선포하며, 소련과 영국, 일본은 즉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마 불교(북방)와 삼민주의(중원)의 결합을 모색한 것이다. 즉, 대일본제국의 만-몽 연합 국가 건설을 저지하려 들면 들수록 중화민국은 점점 복합 국가=제국에 방불해져갔다. (외)몽골제국도, 대일본제국도 중화민국도 하나같이 대청제국을 흉내 내고 모방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근대 국가를 지향했으되, 실질로는 제국의 정통성을 과시하며 경쟁했다.

 

제국의 근대화

 

  과제는 하나였다. 누구 중화 세계의 태평천하를 복원할 것인가? 최종 승리는 중국공산당의 몫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중국공산당이야말로 '제국의 근대화'에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무엇으로? '대장정'이다. 대장정은 제국을 복원하고 갱신하는 기나긴 행군이었다. 근거지부터 서북 지역의 연안이었다. 변방에서 출발했기에 소수민족의 자치 및 자결 의지를 결집할 수 있었다. 1938년 발표한 마오쩌둥의 '신단계론(論新階段)'이 대표적 문헌이다. '소수 민족의 자치를 도와야 비로소 각 소수 민족이 연합하여 항일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 소수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민족 간 평등한 연합도 이루어질 수 없다.'

  얼핏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한 근대적 언어 같지만, 실상은 자치와 연합의 상호 진화를 꾀하는 제국을 계승한 것이었다. 항일을 위한 연합, 연합을 통한 항일이라는 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 또한 과거 몽골족이나 만주족이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다민족 연합 통일 제국을 건설해갔던 과정과 일맥이 상통했다.

  1947년 소수 민족 자치구를 가장 먼저 선보인 곳이 내몽골이다. 내몽골은 공산당에는 열렸으되, 국민당에는 닫힌 공간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국공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즉,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해가는 과정은 만주족의 대청제국 건국 과정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했다.

  만주에서 몽골로, 변경에서 중원으로. 과연 수도의 처소 또한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겼다. 난징은 명제국과 중화민국의 수도였다. 베이징은 대원제국과 대청제국의 수도였다. 중화민국이 한, 송, 명을 잇는 중화제국이었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당, 원, 청을 잇는 유라시아제국에 가까웠다.

  제국의 근대화로 중국의 내외 정책도 변경되었다. 이번원에서 관리했던 지역은 자치구가 되었다. 조공국과 호시(互市)국(유럽과 일본 등 중화 세계 밖에서 무역만 하던 나라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소수 민족에게는 자치권을 부여했고, 주변 민족에게는 자결권을 인정했다. 1955년 반둥 회의에서 공식화된 '평화 공존 5원칙'이 상징적이다. 암묵적이었던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근대적인 조약의 형태로 명문화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가 간 체제를 중화 세계의 내부로 수용하여 신형 대-소국 관계를 확립했다. 왕년의 상국(上國)과 하국(下國)은 더 이상 없다. 소수 민족과 주변 민족과 대동단결하여 항일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제국의 근대화'를 완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동력을 발판으로 미국과 소련에 동시에 저항하는 제3세계의 탈냉전 운동을 선도했다.

  반면 항일에서 항미/항소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이 집합적 역사 운동으로부터 이탈했거나 소외되었던 국가들은 하나 같이 '속국'으로 전락했다. 몽골은 독립하자마자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류큐(오키나와), 대만(타이완),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위성국(Satellite State)과 동맹국(Client State)은 하나같이 '속국의 근대화'를 경험했다. 북조선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지금껏 주권 국가에 이르지 못했다.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심연을 가르는 분열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제국의 근대화'와 '속국의 근대화'로 말미암은 상이한 국제 질서가 첨예하게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각기 '냉전'을 명분으로 근대화된 속국들을 만들어갔다.

  소련의 해체가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독립 국가들의 대거 등장으로 귀결되었음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탈냉전'이 한쪽의 일방적인 붕괴로 도래함으로써 다른 한쪽은 여전히 속국을 해소하지 못한 병폐를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근대 국가에 미달한 나라들이 도열하고 있는 것이다. 목하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가 요동치고 있는 근저라고 하겠다.

  '제국의 근대화'와 '속국의 근대화'가 빚어내는 '신냉전'의 양상은 작금의 동북아가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동남아에서 이미 구현되었다. 지난 4월 30일은 베트남 통일 40주년이었다. 사이공의 함락으로 '도미노 이론'은 현실이 되었다. 남베트남도, 캄보디아도, 라오스도 순식간에 공산화되었다.

  1975년 인도차이나는 온통 붉었다. 몽골이 아시아 최초의 공산 국가라면, 라오스는 세계에서 가장 늦게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올 12월이면 건국 40주년을 맞는다.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기저를 한층 세심히 살펴보기 위해서 '붉은 라오스'가 탄생한 저간의 사정도 복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다시 남하한다.( 이병한 역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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