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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80주년 기념 특별기획 – “80년전의 기억속으로”]

  1. 육성 증언 : 천 미하일 다닐로비치(92. 당시 12세) “강제이주 당시, 중국으로 넘어간 고려사람들도 많았소.”
  2. 자료를 통해본 강제이주 –  80년전을 기록한 카자흐스탄의 고문서 자료들
  3. 홍범도 장군이 묻힌 곳, 끄즐오르다
  4. 급감하는 고려인 공동체와 고려일보와 고려극장의 미래

이번 기획취재는 쉽지않는 주제여서 취재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부터 마치 한편의 논문을 쓰는 것과 같은 부담감이 밀려왔다.
 우선, 지역적으로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의 최초 정착지 우슈토베 지역과 동포사회의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던 문화단체들이 이주한 끄즐오르다 지역을 몇번을 다녀와야 할 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문의 제작여건상 일주일씩 편집실을 비울 수 없기 때문에 지난 봄 부터 9월 초까지 무려 6개원동안 틈틈이 출장을 다니면서 강제이주를 기억하는이주 1 세대부터 젊은이들까지 가능한 많은 이들을 만났다.
고려인 어르신들로부터는 그들의 생애담을 주로 들었고, 젊은이들로 부터는 다양한 주제를 던지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80주년과 미래에 대한 생각을 알고 싶었다. (편집자 주)

  “강제이주 당시, 중국으로 넘어간 고려사람들도 많았소.” 
   강제이주 1세대인 천 미하일 다닐로비치(92)씨는  80년 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알마티에서 차량으로 4시간 가량 떨어진, 고려인 최초 정착지 우슈토베에서 만난 천 미하일 할아버지는 1925년생으로서 강제이주 당시 12살의 소년이었다. 천 할아버지는 연해주의 스뽀뜰로 마을에서 태어났고  당시 부모님과 4형제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열차에 실려 우슈토베에 왔다고 한다.
취재진은 80년전, 당시의 상황을 가능하면 생생히 들어보기 위해 여러차례 우슈토베를 다닌 끝에 천 할아버지와 귀한 인터뷰 약속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우쉬토베로 가는 길은 카자흐스탄의 최대도시 알마티에서 차량으로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카자흐스탄정부가 추진한 ‘누를졸르(신실크로드)’ 프로젝트 덕분에  작년에 완공된 4차선 포장도로를 3시간을 달리면 알마티주의 주도인 딸띄꾸르간에 도착하게 된다.   작년초까지만 해도 군데군데 도로포장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알마티와 딸띄꾸르간까지 자동차로 약 4시간~5시간까지 소요되던 길이었다.
  딸띄꾸르간 도시 초입 로터리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꺽어 약 40분을 더 달리면 고려인 최초 정착지로 알려져 있는 우슈토베에 도착하게 된다.  우슈토베는 카자흐스탄 행정구역으로 알마티주  카라탈군 우슈토베 읍이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은 묽줄기가 만든 카라탈강을 따라서 원동읍(현재는 에스켈듸 읍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슈토베읍, 바슈토베읍이 차례로 나타난다.
    카라탈군은 심볼에 벼이삭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후 건설한 벼농사 조합(꼴호즈)으로 유명하다.  
  천 미하일 할아버지는 취재진에게 계속해서 당시를 회상해주었다.
 “1937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결정서가  나왔소. 거기에 뭐라고 써 있었냐 하면, 일본놈들이 탐지꾼(스파이)을 자꾸 보내니까  국경근처에 사는 조선사람들을 이주시키라고 되어 있었소. 그래서 우리 민족이 화차에 실려서 이곳 중앙아시아까지 왔소.  우리 부모님들이 모질게 고생했소.”
이어, 그는 “그때 중국으로도 많이 넘어갔습니다.  자기 식솔들을 데리고….   또, 조선으로 나갈 수도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조선으로 나간 사람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국으로 넘어간 사람들의 경우,  나중에 소련에 있는 친척들과 서로 편지를 쓰고 소재를 확인하다가  친척들을 보러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천미하일 할아버지는 가끔씩 탐지꾼(스파이) 등 함경도 사투리 어휘를 사용하셨지만 비교적 매우 정확한 표준말 발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그는 연해주에 살던 우리동포들을 조선사람, 고려사람, 우리민족 등으로 칭하면서 80년전 당시를 소상히  말해주었다.
