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기획특집[발굴] 중앙아시아에 뿌려진 항일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서

[발굴] 중앙아시아에 뿌려진 항일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서

3.1운동 100주년이 다가오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무명 항일독립투사들이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 중에 ‘홍범도 장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과정의 하나인 것 같다.  무척 반가운 현상이다.  특히, 올해는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보니까 더욱 그러하다.

해서 본지에서는 특별기획 ‘중앙아시아에 뿌려진 항일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서’ 마련하여,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75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레닌으로부터 선물 받은 권총의 행방 취재팀이 기대했던 것들에 대해 만족할 만한 취재를 해내지는 못했지만 , 뜻밖에 스탈린과  트루먼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크림반도에서 회담을 했던 역사적 현장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편집자 주)

고려인의 도시, 홍범도의 도시, 크즐오르다

<크즐오르다을 가로 지르는 시르다리아 강에 석양이 지고 있다>

  “홍범도 장군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어머니로부터 홍장군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머니는 가끔씩 맛있는 음식을 만들 때면 이웃에 살고 계셨던 홍장군을 챙기셨죠”

유창한 우리말로 홍범도 장군에 대해 얘기를 해주는 고려극장의 원로 배우 김조야선생의 이 말은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홍범도 장군의 흔적을 찾아나선 길이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너무나 험난했기 때문이었다.   75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취재팀은 당시 홍범도장군의 이웃에 살았던 분들로부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간 홍범도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 싶어 크즐오르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홍범도 장군이 마지막까지 사셨던 도시, 크즐오르다에는 무엇보다도 홍범도 장군이 살던 집과 그가 안장되어 있는 묘역이 있고  ‘홍범도 거리’가 있다. 홍장군이 근무했던 고려극장과 정미소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연해주에 있던 원동사범학교가 이전해 왔다. 이 학교는 지금의 크즐오르다국립대학으로 발전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크즐오르다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강수량 부족으로 바짝 말라버린 초원(스텝)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시르다리아강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내린 물줄기에서 발원한 시르다리아 강은 카자흐스탄 서부의 대 평원을 적시고 아랄해로 흘러 들어간다.  저 강의 존재로 인해 고려인들이 연해주로부터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르다리아 강물은 그 주변지역민의 젖줄이었다.  고려인들은 이주 후 관개수로를 만들어 광활한 스텝을 논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시르다리아 강줄기를  따라 고려인 꼴호즈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1937년 강제이주 후  ‘제3인터내셔널’, ‘아방가르드’ 등 많은 고려인 꼴호즈들이 건설되어 당시 구소련 당국의 중앙아시아 지역 쌀 증산계획에 충실하게 화답하였다. 저 곳에서는 지금도 쌀농사를 짓고 있다.

크즐오르다 공항에 내린 기자는 제일 먼저 홍범도 장군이 안장되어 있는 크즐오르다 시립공원묘지로 향했다.   8월의 따가운 햇살에도 불구하고 찾는 이가 없어서 왠지 썰렁해 보였다. 통일문이라고 씌여진 묘역 출입문을 지나 정면에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서 있었다. 미리 준비한 꽃을 헌화한 후 묵념으로 참배를 마무리 지었다.

<크즐오르다 역  뒷편에 있는 홍범도 거리를 알리는 교통표지판>

<홍범도 거리 초입에 있는 건물 벽에 홍범도 장군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부조판이 붙어 있다.   “이 거리는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항일 빨치산 대장이었다가 1937년 크즐오르다로 이주해 온 홍범도 장군의 이름을 딴 거리입니다” 라고 적혀 있다.>

고송무선생은 생전에 고려극장 배우였던 안 미하일로부터 “홍범도는 자기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겸손한 분이었소.”라는 증언을 들었다고 말했었다. 안 미하일은 “ 고려극장은 1941년에 태장춘 선생이 직접 쓰고 연출한 연극 ‘홍범도’를 무대에 올렸고 이를 직접 본 그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75세의 나이로 크즐오르다  자신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스스로 분연히 떨쳐 일어나 평생을 조국과 동포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신 흔치 않은 분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소박하고 성실하며 청렴하고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고려인 동포들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서거 후 몇 년 만에 동포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묘비를 세웠다”는 계학림선생(93)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계학림 선생은 항일독립투사였던 아버지 계봉우 선생의 아들로서  93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정정하셨다. 한글학자이자 역사가였던  계봉우 선생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당한 후에도 ‘이두집해(吏讀集解)’, ‘조선문법’, ‘조선말의 되어진 법’ 등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홍장군과 함께 크즐오르다 시립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홍범도장군은 당시, 모든 고려사람들에게 항일독립투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을 뿐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조야선생의 회고와 같이 홍범도는 평소 자신의 철학처럼 소탈하고 병사들과 똑같이 입고 똑같이 자는 것과 같이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홍반장이었다.

