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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1

젤톡산과 나자르바예프의 등장

김상욱 

본지주필/고려문화원장

‘젤톡산’

<알마티에 있는 젤톡산 기념비>

     이번호 부터는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이라는 제목의 초대 대통령의 전기를 토대로 당시의 급박하게 돌아갔던 국제정세와 카자흐스탄의 운명을 몇 회에 걸쳐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1986년  12월,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후보로 당시 공화국 총리였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를 거부하고 대신  러시아의 고위 관리 겐나지 콜빈에게 맡겼다.  이것은 단순히 지명자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 실수가 되었다.  콜빈의 도착에 뒤이어 발생한 카자흐스탄 젊은이들의 시위가 결국 소비에트 연방을 붕괴시킨 민족문제 발생의 첫 번째 징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자르바예프는 쿠나예프 제 1서기의 퇴진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르바예프도 콜빈의 지명에는 놀랐다. 그가 임명된 이유는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이자 고르바초프의 심복이었기 때문이지만 새로운 직무를 수행하기에 그는 자질이 부족하였다.  콜빈은 카자흐스탄을 알지 못했고 이전에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는 카자흐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고, 카자흐스탄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국민들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지명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나자르바예프는 콜빈이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게오르기 라주몹스키 함께 알마티에 도착하던 1986년 12월 15일  제1 서기 지명에서 자신이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단일 의제인 ‘조직 문제’를 가지고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윈회 회의가 열렸다.  이것은 지도부의 변화를 의미하는 잘 알려진 소비에트식이 수사적 표현이었다.  

  이 회의에서 라주몹스키는 쿠나예프의 퇴진을 선언하고 공석이 된 자리에 콜빈을 단일 후보로 추천했다. 그가 추천한 후보는 아연한 침묵속에서 참석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18분 뒤 회의는 끝났다.

  나자르바예프는 그러한 결정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를 반대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중앙위원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르바예프는 모스크바에 절대 복종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나 카자흐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다.

  알마티의 대학생들이 제일 먼저  콜빈 임명에 반대했다. 많은 대학생들은  “우리는 카자흐인 지도자를 요구한다”  “독재는 물러가라”  “모든 민족은 민족 지도자를 원한다”   “우리는 레닌의 민족주의 정책을 지지한다”  “개혁한다하면서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라는 슬로건이 쓰인 깃발과 플랭카드를 들고 있었다.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처음 참가자는 300명을 넘지 않았다.   주로 대학교와 단과대학의 젊은이들이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즉시 현장으로 향했고 즉시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에 둘러싸였다.  나자르바예프는 차에서 내려 시위자들과 함께 행진하였다.   시위 참가자수는 2천여명으로 늘어났으나 분위기는 평화롭게 유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광장(현, 공화국 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부청사(현, 알마티 시청)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당 간부들 사이의 분위기는 공포에 가까웠다. 그러한 규모의 항의 시위는 실제로 소연방, 특히 카자흐스탄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콜빈을 지명하기 위해 이곳에 온 모스크바 사절단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랐다. 그들은 사태의 책임자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며 카자흐 지도부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고 카자흐 지도부도 당황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나자르바예프는 신중해 줄 것을 호소한 뒤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리들에게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라고 제안했다.

  제1서기로 임무를 시작한 첫날 콜빈은 서로 상반된 의견을 들어야만 했다. 주로 KGB와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의 모스크바 출신 참모들은 시위대를 힘으로 진압하는 권위주의적 방법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알마티 주둔군은 전투 태새를 갖추고 경찰은 광장에 저지선을 만들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경찰관들 특히 민병대원들은 시위대에 공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광장 인근에 있는 민병대원들에게 시위대 해산을 위해 곤봉으로 무장시키라는 지시가 내려갔지만 당시 이 지역 책임자 누르타이 아비카예프는  몽둥이로 시위대를 구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모스크바의 명령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가두시위가 알마티에서 12월 17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중앙아시아 관구 사령관 블라디미르 로보프 장군은 콜빈에게 군병력의 출동을 거부했다. 이 용감한 결정은 이후에 발생한 것 보다 훨씬 더 강한 유혈 충돌을 사전에 예방한 게 틀림없었다.  

