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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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뉴스 게시판 지식공유 홍범도 장군은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전형(典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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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동 순(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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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그러니까 1983년부터 나는 우리 민족의 영웅 홍범도장군을 테마로 서사시 작품 쓰기에 대한 결심을 하고 자료수집에 착수하였다. 이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까지 엄청난 난관이 많았으나 오로지 나의 조부 일괴공(一槐公) 이명균(李明均, 1863~1923) 선생의 유촉(遺囑)과 격려에 힘입은 바가 크다. 선조고(先祖考)께서는 1920년대 후반 경상도 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사건이었던 대한의용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셨다. 그 과정에서 미결수로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혼수상태로 풀려났지만 곧 돌아가셨다. 조부님 돌아가시고 17년 뒤에 내가 태어났으므로 나는 조부님을 뵌 적이 없다.

    필자의 조부이신 독립투사 이명균 선생 @이동순
    하지만 놀랍게도 조부님께서는 몽매간에 모습을 나타내셔서 자손으로서의 할 일을 항시 깨우쳐 주셨다. 나는 바람결에 조부님의 말씀을 들었고,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조부님의 음성을 들었다. 문학을 창작하고 전공하는 후손에게 보내주신 조부님의 부탁은 오직 한 가지.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테마로 하여 한 편의 서사시를 장엄하게 엮어가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민족사의 많은 별 떨기들, 그 중에서도 포수 출신의 전형적 민중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을 내 작품의 중심인물로 설정하게 되었다. 이후로 어금니를 굳게 깨물고 비호같이 도서관으로 돌진하여 자료를 모으고, 창작의 구상과 상상력을 키우며 집필에 달려들 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홍 장군의 생애와 행적에 관해서는 뜻밖에도 판에 박힌 듯 몇 가지의 사실 외엔 새로운 내용을 찾아내기 어려웠다.

    오직 ‘홍범도’라는 한 가지 테마로 자나 깨나 몰두하며 국내외를 떠돌아 세월을 보내기 어언 20여 년! 드디어 나는 2003년에 이르러 홍 장군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서사시 한 편을 완성하였다. 그 동안 민족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홍 장군의 유업을 계승하는 심정으로 불같은 열정과 범 같은 용맹정진으로 작품을 썼고, 다듬어 깁는 작업을 보태고 더하여 마침내 한 질(秩)의 전집으로 발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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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출판되고 조촐한 자축연을 가졌을 때 홍범도장군의 행적에 대한 전문적 연구를 해온 송우혜 선생과 비평가 염무웅 선생, 민족서사시 ‘백두산’을 완간한 고은 시인이 직접 참석하여 따뜻한 격려말씀을 해주신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영광이자 추억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바처럼 홍범도장군의 위대성은 우선 일본군 부대를 괴멸시켰던 그 빛나는 전공(戰功)에서 시작되겠지만 다시금 장군의 생애를 찬찬히 헤아려보면 홍 장군의 서민적 성품과 관련된 일화들에서 주로 발견된다 하겠다.

    홍범도 장군
    장군은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이후로 가정적 파란을 겪으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의연함을 보였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사회의 주변이나 군대 조직의 내부에서 겪게 되는 것은 모순과 부조리였다. 홍범도를 성장시켰던 원동력은 바로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조국의 운명은 점점 고난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고, 급기야 친일파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민족의 주적(主敵)이라는 판단에 도달하게 되었다.

    후치령전투를 비롯하여 홍범도장군이 관북의 산악지역에서 펼쳤던 일련의 눈부신 게릴라 활동은 오로지 일본이라는 민족의 적을 파괴하고 처단하기 위한 한 가지 목적으로 집중되었다. 당시의 일본군 정보자료를 살펴보면 홍 장군에 대한 두려움을 일제가 얼마나 크게 가졌던가를 금방 알게 된다. 다음으로 홍범도장군의 위대성은 온 가족(아내와 두 아들)을 조국해방을 위한 독립전쟁에 헌납하고서도 그것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결코 개인주의적인 혼란이나 갈등, 혹은 좌절에 휩싸이지 않고 더욱더 당당하게 모순과 부조리의 중심을 향하여 돌진하였다는 사실이다. 연해주 지역의 동포사회를 찾아가서 군자금 모연(募捐)을 위한 노력에 힘을 쏟을 때도 홍범도장군의 진솔한 성품과 불같은 열정에 감동하여 솔선 협력하는 독지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급진주의자로 비친 그릇된 시각 때문에 각종 모함과 시기로 고통을 겪는 일도 잦았다. 독립운동이란 명분을 내세우며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치부와 영달을 위해 더욱 힘을 쏟는 사이비 독립운동가들의 추악한 꼴을 홍 장군의 직접 보고 겪으면서 스스로의 선명성 강화를 위해 교훈의 자료로 삼았다. 그들의 이중적 태도와 사기성을 크게 나무라고 꾸짖으며 진실한 자세로 마음을 돌이켜 보기 위해 많은 정성을 쏟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중간론자,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던 부류들과도 협력적 관계를 가지며 인내심을 갖고서 기다려보기도 하였다.