“그때 중국으로 가고 싶으면 중국으로 가고, 조선으로 가고 싶으면 조선으로 갈 수 있었소. 그러나  원동에는 단 한명도 안 남기고 실어 보냈소”라고 증언했다.
취재진은 혹시, 소련 당국 몰래 중국으로 건나간 것인가? 라고 물어봤다.
그는 “소련에서 허가를 주었소”라고 답했다.  이어 혹시 그 당시에 강제이주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총살 당한 사람은 없었냐?  는 질문에  그는 “그런 경우는 없었소.  경찰이 시키는데로 했고 조선 사람들이 이주를 못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천 할아버지는 부모들이  짐만 꾸릴 뿐 아무말도 안해줘서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한달 정도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우슈토베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깔뻬 라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당시 12살 천 미하일 소년은 부모형제들과 함께 화차의 내부를 위, 아래층으로 나눈 기차를 타고 왔다고 한다.
 “주로 애들은 위층에, 어른들은 아래층에 탔소, 그때 우즈베키스탄보다 카자흐스탄에서 더 많은 고려사람들이 내렸소.  약 한달간 기차를 타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제대로 씻지 못하고, 옷을 갈아 입지 못한 것이었고 먹을 게 부족해서 배가 고팠다는 기억이 나오”
   우슈토베에 사는 또 한명의 강제이주 1세대이신, 텐 보리스 마카레예비치 (90세, 당시 10살)는 “우리는 원동의 꼴호즈 기간트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우슈토베로 이주를 해 왔다”면서 “큰 형님은 이주하고 몇해만에 터진 독-소 전쟁(2차 세계대전)으로 노동군으로 나갔고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이느라 엿을 만들어 팔고  이삭을 주워서 빵과 바꾸어 먹기도 했다”고 어려웠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한달동안 기차를 타고 오는 과정도 힘들었지만, 사실은 현지에 도착 한 후 기후가 맞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특히, 어린 아이들과  아픈 노인네들이 낯선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우리 고려사람이 원동에서부터 살아온 역사가  153년인데, 한국사람들은 1937년도에 원동에서 실려온 그것만 이야기 한다.   여기와서 농사짓고  카자흐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면서 지금까지 80년을 살고 있다는 것에도 많이 주목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고려사람들 한테 근면성이 없었다면 카자흐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하겠는가? “면서 “고려사람들이 마치 준비되어 있는 땅에 볍씨를 뿌리고 농사를 시작한 것처럼 알고 있으나  사실은 허허벌판이나 갈밭(갈대밭)을 논으로 만들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해주었다.
다시, 천 미하일 할아버지는 한달간의 여행끝에 도착한 우슈토베 역에는 말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대기중이었는데,  깔베 마을에 가 보니까  이미 카자흐인들의 조합이 있었고 집도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 집이라는 것도 천 할아버지 가족을 위해 통채로 준비된 것이 아니고 방 한칸을 내준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지금은 그 때 당시 집은 한 채도 안 남아 있는데, 당시 카자흐인들도 구차하게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38년도 봄에 직접 집을 지었습니다.
천 할아버지는 잠시 자리를 비우시더니 곧장  양손 가득 훈장을 가지고 오셨다.
“이것은 내가 받은 메달입니다.  우리 손자들이 가지고 놀다가 몇개는 잃어버렸습니다. (웃음)”  면서 “우리 카라탈군에는  31명이 노력영웅이 되어는 27명이 조선민족이었습니다.       4명이 다른 민족인데 ,  소련사람 3명  카자흐민족이 1명이었습니다”
  원동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없느냐? 는 질문에 천 할아버지는 “여기는 내가 태어난 땅이나 한가지데  원동에 가서 뭐 하겠는가?  자식들과 손자들이 다 여기 있는데…  원동에 나갈 생각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카자흐스탄은 강제이주 1세대들에게 과연 어떤 곳일까?
천 할아버지는 “원동에서 살았다면  내 자식들이 아마도 글을 다 읽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은 대학이 많은 대도시 알마티가 가깝기 때문에  다 대학을 보냈습니다. 대학이 없는 블라디보스톡에는 대학이 없어서  톰스크, 옴스크 등  멀리 가야지만 글 읽을 수 있었는데 형편이 못될 수도 있었을 테고……”라면서   천 할아버지는 대체로 자식들을 대학진학시킬 수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카자흐스탄에 온 것을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카자흐 민족들이 나그네 대접을 잘 합니다.  맏손녀는 소련 사람에게 시집 가고  손자 하나는 카자흐여자에게 장가갔고  내 조카는 위구르 민족에 시집을 갔습니다” 고 말하는 천 할아버지를 통해50년대 후반부터 늘기 시작하여 60년대 부터 급증하는 족외혼 현상을 그대로 반영하여는 말이었다.    
