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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정부는 수도 누르술탄 국제공항 내 ‘아쉬크’앱 사용을 의무화했다.   카자흐스탄 국가수석보건의는 6일(목), 이같은 결정을 내리고 12(수)부터 누르술탄 공항을 방문하는 모든 방문객 및 승객은 공항 입구에서 '아쉬크'앱을 통해 코로나19 감염 상태를 확인하게 하였다.   카자흐스탄 위생 감염 관리위원회는 11일, 누르술탄 국제공항 입장객의 ‘아쉬크'앱 사용 조치와 관련하여 누르술탄 공항 방문객 및 항공기 승객은 휴대폰에 이 앱을 깔고, 공항 입구에 비치된 QR코드에 접속하여 코로나19 감염 상태를 색깔에 따라 확인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녹색은 72시간 내 PCR 검사 음성 결과를 받은 상태이고 청색은 PCR 검사 결과가 없고, 밀접 접촉자 명단에도 등록된 바 없으며, PCR 검사서를 요구하지 않는 장소에서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황색은 밀접 접촉자로써 거주지 근처 식료품점 및 약국으로의 이동은 가능하나, 그 외 공공장소는 방문 금지 상태를 알려준다. 적색은 PCR 검사 양성 판정을 받은 자기격리 대상자를 뜻하며, ‘황색’ 및 ‘적색’에 해당되는 사람은 공항 출입 및 항공기 탑승이 제한된다.   스마트폰이 없는 경우, 공항 직원이 승객 동의 하 INN(주민번호)을 통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으며, 외국인의 경우 여권번호로 확인할 수 있다.   아누아르 샬레케노프 누르술탄 국제공항 홍보실 관계자는 10(월)부터 2일간 앱 사용을 시범적으로 진행했으며, 그 결과 적색 1명, 황색 4명을 확인하였다고 설명하고, ‘적색’에 해당된 승객의 항공권은 항공사를 통해 환불조치 되며, 이 조치 적용 기간에는 경찰이 공항 내에 24시간 배치될 예정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현지의 통신사인 '카진포럼'은 누르술탄 국제공항 내 '아시크'앱 사용조치 이후, ‘황색’4명, ‘적색’2명을 확인했다고 보도하였다.

  전세계 코로나19  일일 확진자의 절반 까까이 나오고 있는 인도 남쪽에   위치한 몰디브를 방문한 경우 14일간의무적으로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카자흐스탄 보건부는 16일, 텔레그램을 통해 키야소프 국가수석위생의가 ‘몰디브로 부터의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유입 예방 조치 강화’에 대한 신규 규정에 서명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7(월) 0시 부터 14일 이내에 몰디브를 방문한 모든 입국자는 PRC 검사서 제출 유무 및 코로나19 백신 접종 여부와 관계없이 14일 동안 자가격리를 실시하게 되며, 14일간 의료진의 관리를 받게 된다.   한편,  카자흐 정부는 14일, 인도에 40톤 상당 인도적 지원물품을 전달했다. (한인일보)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원장 이혜란)은 5월 11일(화)부터 6월 22일(화)까지 문화원 온라인 한식 강좌를 바탕으로, 주재국민들이 한식을 요리하고, 가족과 함께 한국 음식을 즐길 수 있는‘온라인 한식 콘테스트’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5월 11일(화)부터 6월 10일(목)까지 기존 문화원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하였던 한식강좌 23가지 중 1가지 메뉴를 선택하여, 요리 과정을 포함한 완성 사진을 양식에 맞춰 제출하면 참여가 가능하다. 우승자는 1차 예선에서 10명 선발하고, 2차 본선에서‘온라인 설문플랫폼 투표’및‘전문가 심사’를 통해 최종 5명을 선발 후 순위에 따라 상품을 차등 지급한다. 더불어 우승자가 아닌 일반 참가자를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소정의 기념품도 증정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상황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하였던 문화원 한식강좌와 연계한 콘테스트로써 다채로운 한국 요리를 소개하고, 한식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가진 주재국민들이 가정에서 쉽게 요리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 이혜란 원장은“온라인 한식 콘테스트를 통해 한식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도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한식을 통해 가족과 함께 건강을 챙기는 시간이 되길 기원한다.”고 전했다.

  카자흐스탄은 일본에 대해 농업과 인공지능 분야와 지질학탐사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경제 아젠다를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토카에프대통령은 12일(수), 일본 스가총리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이같이 제안했다고 대통령실 웹사이트를 통해 밝혔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과 스가총리와의 정상간 첫 번째 접촉인 점을 고려하여 스가 총리의 취임을 축하하고 소관 업무의 성공을 기원하였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도쿄 하계 올림픽 관련 일본 국민에게 따뜻한 축하를 전달하고, “올림픽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인류 승리의 체현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양국 정상은 카자흐-일본 관계의 현황과 발전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일본은 아시아에서 카자흐스탄의 주요한 전략적 파트너 중 하나이자 카자흐스탄 내 10대 투자국 중 하나라고 하고, 현재 50개 이상의 일본 자본 투자 기업이 카자흐 내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변화하는 세계정세의 조건 하에서 양국협력을 새로운 질적 차원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저적하고 농업, 지질학탐사, 디지털화 및 인공지능 분야 투자 프로젝트를 포함한 새로운 경제 아젠다 개발을 제안하였다.   카자흐스탄은 이와같은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부총리급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가까운 장래에 일본으로 파견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스가 총리는 2022년은 일본과 카자흐스탄의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로 양국 관계에서 구체적인 결과를 달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하고, 카자흐스탄은 중앙아 내 가장 많은 일본 기업이 주재하는 중앙아시아의 리더라고 언급하였다.   양국 정상은 다자 의제 전반에 대한 긴밀한 대화와 협의를 지속해 나가는 데 합의하였고, 통화 말미에 토카예프 대통령은 편리한 시기 스가 총리의 카자흐스탄 방문을 초청하였다.