    홍범도장군은 연해주에서 거주하던 시절, 군자금 모집을 위해 노동판에 직접 두 팔 걷어 부치고 뛰어들어 날품 파는 노동자 생활을 자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업생산물의 수확을 위한 경작활동에도 종사하면서 그 수익금으로 총기와 탄약을 구입하는 활동을 줄기차게 펼치었다. 이런 활동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홍 장군 스스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극빈 속에서 머슴 생활까지 해보았고,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사랑하며, 연민의 정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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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전투의 작전 개념도
    홍 장군의 위대성은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도 우뚝한 표상으로 부각된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자랑스러운 무장독립투쟁이었다. 그런데 남북이 분단된 이후 홍 장군의 위상이 남한 학계에서는 전혀 인정이 되지 않은 채 김좌진 장군의 활동만 높이 평가되는 현상이 생겨났다. 이는 모두 홍범도장군에 대한 오해와 사실의 고의적 왜곡에서 비롯된 어이없는 일들이다. 생애를 다시금 찬찬히 더듬어보면 곧 알 수 있는 것처럼 홍범도장군은 결코 도식적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단지 당시에 강력했던 러시아의 힘이라도 잠시 빌려서 일본제국주의자를 물리쳐 보겠다는 순정한 판단을 왜곡하고 매도하면서 홍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친 과거의 일부 극단적 사례들이 있었던 것이다.

    청산리전투의 격전 중에도 늘 백마를 타고 자신의 존재를 뽐내며 과시했던 어느 독립군 지도자에 비하여 홍범도장군의 외모는 항상 낡고 추레한 군복으로 부하 사병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군대조직의 상하관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더욱 엄정하고 철저한 군율이 작용하여 엄부자친(嚴父慈親)의 유가적 질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부하들로부터는 진정한 존경심이 샘솟듯 우러나오고, 상관들로부터는 자애로운 사랑과 배려가 항시 뒤따르니 통솔의 어떠한 어려움도 홍범도장군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부대조직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2000년 겨울, 미국의 시카고 미시건 호수의 맹렬한 눈보라를 바라보며 작품의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의 놀라운 추억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밤을 새워 내가 쓴 작품의 완성본 초고를 읽고 또 읽어 고치고 다듬기를 거듭하느라 눈은 침침하고 온몸은 피로에 나른하였다. 그때 엄청난 눈발 속으로 누군가가 말을 타고 창밖으로 다가왔다. 언뜻 올려다보니 홍범도장군이었다. 한순간 눈이 부셔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신께서는 쏟아지는 함박눈을 그대로 맞으며 말 등에 앉아서 나를 한참동안 다정한 눈길로 굽어보시더니 다시 말머리를 돌려 눈발 속으로 등을 보이고 터벅터벅 떠나셨다. 오랜 시간 작품쓰기의 피로가 누적되어 비몽사몽 속에서 겪은 환시(幻視)였지만 참으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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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도장군의 존재성은 이제 시를 쓰는 나에게 하나의 운명이 된 듯하다. 장편대하서사시 ‘홍범도’(전5부작10권)은 1983년에 시작하여 무려 20년 만에 완성하였다.

    필자가 완성한 민족서사시-홍범도@이동순
    홍범도장군의 생애야말로 진정한 디아스포라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군의 생애를 음미해보노라면 굴곡 많던 시기 평안도에서 태어나 황해도, 묘향산, 금강산, 함경도 산악지대 등을 헤매 다니며 살았다. 늘 쫓기는 삶이었고, 한날한시도 평온의 날이 없었다. 신분은 머슴, 구한국 진위대의 나팔수, 제지공장 노동자, 승려, 산포수 따위의 밑바닥 삶을 전전하였다. 이처럼 신산한 삶을 겪었으므로 현실의 고통 및 그 원인과 배경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의 근원이 모두 제국주의 침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이 각성을 기초로 해서 일제 침략자에 대한 거부와 저항을 자기 삶의 확고한 신념으로 굳혀갈 수 있었다. 함경도 일대에서의 신출귀몰했던 전투와 빛나는 승리는 오로지 홍범도 의병대만 누릴 수 있었던 영광이다. 이 시기 함경도 지역에서 홍범도장군의 이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설이었다. 하지만 제국주의 세력이 나날이 확장되면서 시운이 불리해지자 홍범도의병대는 두만강을 넘어 만주 땅으로 진출한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보다 확장되고 결집된 역량을 비축하려는 하나의 선택적 디아스포라였다.