  계학림 선생은 “홍범도 장군의 활약상을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배울 기회가 없었던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홍장군의 상세한 활동사항을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아쉽다. ” 면서  “그러나 우리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에도 항일사적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긍심을 가지고 있소”라고 말했다.

유배봉환을 놓고 벌인 남북한의 외교전

  “소련과 한국이 국교를 수립하고 난 뒤…..   홍범도 장군을 한국으로 봉안하기 위한 사업이 시작되었지”

  “그때가 1995년으로 기억되는데, 한국정부는 홍범도 장군을 서울로 봉안해 갈려고 무척 애를 썼소.”

  계학림 선생은 한국의 대사관이 알마타에 문을 열었다는 소식과 함께 한국정부가 홍범도 장군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크즐오르다 고려인 사회는 무척 들뜬 분위기였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도 잠시, 고려인 동포사회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세계에서도 가장 격렬한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던 모국의 아픈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북측이 홍장군의 유해 봉환사업을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측은 ‘홍범도 장군은 평안도 태생이기 때문에 모국으로의 유해봉환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서울이 아니라 평양으로 가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서울로의 유해봉환을 반대했다고 한다. 

  50주년 광복절에 맞춰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며 의욕적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사업을 펼치던 당시 문민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 작업이 난관에 부딪히자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남과 북을 동시에 모국으로 생각하던 고려인들은 남측의 노력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북측의 논리 또한 수긍함으로써 홍장군의 유해를  남도 북도 아닌 카자흐스탄에 계속 두는 방안을 지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계학림선생은 “이렇게 해서 홍범도 장군 묘역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고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소”라고 말해주었다.

<홍범도 장군 묘역의 대문 격인 ‘통일문’의 왼쪽 부분의 기와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다>

<묘역의 입구인 통일문에서 바라본 홍범도 장군 흉상>

  그러나 기자가 방문한 현장의 모습은 남북의 뜨거웠던 외교전의 기억이 무색할 정도로 쓸쓸했다. 묘역의 얼굴 격인 대문(통일문)의 기와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었고 묘역내의 무성한 잡초는 ‘차라리 묘역 전체를 보도블럭으로 까는 게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또한 검은 대리석의 홍장군 묘역의 좌대는 거칠게 공사를 마친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국내에서 점점 높아지고 홍범도 장군에 대한 관심과는 반비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기자가 이후 공관에 확인한 결과 국가보훈처에서 묘역관리비로 매년 일정 금액을 고려인협회에 예산지원을 한다고 한다.)

  매년 전세계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이탈리아 로마를 일컬으며, 조상을 잘 둔 덕분에 먹고 사는 도시라고 농담처럼 얘기를 하곤 한다. 이 말은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로마의 건축물과 역사적 유적 덕분에 후세들은 편안하게(?) 관광수입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문득, 홍범도 장군의 묘역에서 복 받은 로마인이 떠오른 이유는 뭘까?

  항일독립운동의 험난한 역사의 현장을 누볐던 백전노장이자 항일 영웅, 홍범도 장군을 위시하여 한글학자였던 계봉우 선생의 묘역, 옛 고려극장, 옛 원동사범대학 등 독립운동유적지들과 스토리들이 크즐오르다에는 마치 실에 꿰매지 않은 구슬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포사회가 이것들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깨닫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존, 관리하고 또 스토리텔링 작업을 한다면 동포 차세대들도 기꺼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측면이 아니더라도 당위론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의 유적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은 후세대들의 당연한 의무이지만…

  더불어, 구소련 지역에서 매년 펼쳐지는 ‘전승기념일’ 행사때 남녀노소할 것 없이 무명용사비에 헌화하는 모습이나 평상시 신혼부부들이 결혼식 후 웨딩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역시 꽃을 바치는 그런 장면이 홍범도장군의 묘역에서도 일어나기를 상상해 본다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이 되는 올해, 홍 장군의 묘역 관리상태를 통해서 지금까지 책이나 언론에 소개되어 온 고려인과는 실존 고려인과는 일정한 간극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레닌기치’남은 홍장군의 흔적들

<레닌기치를 꺼내서 보여주는 남경자 한글판주필>

<소설 ‘홍범도’가 연재된 레닌기치의 지면>

<연도별로 쌓여있는 레닌기치>

현지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울리아나(42) 교수는  “ 할아버지는 홍장군이 레닌으로부터 선물 받은 권총을 평소에 매우 자랑스러워 하셨다는 말을 해주셨다. ” 고 말했다.