  시위를 지켜보고 있던 당 고위 간부들은 불안했다. 그들은 광장 주변에 설치된 거대한 확성기를 통해 큰 음악소리를 내보내어서 연설이 들리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군중들을 자극하는 트리거가 되었다.

  성난 군중들은 연단 쪽으로 눈덩어리와 얼음조각 그리고 돌멩이를 건지기 시작했다. 돌멩이는 나자르바예프가 말하고 있던 마이크에 맞고 튕겨져 나가 그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

  콜빈과 모스크바 출신 당 간부들은 물대포를 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군중들 속에서 알코올 소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누군가가 수제 로켓을 발사했다. 이 중 하나가 콜빈 집무실의 창문에 명중했다. 모스크바에스는 이것이 로켓 공격으로 보고되었다.

  이  보고는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12월 17일 저녁   물러난 쿠나예프와 직접  통화를 하게 만들었고 정부 청사로 향하고 있는 젋은이들이 시위행진을 멈추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쿠나예프는 시위대에게 영향을 미칠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미 흩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의 사태가 보여주듯이 그들의 분노는 사글라들지 않았다.

  밤에 알마티로 특별기를 타고 크렘린 고위 관리들이 도착했다. 주둔군 사령관의 신중한 입장과는 반대로 내무부 장관 블라소프는 경찰 기동대와 내무부 특수부대를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이 부대들은 12월 17일 일 밤 스베르들롭스크,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같은 러시아 도시들에 있는 병영에서 비행기로 카자흐스탄으로 수송되었다.

  12월 18일 늦은 아침 알마티는 약 1만 5천명의 시위대로 가득 찼다. 그들은 카자흐 노래들을 부르며 사기를 북돋우었다.  노래들 중 특별한 것은 준가르족의 침입에 용감하게 저항한 유목민 무사들에 대한 17세기의 장엄한 멜로디인 옐리마이였다.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대해 경찰과 특수기동대는 ‘눈보라 작전’이라는 코드명 하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진압을 시작했다.

  이 당시 공화국 총리였던 나자르바예프는 이 비밀 작전에 대해 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는 모스크바 그룹의 손에 장악된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전날 시위자들이 콜빈을 대체하는 후보로 그이 이름을 외쳐댔기 때문이었다.

  시위대는 빠르게 흩어지게 만들었지만 2명이 죽고 200명이 중상을 입는 큰 희생을 낳았다.

 그 후 4년 동안 이것은 소연방 전역에 심각한 결과를 야기했다. 다른 민족들의 민족운동이 알마티 시위자들을 뒤따라 모스크바의 중앙집권적 통치에 대한 독자적인 저항 운동으로 변해 거리로 나왔기 때문이다.

  젤톡산 이라 불리게 된 1986년 12월 사태 이후 카자흐스탄은 불안정한 공화국이 되었다.

  “젊은이들에 대한 무력 남용은 비극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시위가 시작된 것이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개혁과 개방이라는 고르바초프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탄압된 이후 그들은 소비에트 통치 체제애 대한 모든 존경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라고 나자르바예프는 말하였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2

1991 8월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 1991년 8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의 모습. /미국 하버드대도서관

  공산권의 종주국, 소련에서 시작된 80년대 후반의 개혁, 개방 정책은 당시 소련의 위성국들인 동유럽과 중앙유럽에서는 통제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폴란드, 헝가리를 필두로 한 1989년 동유럽에서의 개혁의 물결은 변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동참으로 혁명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물결은 동유럽 위성 국가들을 넘어 종주국인 소련에도 영향을 미쳤고, 1991년부터 이미 소련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소연방 구성국들에서 벌어진 국민투표 결과로는 연방 유지가 더 높게 나왔지만,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이미 독립을 확정짓고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소련이 무너져가는 분위기에 반발한 공산당 보수파들은 소연방을 유지하고 고르바초프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르바초프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략무기 감축 협정을 조인한 뒤 크림반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 틈을 타서 쿠데타를 감행했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에 돌아오기 하루 전 쿠데타 세력에 의해 크림반도의 별장에 감금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있을 신연방 조약을 구상하던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겐나디 야나예프에게 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라는 협박을 받고 별장에 연금을 당했다.