    만주로 이동한 뒤에는 봉오동 지역에 머물면서 이제는 의병대가 아니라 당당한 독립군 조직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다. 특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치르고 난 뒤부터는 정규 독립군부대의 면모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참으로 광채가 나는 이 두 전투는 만주지역의 여러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협력적 조직에 의한 성과였지만 그 실질적 주역은 단연코 홍범도장군이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막대한 패배를 겪은 일본은 만주지역 대한독립군의 완전소탕을 위한 대대적 군사작전을 준비한다. 사단급 병력이 이에 총동원되었다.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 패잔병
    만주의 독립군부대들은 밀산(密山)에서 약 3.500명의 거대조직으로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이만을 거쳐 스보보드니(자유시) 지역으로 집결한다. 한 겨울에 수천 킬로에 이르는 먼 거리를 도보로 이동했던 당시의 고통스런 행군을 상상해보게 된다.

    작은 변경도시 스보보드니에 집결한 대한독립군단은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뉜다. 러시아의 지시와 명령을 수용하는 세력과 고분고분 수용하지 않는 저항세력이 그것이다. 여기에다 일본이 러시아에게 연속해서 대한독립군단의 해체와 축출을 요구해오니 러시아도 난감해졌다. 마침내 대한독립군단의 무장해제를 명령했고, 두 세력들 간의 대립과 반목이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6.25전쟁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는 슬픈 사건이 1921년 러시아의 스보보드니에서 발생하였다. 이것이 자유시참변(흑하사변)이다. 집도 절도 없이 남의 나라 땅에 디아스포라의 신세로 떠돌면서 뜻밖에도 이념대립과 갈등으로 서로 살상하는 전쟁이 벌어졌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는 참상이었던가.

    스보보드니 동족상쟁_흑하사변_의 현장약도
    당시 홍범도장군의 선택은 러시아의 명령을 일단 수용하는 쪽이었다. 그것은 우선 강대한 러시아의 힘을 빌려서 현재체제를 유지하며 미래를 도모하자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동족상쟁의 결과로 자유시의 대한독립군단은 둘로 갈라졌다. 반러시아 세력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만주로 되돌아갔고, 온갖 수모와 굴종과 비굴한 투항을 겪고 말았다. 러시아에 남아있던 세력들은 소련군대에 편입이 되거나 연해주 지역의 농민으로 살아갔다. 이로부터 홍범도장군은 국내에서 완전히 잊어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후 확인된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 여러 지역에서 십 수 년 동안 집단농장 콜호스에서 농사 짓기, 동포들의 보다 안정된 삶을 위한 농협운동의 실천 등 고려인 교민사회 발전을 위해 적극 헌신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야만적 독재자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이주를 맞게 된 것이다.

    고려인 강제이주경로
    연해주의 한인들을 스탈린 정부는 ‘일본 정탐의 원천’으로 여기고 한인들을 연해주 일대에서 중앙아시아 사막지역으로 완전 청소해서 폐기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신속히 실행에 옮겼다. 이것이 고려인 강제이주의 발단이다. 작가 조명희를 비롯한 다수의 고려인 지식인들이 이를 비판하고 반대하였으나 모조리 처형당했다. 위대한 생애를 살아온 대한독립군 총사령 홍범도장군도 이렇게 해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행렬에 섞여 떠나왔고,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 경비원, 크질오르다 정미소 노동자 신세로 전락해서 쓸쓸하고 고단하게 살다가 삶을 마감하신 것이다. 바람찬 중앙아시아 벌판에 내팽개쳐서 혼자 적막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홍범도장군의 생애를 생각하면 그 처연함에 가슴이 아린다. 홍범도장군이야말로 디아스포라의 전형적 삶을 살아가신 분이다.