  “1988년 올림픽을 치루고 난뒤 한국이 잘산다는 소문이 났다.  우슈토베에서도 한국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을 다 필했지만 일자리가 없서 한국으로 많이 나갔다.
아들 동무가 한국에 나가서 일하고 있고 한국이 맘에 든다고 한다.
앞으로 식속을 데리고 나가서 살 수 도 있고”  최근 고려인 동포 4세 에 대해 한시적으로 체류를 허가하는 임시조치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80주년인데 소감? “ 37년 실겨와서 고생한 것 생각하면, 내가 이런 집에서 살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지금은 연금도 받고 내 고생없다.  내 혼자 집에서 있어도 맏딸이 조석을 챙겨준다.  밤에 돌아오면 혼자 있으니까 외롭다. “  현재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에 대한 어느정도 정치적 발언으로 해석된다.     우리 고려민족은 어떤 민족인가?
   “우리 민족은 어디메 가던지 일 잘하다나니까  무슨일을 하던지 조선민족들이 어디메 가던지 대접을 받는다ㅏ.  까라탈 구역도  우리 조선민족이 안 들어왔다면 이렇게 벼밭이 되지 못하고 갈밭이었을 거다. 조선 민족이 일을 잘 하니까 한국이 잘 살지 않나 “                               강게오르기
질 : 전세계적으로 고려인의 153년의 역사 이런 역사가 있느냐? 
” 단 한번에 18만명이  가장 멀리 이렇게 많은 사람을 이주 시킨 것은 유례가 없다.”
” 단 한명도 남기지 않고 이주시킨 것은 유대인의 이주와 비교되지 않는다”
질 : 이주해서도 현지에 잘 살았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답 : 2가지 팩트가 있다.   왜 카자흐스탄에 해당되는 말이다. 빨리 적응하고  성공한 사람을 많이 배출했다.   카자흐스탄에는 사범대학, 인텔리들이 이주했다.  첫째 카자흐 조선민족이 알타이 민족이기 때문에 통합되기 쉬웠다.  130여 민족이 있지만 카자흐와 조선민족이 가장 잘 통합되고 있다  둘째, 돌아갈 조국은 분단되어 있고,여기를 제2의 조국으로 여기고 열심히 살았다.   질 : 요것만큼은 알아야 한다.
답 : 한국인들은 고려사람에 대해 알아야 한다.   넘버 1  은 우리는 한민족이다고 봐주면 좋겠다.  2번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를 떠나 연해주로 온 이주한 원인들 즉  일제의 침략을 아면 좋겠습니다.   3번  뉴 제너레이션은  한국을 봤고  한국을 가봤고 배우고 싶어한다는 것을  꼭 알아주면 좋겠다.  4번 우리는 삼성 현대 대우를 사고 자랑스러워하지만 통일 되어지면 좋겠다.
질 : 한국에 바라는 것이 있으면?
답 : 통일    남북은 아빠와 엄마와 같다.  우리는 이들의 자식이다  이혼한 부모의 자식에게 아빠가 좋냐  엄마가 좋냐를 물어보는 것과 같다.   또 조국이 안정되는 것을 바란다.
질 : 앞으로 고려인의 역사는 어떻게 전망하는가?
답 : 뿌리를 보존해 나갈 수 있다.  역사적 조국과 단절되지 않는다면 유형, 무형 문화유산을 계승할 것이다.    남북이 분단이 장기화 되면 서로 다른 민족으로 변해갈 거다. 뿌리를 보존해야 한다.   남한은 자흐스탄의  빠른 성장만을 보지 말고 코이카를 다시 파견해달라고 요구하고 싶다.  코이카가 너무 인상적인 활동을 펼쳤다.
질 : 유전에는 왜 고려인이 붙었을까?
답 : 오가이    텡기스 유전은 오가이스끼 유전이다.  오가이가 발견했다.

질 :      
우리는 원동에 살다가 카자흐스탄 실려왔소
첨에는 고생 하면서 구차하게 살았소
고생하는데 카자흐사람들은 우리를 도와주고
집에 모아 음식을 공원해여
올해 70년 지나간 카자흐스탄
고레 사람들 위해서 잘 살게 되었소
아들 손자 많이 있어 같이 살면서
고향 한번만 가봤으면 얼마나 좋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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