  8월 19일 월요일 아침, 나자르바예프는 전날 옐친을 배웅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침 9시 자신을 깨우는 부인 사라로 부터 “방금 고르바초프가 병에 걸려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가 그 직무를 대행한대요” 라는 말을 들었다.

  소연방 해체의 결정타가 된 이른바 1991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올레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KGB 의장,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그리고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국제농업연맹 의장, 알렉산드르 티지야코프 산업교통통신위원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었고 이들은 야나예프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결성했고 8월 18일 4시부터 앞으로 6개월간 일부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이 기간 동안 국정운영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맡는다고 알렸다.

  신임 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 대통령령으로 긴급 동원령을 발표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 문제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으며 소련 헌법 제127조 7항에 따라 대통령직을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행한다”고 보도했으며, 수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 군 트럭을 동원한 군인들을 모스크바 시내로 진주시켰고 방송국과 공항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장악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온 세계가 우왕좌왕했으며 고르바초프의 생사와 행방에 대해 각종 예측이 쏟아졌다.

나자르바뎨프의 선택쿠데타 반대

  나자르바예프는 다음날 투데타 세력이 만든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불법성을 개인 성명서를 작성했다.

  8월20일 카자흐스탄 라디오와 TV를 통해 이 성명서는 낭독되었다. 나자르바예프의 성명서는 국제 언론을 통해 전 셰계로 타전되었다.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는 카자흐스탄의 비타협적인 입장은 모스크바에서 시민들의 대중 시위를 이끌어낸 보리스 옐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8월 20일 낮 옐친은 나자르바예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쿠데타 주동자들이 탱크로 옐친의 사무실을 습격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자르바예프에게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자르바예프는 즉시 모스크바로 가서 쿠데타 주동자들과 개인적으로 협상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옐친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고르바초프에 이해 소련의 총리로 추천된 바 있던 나자르바예프는 이 사태를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의 충고되로 그는 모스크바가 아닌 카자흐스탄을 지키면서도 모스크바에 있는 KBG 수장을 비롯한 쿠데타 주동자들과 전화통화를 통해서 설득작업을 시도했다.

  옐친은 탱크 위로 올라서서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위해 총파업을 하자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에 수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분노하여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옐친의 봉기 촉구에 일부 군부대는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고 반기를 들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옐친을 지지하는 소련군과 시민들이 육탄벽을 쌓고 쿠데타군에 맞서서 저항하기 시작했고, 한편에선 공수부대가 옐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은 공수부대 사령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소련 시민들의 저항은 무척이나 거세졌고 시베리아에선 수천의 탄광 광부들이 전면 파업했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전면 파업과 함께 25만명의 시민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시민들은 장갑차와 전차를 공격하고 조종수들을 끌어내리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시민들의 반발은 사그라들긴커녕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화염병으로 쿠데타 군의 탱크에 맞서자 쿠데타군은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시민들은 고르바초프에게 여전히 충성하고 있던 KGB 알파 그룹과 합세하여 바리케이트를 쌓고 쿠데타 군을 맨몸으로 막아섰다.

  이미 국가비상대책위원회의 명령은 먹혀들지 않고 있었고 통금령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반 쿠데타 세력의 중심에는 옐친이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KGB를 내세워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하며 한 발 물러서자 옐친에게 힘이 실렸다.

  옐친은 항쟁을 촉구했고 정교회 세력도 옐친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시위 인파는 50만에 육박했다. 파업은 연방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당황하여 사분오열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세력은 미국과 유럽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반발이 본인들 예상을 초월한 것도 있었지만) 전국에서 들끓는 반발을 억누르지 못했다.