  울리아나교수의 조부,  주승연 할아버지는 홍범도장군과 이웃으로 살면서 무척 가까웠다고 한다.  “ 할아버지도  그 권총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르고 계셨다”면서 그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레닌기치’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말해주었다. 

  다시 알마티로 향했다.  바로 ‘레닌기치’자료를 뒤졌다.  연해주에서 삼일절 4주년을 기념하여 ‘3월1일’이라는 제호로 창간되어, ‘선봉’이라는 이름으로 한차례 바뀐 뒤, 고려인의 강제이주와 함께 중앙아시아로 옮겨온 레닌기치는 이듬해, 1938년 부터 크즐오르다에서 발행되었다.

  당시,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역할을 했던 연해주에는 항일독립의식과 동포애를 고취시키던 한글동포신문들이 발행되고 있었다.  1908년, 창간된 해조신문은 최봉준이 재원을 마련하고 황성신문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선생이 참여했다. 주필 정순만은 창간호 사설에서 ‘국권 회복과 동포 구제’를 사시로 내세웠다. 그해 11월 독립운동가 최재형선생 등이 주도해 만든 대동공보에는 안중근의사가 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조선을 일제식민지로 강탈했던 이토오히로부미를 하얼빈역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가 저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대동공보의 기자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레닌기치는 홍 장군의 탄신 100주년인 1968년 8월27일자 특집기사에서  “자유시 사건이 발생한 1921년 6월28일 이후 홍범도 장군은 휘하 병력 약 300명을 이끌고 이르쿠츠크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됐다”고 전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선열들은 현실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주는 유일한 국가였던 러시아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자 레닌의 소수민족의 독립과 민족자결을 지지하는 노선에 큰 공감을 가졌다.

  반면, 러시아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제는 연해주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백군을 지원하면서 항일 독립군을 소탕하고자 했다. 이때 군대를 출병시킨 미,영, 일, 프랑스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7만명)을 파병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이 시기는 외국의 간섭군과 백군 연합에 맞서 싸워야 했던  ‘붉은 군대’입장에서 만주와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하는 항일독립군들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때였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가 백군을 지지하면서 연해주에 출병하여 신한촌을 불지르고 여자들과 어린이들까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일제와 러시아백군(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항해서 적군(볼세비키혁명군)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홍장군 뿐아니라 대부분의 항일독립군들도 적군의 편에서 일제와 백군에 맞서 싸우게 된다

  한편, 만주에서 활동하던 무장독립군들은 점점 죄어져 오던 일제의 압박을 피해 좀 더 나은 활동공간이었던 연해주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고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어야 할 현실적 요구도 있었다. 붉은 군대는 홍범도 장군의 휘하부대외에도 북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에게 붉은 군대와 연합하여 일제와 백군을 몰아내고 조선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연해주에 먼저 자리를 잡았던 고려인 독립군 부대들이 만주에서 넘어온 항일독립군 부대들과 통합해서 만들어지게 될 군 지휘권을 놓고 양대 독립운동세력간에 주도권다툼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있는 ‘자유시 사변’이다.

  이때 홍장군은 평소의 성품 그대로 주도권 다툼보다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에 따랐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레닌기치에는 홍 장군이 1921년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동방근로자대회’에 초청받아 레닌으로부터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후 얼마되지 않아 25군단 조선인 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고 밝혔다.

  이후 홍 장군은 연해주와 시베리아에서 옛 동지들을 모아서 집단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홍장군은 1937년 동포들과 함께 끄즐오르다로 이주해와서 고려극장의 경비로 일했고 조국해방을 앞둔 1943년 눈을 감기 직전엔 정미공장 근로자로 일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레닌기치의 1943년 10월27일자에는 “홍범도 동무가 여러 달 동안 병상에 계시다가 본월 25일 하오 8시에 별세하였기에 그의 친우들에게 부고함. 장례식은 1943년 10월27일 하오 4시에 거행함. 부고자: 크질 오르다 정미공장 일꾼 일동”이라는 부고가 실려 있었다.