    홍범도 장군의 부고 사진
    만약 홍범도장군의 생애 전체에서 가장 분명하고 특별한 한 가지를 말해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분의 소박하고도 민중적이었던 삶과 항시 자신을 낮추던 자세를 가장 먼저 들고 싶다. 수준 높은 무장투쟁 지도자로서 최고의 직책을 맡았을 때에도 하급병사의 처지와 속마음을 늘 자상하게 헤아렸던 분이 홍범도장군이다. 이는 모든 조직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진정 깨달음을 얻고 지침을 삼을 만한 교훈이 아닌가 한다. 이런 아픔의 역사를 함께 했기에 중앙아시아 전역의 고려인들과 그들의 삶에서 홍범도장군은 지금도 여전히 상징적 존재로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크질오르다의 홍범도 장군 묘소를 서울로 옮겨오려는 움직임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홍범도장군의 묘소는 카자흐스탄의 현재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 만약 이를 한국으로 옮겨오게 된다면 중앙아시아 전체 고려인들이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하는 상징적 중추를 함부로 뽑아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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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질오르다의 홍범도 장군 무덤 위에 세워진 흉상
    지난 2018년 10월은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시간이었다. 탄생 150주기, 서거 75주기를 맞이해서 서울의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고려인 공동묘지에 묻혀계신 홍범도장군의 묘소와 동상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꽃다발과 함께 서사시 ‘홍범도’ 전집 10권을 바치었다. 장군의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절 드리는데 나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개는 끓어오르고 땅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홍범도장군 묘소에 필자의서사시_홍범도_10권을 눈물로 헌정하였다
    한국의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에서 홍범도장군 탄생 1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장시 ‘신 유고문(新 諭告文)’을 낭송하였고,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고려극장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하여 장시 ‘아, 홍범도’를 낭송하였다. 고려극장에서의 시낭송은 저자의 낭송 직후 고려극장 배우 김조야 씨가 러시아말로 번역된 시작품을 격정적으로 낭송하여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감격에 사무쳐 눈물을 흘리는 고려인 동포들이 여럿 있었다. 크질오르다와 알마티에서의 고려인협회 회원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가슴 뭉클한 감동의 시간이었다.

    홍범도장군순국75주기에카자흐스탄알마티고려극장에서열린추모식

    2018년10월카자흐스탄알마티고려극장에서열린홍범도장군식장에서필자가시작품을낭송하였다.
    특히 크질오르다에서 만났던 계봉우(桂奉瑀, 1880~1959) 선생의 아드님 계학림(桂學林) 선생이 들려준 여러 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감동적 서사였다. 90대 중반의 노옹(老翁)께서 들려주신 고려인 강제이주의 참담하고도 비통했던 역사, 그로부터 고통과 비극을 뛰어넘으려 애써온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악전고투의 삶과 경과는 놀라움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80대 후반의 김 아파나시 할아버지는 자신의 소년시절, 학교의 봄 운동회에서 달리기에 우승을 하고 홍범도 장군으로부터 직접 학용품을 상으로 받았던 기억, 장군께서 품에 꼭 안아주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격려를 아직도 가슴 속에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저 마주치는 고려인 동포노인들의 슬픔을 머금은 눈빛만으로도 아픈 사연과 살아온 내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강제이주열차의 기적소리와 달리던 열차바퀴 소리를 그들은 지금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려극장, 고려일보, 고려인들의 삶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여러 현장들을 답사하면서 내 가슴 속에는 이미 눈물처럼 시가 흥건히 고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한 편 두 편 간추리고 다듬어서 완성작으로 만들었다. 카자흐스탄에 머무는 동안 이미 십여 편의 작품을 썼고, 돌아와서 마치 신들린 듯 고려인 강제이주에 관한 자료를 찾아서 헤매 다녔다.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둘씩 구체적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작품 파일은 차츰 그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집 ‘강제이주열차’는 이렇게 해서 구체적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연작시 성격의 이 시집의 후기에서 나는 이렇게 소감을 고백하였다.

    필자가 발간한시집_강제이주열차
    가슴에서 불덩이처럼 뜨거운 무엇이 울컥울컥 쏟아져 들어오는 놀라운 충격을 자주 겪었다. 1937년 그 아비규환의 강제이주열차를 차고 고려인들과 더불어 장장 42일 동안 2만 킬로미터의 먼 길을 시름없이 달려가는 회상의 동일성(identity)를 체감했다. 시베리아 철도의 칼바람이 갈라진 열차 널판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데, 저쪽 구석에서는 앓던 노약자가 몸을 비틀며 죽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강제이주열차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참혹한 광경을 나는 한 사람의 시인, 즉 견자(見者)로서 낱낱이 목격하고 현장에 동참하였다.

    -시집 ‘강제이주열차’ 199~200쪽, ‘시인의 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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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서사시 ‘홍범도'(국학자료원, 2003)와 시집 ‘강제이주열차'(창작과비평사, 2019)는 제각기 다른 작품이지만 그 시작에서 완성까지 줄기차게 내뿜고 있는 내적 지향과 시정신은 이렇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홍범도장군으로 상징된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슬픈 경과와 피눈물의 역사가 이 두 시집을 통해 실증적 자료와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구(再構)된 것이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강제이주열차> 등 18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매몰시인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시인을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60권 발간. 신동엽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충북대학교,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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