  상황이 부정적임을 눈치챈 핵심 인사들이 슬금슬금 사퇴를 선언하며 발을 빼기 시작했고 동원된 군부대들도 이탈하여 옐친에게 합류했다. KGB 의장 크류츠코프는 자신들의 고르바초프 축출이 정당했음을 과시하고 타협을 위해 옐친에게 크림 반도로 가서 고르바초프를 데려가도 좋다고 했지만 이미 사태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8인 국가비상사태위원회들은 모스크바 공항을 통해 출국을 시도했다. 이에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의회는 이들의 체포 명령을 내렸다. 직후 그간의 실세로 거론되던 야나예프 대통령 권한 대행과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의장이 실각하고 군부의 강경 소장파들이 실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원회위원인 야조프 국방장관과 파블로프 총리가 물러나고 모이쉐프 소련군참모장이 국방장관에 오르면서 강경파들이 발악에 가까운 실력 행사에 나섰다.

  8월 21일 자정, 8대의 장갑차가 시민들이 차벽으로 만든 바리케이트를 밀어내면서 국회의사당 진입을 시도했다.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져 장갑차들을 불태워버렸고, 탈출하던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세 명의 시민들이 숨지자 시위는 더더욱 거세졌다.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모스크바 시내를 피바다를 만들지 않고서는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결국 소련군은 모스크바 봉쇄를 풀고 철수해 버렸다.

  이로써 사실상 공산당과 군부의 보수세력에 의해 시도된 쿠데타는 실패로 끝냈다.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 보수파들의 쿠데타는 해체의 수순을 밟아가던 소연방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동시에 소연방을 대체할 새로운 연방조약의 체결은 물 건너가고 있었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3

소연방의 붕괴… 슬라브권과 이슬람권으로 분열 위기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배치된 핵무기의 처리 문제, 각각 독립된 나라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들의 국적 선택의 문제, 독립국 상호간의 관세 문제, 국경 출입 문제 등 수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당시 나자르바예프는 연방의 붕괴보다 더욱 더 위급한 문제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볼셰비키 혁명으로 만들어진 강력했던 소비에트 권력이 사라진 진공상태에서 슬라브인들과 이슬람인들 사이에 첨예한 대결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는 것이다.

  이미 1986년 12월 알마티에서 발생한 민족 분규인 ‘젤톡산’ 사태를 경험한 바 있는 나자르바예프는 소연방내의 ‘민족주의’ 분위기가 어디로 분출될 지 가늠이 되었던 것이다.

슬라브권과 이슬람권의 분열 조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시로 이루어진 독립국가연합에 관한 협약은 강력한 슬라브 국가 동맹의 형성을 의미했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이슬람 공화국인 투트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의 독자적인 연합국가 탄생은 시간문제였다.

  이것은 슬라브 인종의 러시아인과 이슬람에 뿌리를 둔 투르크 유목민 출신의 카자흐인들로 이루어진 카자흐스탄에는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이때 나자르바예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화국들이 슬라브권과 이슬람권으로 분열되지 않도록 비상조치를 취했다.

  그는 중앙아시아 4개 공화국의 지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급히 회동할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91년 12월 13일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시하바드에서 회담을 개최하도록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러나 투르크메니스탄 지도자는 회담의 주요 의제로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카자흐스탄의 연맹인 ‘투르케스탄 연방’을 만들 것을 선언하는 결의안을 내놓았다. 나자르바예프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슬라브-이슬람 분열의 서막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아시하바드 정상회담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옐친은 나자르바예프에게 중앙아시아 4개 공화국이 모두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설득하도록 강요했다. 옐친의 그러한 압박은 중앙아시아 연맹을 별도로 만들자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압력에 버티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결국, 별도의 연맹의 구성보다는 독립국가연합 가입이 더 유리한 대안이라는 나자르바예프의 설득이 먹혀 들어가, 중앙아시아 각국 정상들은 독립국가연합 가입에 동의했다.

  단, 중앙아시아 국가 정상들은 자신들이 러시아, 벨라루시, 우크라이나와 동등하게 창립회권국이 된다는 조건을 달았고, 옐친, 크라브축, 슈시케비치 대통령이 12월 21일 알마티에 와서 창립국가들의 수장들이 모두 독립국가연합 창립 조약을 위한 공식 조약식에 참가하도록 요구했다.