스탈린과 트루먼의 회담에서 한국을 대표한 고려인 – 안철

< 안 스타니슬라브 독립유공자후손회장이 보여준 안철의 사진>

 “스탈린과 트루먼이 크림에서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할 때, 그 역사적 현장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알마티에서 만난 안 스타니슬라브 독립유공자후손회장은 매우 놀라운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꺼내 놓았다

 “안 철이라는 분인데, 바로 나의 할아버지입니다”면서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안 철의 사진을 꺼내놓았다.  군복을 입은 모습, 미국의 군사사절단과 찍은 사진, 넥타이를 메고 중절모를 쓴 모습, 가족사진, 회의 모습, 짚차앞에서 총을 든 군인들과 함께 찍은 모습 등등 안 회장이 가져온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70~80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현장에 함께 있는 듯 했다.

<안철의 유품속에 있었다는 김일성의 대중 연설 사진. 안 스타니슬라브 독립유공자후손회장은 안철이 김일성을 스탈린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이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은 김일성 주석의 젊은 시절 사진이었다. 어디선가 대중연설을 하는 모습을 찍은 흑백사진인데, 어떤 경로를 통해 이 사진을 안철이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철이 그 현장에 있었고, 가지고 있던 카메라로 그 장면을 찍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안철은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을 도운 고려인들 중의 한명이었기 때문이 이러한 유추가 가능했다.

 “할아버지는 러, 중, 일, 영어까지 능수능란한 외국어 실력 덕분에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것 같다”고 안회장은 설명했다.

그러나 안철은 통역가가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무대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2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극동공화국 군인으로서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출병한 7만명의 일본군과의 전투과정에서 전사하였다.

약 2년여 존립하다가 후에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 극동 공화국은 당시, 항일무쟁투쟁의 길에 나섰던 많은 연해주와 만주지역의 독립군들에게는 든든한 지지세력이었다. 일제가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1922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약 5년동안 러시아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저질은 수많은 만행은 연해주 동포사회를 급격히 적군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들을 소탕할려는 속셈이 컸던 일제는 우리동포들의 집단거주지인  신한촌을 습격하여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연해주 곳곳에서 살인과 방화를 자행한 일제는 당시 고려인 동포 지도자인 최재형과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서 많은 수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 현재의 자바이칼 지방, 아무르주, 하바롭스크 지방, 그리고 연해주 지방을 포함한  극동공화국이었다. 안철은 바로 이 극동광화국의 군인이 되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항일독립군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독립군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안철이 독립군으로서 활동을 본격화 한 것은 블라고웨쉔스크 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아르쫌, 우스리스크 등지에서 살다가 만주로 보내지면서 부터였다.  당시 그곳에는 가장 크고 강한 일본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에는 작은 항일독립군 부대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안철은 일본군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독립군과, 중국, 소련군의 병력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었다. 안회장은 “고려인동포들이 강제이주를 당했던1937년, 할아버지도  카잘린스크로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면서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독립군이 아닌 역사 선생님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강제이주가 일어난 지 불과 몇 년 뒤인 1941년  전세계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랑속에 빠져들어가자, 소련 당국은 중, 일, 러, 영어까지 능통한 안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대 일본전에서 미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해 영어에 능통했던 안철은 많은 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스탈린과 트루먼의 회담이 진행되었던 역사적 현장에도 고려인 안철이 참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그 회담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는데, 미국의 군사대표단으로부터 총을 선물 받았고 그 총으로 사냥을  다녔다는 얘기를 어린 나에게 자주 들려주었다”면서 “어느날엔가는 토끼를 한꺼번에 12마리나 잡았다는 얘기를 해주셨고, 실제로 집에는 칼과 검, 권총과 장총까지 많은 선물용 무기가 있었다” 안회장은 회고했다.

쿠릴열도에서 마지막 군사 작전을 마친 안철은 가족과 함께 고비사막을 통해 한달 반에 걸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북한 정권수립을 돕기 위해서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안철은 아들을 모스크바에 있는 군사학교에 보낸 후 정작 자신의 행방은 더 이상 가족들에게 전하지 못했다” 면서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할아버지 안철에 대한 이야기의 전부입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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