알마티, 독립국가연합 조인식의 무대가 되다

  12월 21일은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에는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이 날은 민족국가로서 카자흐스탄의 공식적인 독립이 시작된 날이었다. 뿐만 아니라 후일 20세기 인류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된 ‘소비에트 연방’ 이 역사속에서 사라지는 대신 독립국가연합이 탄생하는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는 날이었다.

  이 사건의 정치적, 외교적 의미를 인정한 1천 여명의 전세계 보도진들이 알마티에 들어왔다. 이들은 소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15개의 진정한 독립국가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취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991년 모스크바에서 일어나 8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뒤 12월 8일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지도자가 벨라루스의 브레스트에서 북쪽으로 50㎞ 정도 떨어진 비아워비에자 숲의 별장 비밀회동에서 합의한 독립국가연합이 마침내, 중앙아시아국가들도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결정중의 하나가 진행되는 알마티의 독립국가연합 창설 조인식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불참했다.

  72시간 후 1991년 크리스마스 날 그는 소연방 대통력직에서 물러났다. 아무런 투쟁이나 심각한 반발 없이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쥐고 있던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고르바초프는 이 극적인 사건에서 가장 객관적인 참여자였는지도 모른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4

고난속에 맞이한 독립

  카자흐스탄의 독립은 재앙속에서 시작되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주민 대다수는 기쁨 대신 충격을 경험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제 소련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 낙심하였다.  

  독립국이 된 1992년 초, 초대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앞에 놓여진 문제들은 너무나 심각했다.  국가로서의 생존 가능성은 잘 해야 조금 있는 정도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낙관론자들은 카자흐스탄이 10년을 존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비관론자들은 붕괴가 훨씬 더 빨리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위협은 외부 침략자의 군사적 침입이 아니라 내부적인 폭발이었다.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들은 어느 것이라도 촉매가 될 수 있었다. 불안정의 원인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에서 부터 내부적인 헌정 위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있었다. 정부의 임금 및 연금 지불 불능, 모스크바의 모호한 행동, 200만명이 넘는 러시아인,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 프로그램이 경험 없는 의회에 의해 마비되는 사태, 국경선에 관한 불활실성, 그리고 국가가 보유한 핵무기에 반대하는 전례없는 시위가 그러한 것들이었다. 초기 단계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자르바예프가 벌인 투쟁은 카자흐스탄이 민족국가로 탄생하는 고난의 역사였다.

  1992-1994년 카자흐스탄을 사로잡았던 초인플에이션이라는 전염병은 ‘러시아가 재채기를 하면 그 이웃들에게 폐렴이 시작된다’라는 옛말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예였다.

  나자르바예프는 국가 경제의 건전성이 그의 친구 보리스 옐친 정부와의 협력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한 낙관론은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카자흐스탄 무역수지의 90%가 러시아와 관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새로운 지배 엘리트들은 알마티와의 협력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였다.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는 첫번째 징후가 1992년 1월 2일에 나타났다. 그 당시 러시아 총리직을 수행하던 예고르 가이다르는 명령 하나로 모든 가격 통제를 폐지했다. 나자르바예프 자신도 자유 시장 경제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지만, 그러한 기획의 소도와 비밀 유지 그리고 규모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가이다르를 향애 “그는 짓기보다 부수기를 잘하고, …  무엇보다 탁상행정론자로, 산업 현장에서 일해 본 적이 없으며, … 그래서 기업가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상점에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자 카자흐스탄에서는 소비자의 심리가 공황 상태에 가까워졌다. 가이다르가 폭탄을 터뜨린 이후 몇 주 동안 나자르바예프는 가격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길이가 7천km에 달하는 러시아 – 카자흐스탄 국경에서 암거래상이 기승을 부려 기본 식료품 가격을 1월 16일과 24일, 그리고 30일에 연속적으로 인상해야 했다. 그 후 2월 초에는 가격을 완전히 자유화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필품은 부족했고 가게들 앞에 길게 줄을 선 모습은 이 당시 아주 흔한 풍경이었다. 내가 알마티에 왔을 때인 95년은 이러한 초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잡혔을 때였음에도 생필품의 부족과 길게 줄을 선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 시기 카자흐스탄 초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였는 지를 알려 주는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인 91년에  알마티에는 구소련 최초로 한국교육원이 문을 열었고 초대 신계철 교육원장 외 또 한명의 교사가 파견되어 고려인 동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91년에 파견되어 3년이 넘는 기간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그 파견교사는 자신이 타던 차를 중고차 시장에 내놓았는데 살 때보다 오히려 더 비싼 값으로 중고차를 팔 수가 있어서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정상적인 시장경제사회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그 당시엔 이런 예가 무수히 많아서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거래로 치부되었다.  

  한편, 상점의 텅빈 선반은 문제의 일부일 뿐이었다. 1년간의 인플레이션이 2600%에 달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어려움이 발생했다. 그것은 값이 많이 오른 상품을 살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러시아 국립은행이 모든 루블화 공급을 독점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모스크바의 지도자 자신들도 심각한 현금 부족을 겪었다. 이것은 수표가 드물고 신용카드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서는 재앙이었다. 현금이 부족했으므로 임금과 연금 지급도 불가능해졌다. 국가의 무역과 재정 활동이 멈추었다. 몇 달 후에는 연금 수령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불만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국민들의 분노를 느끼고 있었지만 상황을 호전시킬 방법이 없었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5

독립 직후 직면한 난제 … 핵무기

  카자흐스탄에 있는 핵무기의 운명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독립 직후 나자르바에프가 직면한 가장 복잡한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복잡하게 된 것은 나자르바예프의 인간적인 감정과 대통령으로서의 정치적 의도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나자르바예프는 마음속으로 오래 전부터 핵실험을 금지하고 핵무기를 카자흐스탄 영토 밖으로 반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국내외의 모순된 입장들을 고려해야 했다. 그 밖에도 군비축소의 방법과 기술을 결정하는 것은 극도의 신중을 요구했다.

  따라서 대통령이 된 후 나자르바예프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고 핵무기를 신속히 포기하려는 본능적 노력을 자제했다.  대신 그는 카자흐스탄이 최대한의 이득을 얻기 위하여 핵강대국들과의 세심한 외교적 대화에 나섰다. 핵무기 관련 협상에서 나자르바예프가 보여준 행동 방식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그를 드러내주었다.

  소련은 카자흐스탄 동북부지역인 세미팔라틴스크 주변 지역을 핵무기 실험장으로 사용하기로 하는 전략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지역의 면적은 이탈리아만한 규모의 땅이었다.   1949년, 소련군 최초의 핵실험이 바로 이 곳에서 실시되었다. 때로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포탄보다 20배나 더 강력한 이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 있은 지 몇년 후 동물과 사람에게 나타난 끔찍한 결과에 대한 소문이 카자흐 초원지대를 따라 퍼져나갔다. 세미팔라틴스크 주변 인구의 99%이상을 차지하던 카자흐인들은 공포에 빠졌고 민족적 분노가 확대되어 나갔다. 그것은 사산아 출산, 기형, 암, 지적장애와 같은 방사능 부작용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유명한 시인 아바이 탄생지로서 카자흐인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은 하늘에서 일어난 무서운 불꽃과 수수께끼 같은 폭발이 일어난 후 집을 뒤흔든 강력한 진동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군인들의 실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물론 그들이 본 것을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1950년 부터 1990년 까지 소련에서는 핵실험 프로그램과 관련된 정보를 누설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형사 범죄로 간주되었다.

  냉전 시대 핵군비 경쟁 시기에 거대한 카자흐스탄 영토가 소련의 무기 실험장이었다. 1949년 과 1989년 사이에 3주마다 핵실험이 실시되었다. 총 752회의 폭발 실험이 있었는데 지표면에서 78회, 공중에서 26회, 나머지는 지하에서 실시되었다.

  세미팔라틴스크에서의 핵실험을 둘러싼 철저한 비밀 유지 때문에 카자흐스탄에서는 그 누구도 핵 프로그램의 진정한 본질과 규모에 대해 명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자신의 전기에서 “내가 총리였을 때, 나에게 이에 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소. 이 문제는 국가 기밀로 간주되었고, 그것에 대해서는 최고위급 군장성들만 알고 있었소”라고 회상한 바 있다.

   비밀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것은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부터 이다. 특히,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대참사 후에 이르러서였다. 체르노빌은 47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4천명 이상이 방사능으로 인해 암에 걸렸다.

  나자르바예프와 후에 그의 고문이 된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행해진 핵실험 프로그램의 장기적 결과는 최소한 체르노빌의 두 배에 맞먹는 것이었다.

  당시 나자르바예프의 분노가 더욱 커지게 된 것은 체르노빌 사고 몇 달 후 세미팔리틴스크 실험장 면적을 확장하라는 몹시 냉혹한 명령때문이었다. 이것은 1987년 1월의 일이었다. 모스크바 국방부 고위 관료가 장관회의의 위임을 받고 나자르바예프에게 전화를 걸어, 딸띠꾸르간 주에 새로운 핵무기 실험장을 건설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고 통보해왔기 때문이었다. 나자르바예프는 경악했고 재검토를 요구했다.

  이후, 소련 군당국의 계획을 뒤집을 수 없다고 느낀 나자르바예프는 자신의 오랜 정치적 동지 중 한 사람인 딸띠꾸르간 주지사를 비밀리에 만나 소련 군부의 이 계획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반대 시위를 사주할 것을 지시했다.

  동시에 나자르바예프는 세미팔라틴스크 지역의 지나치게 높은 암 발병수준을 보여주는 보건부 비밀 자료를 언론에 흘린 후 반대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사회의 반대 분위기가 커지는 데에 불안을 느낀 KGB 지부요원들은 국가 안보 기관의 고위부에 이것을 보고되자, 결국 모스크바는 이 프로젝트를 철회했다.

  나자르바예프는 1989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최고회의 총회에서 핵무기 실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히자,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비판했다. 그러나 개혁개방정책의 추진으로 인해 1989~1990년 겨울 모스크바에서는 개혁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커져갔고, 소연방내 공화국들에서는 자주권 확대를 향한 갈망이 커졌다.

  소련해체 직전이었던 1990년은 가장 격동적인 한해였는데, 개혁을 두고 소련사회의 갈등양상에 대해 나자르바예프는 자신의 전기에서 “전 소련이 마치 화염에 휩싸인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폭풍 덕에 소련 최고회의(의회 격)는 1990년 4월 22일, 나자르바예프를 각 공화국들을 위한 지방분권화의 일환으로 카자흐스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나자르바예프를 대통령직에 오르는 것을 지지한 고르바초프와 최고회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판단 착오를 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왜나하면, 대통령이 된 지 한 달 후에 이미 나자르바예프는 모스크바의 결정을 뒤집는 정치적 발의를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세계 반핵 유권자대회 라는 이름하에 알마티에서 열린 국제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카자흐스탄과 세계 30개국의 반핵활동가들이 한데 모였다. 회의를 마친 말마티에서는 평화 행진으로, 카라간다에서는 13만명 이상의 카라간딘스크 탄광 광부들이 반대 집회를 지지했다.

  소련 군부는 이러한 상황에도 1991년 가을에 세미팔라틴스크에서 3번의 핵실험을 실시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이 계획의 중단은 91년 8월의 군부 쿠데타를 통한 고르바초프 하야 시도가 실패로 인해서 찾아왔다. 결국, 소련 군부는 나자르바예프의 핵실험의 금지를 명하는 대통령령의 공포에 부딪혀 예정된 핵실험은 ‘노바야 제믈랴’ 섬의 북극 핵실험장에서 실시되었다. 이로써 카자흐흐탄에서 40년에 걸친 핵실험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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