  카자흐스탄 보건당국은 백신 접종자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국가수석보건의사의 결정으로 이들 대상자들에 대해 일부 제한조치를 해제한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들은 2차 백신 접종을 마친 경우에는 병원 입원, 교대근무, 의료진의 휴가 후 복귀, 출장, 병가 등을 위해 PCR 검사서를 제출하지 않아도 되고, 백신 접종자가 확진자와 접촉한 경우에도 의료진의 관리하에 있게 되지만 격리조치는 하지 않는다.     또한 2차 백신 접종을 마친 근로자는 재택근무를 실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도했다.   최 보건부 장관은 인도 변이 바이러스의 카자흐스탄 국내 유입에 대한 대응책으로 카자흐스탄 도착 14일 전까지 인도를 방문한 이력(3국 경유도 포함)이 있는 승객은 PCR 검사서 지참 유무 및 백신 접종 여부와 관계없이 14일간 자가격리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국가수석보건의가 발표한 기존 규정(No.68)에 따르면,  ‘적색’지역은 재택근무 80%, 전일근무 20%, ‘황색’지역은 재택근무 50%, 전일근무 50%, ‘녹색’지역은 재택근무 30%, 전일근무 70%를 준수해야 한다. 이번에 발표된 No.17 신규 규정에서도 상기 비중이 변경되진 않았으나, 2차 백신 접종자 및 코로나19 회복자(6개월 이내)에게는 재택근무를 권장하지 않는다.   카자흐스탄은 전국의 1천 400개의 백신 접종소와 300여개의 이동 접종소에서 현재까지 140만명이 1차 접종을 마쳤다. (한인일보)

  카자흐스탄 카슴-조마르트 토카예프(Kassym-ZhomartTokayev) 대통령이 전통적인 우정, 동맹 및 키르기즈 공화국과의 전략적 파트너십 원칙에 따라 우방국 키르기즈스탄 국민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한다고 전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의 언론 담당비서는 1 만톤의 밀이 이웃국가로 보내질 것 이라고 밝혔다. 지난 주말, 토카예프 대통령은 키르기스스탄 자파로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를 진행하며 키르기스-타직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 결과로 당시 지역상황을 논의하면서 카자흐스탄이 필요할 경우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900km 이상의 국경선을 통해 분리가 되어있지만, 국경선의 대략 절반가량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국경 인근 거주자들은 물, 목초지 및 도로접근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분쟁지역은 두 나라 국경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2021년 5월 2일 양국간 국경 분쟁동안, 키르기즈스탄 36명, 타지키스탄 20명이 사망 했고 사망자에는 어린 아이들도 포함 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민간인이며, 58,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분쟁 지역에서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자흐스탄은 즉각적인 평화적 분쟁 해결을 위해 해당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전에도 카자흐스탄은 누르술탄 정상회담에서의 시리아 내전협상과 같은 국제 분쟁의 중재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카자흐칸국과 러시아의 등장  지난호(8회)에는 현재의 카자흐스탄이라는 국가의 원형이 되는 카자흐칸국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즉, 징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의 영역이었던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에서 떨어져 나온 한 유목집단이 15세기 중반, 서서히 남하하여 현재의 알마티주(세레레치예 지역)과 시르다리아강 중류 지역을 주요 거점으로 해서 카자흐칸국을 세웠다는 것과  18세기  전반기까지 대, 중, 소 쥬즈(오르다)   라는  카자흐인들의  정치  연합체를 구성하며 살았다.   이번호에는 카자흐 현대사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카자흐칸국 성립(15세기 중반) 후부터 18세기까지 카자흐초원과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겠다.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의 화려한 반격 킵차크 칸국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카잔칸국, 크림칸국, 아스트라한칸국, 시비라칸국 등으로 분열되었다는 말은 이미 지난호에서 언급했다. 분열된  칸국 중에는카자흐칸국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한 나라가 5개로 쪼개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과거, 몽골의 대칸이나 킵차크칸국의 칸을 대리하여 러시아계 공국들로 부터 세금징수업무를 대행하면서 세력을 키운 모스크바공국은 서서히 힘을 키워나갔다. 드디어, 16세기 중반(1552년) 볼가강 중류 유역의 요충지 카잔을 공격하여 카잔칸국을 멸망시켜버렸다. 이는 오랫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계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반 4세가  이 승리를 기념하여 현재까지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 있는 바실리 대성당을 건립한 것을  보면 그가 이 전쟁의 승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 사건은 앞으로 전개될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러시아가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이 전쟁 승리 4년 후 모스크바공국은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가는 볼가강의 하류 유역에 자리잡은  아스트라한 칸국도 병합하고 종가인 킵차크칸국의 영토의 절반을 차지한다. 세력을 키운 모스크바공국은 이후 '짜르 러시아'로 국가면모를 일신하고 러시아인들에게는 '짜르'로서, 주변의 유목민들에게는 '위대한 벡 차간 칸'으로 간주되었다. 세계사에 러시아의 등장을 알린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통치하던 카잔 칸국의 유민을 타타르라고 부르고 그 후에 정복한 주변 유목민들도 오랫동안 이 이름으로 통칭했다. 타타르 라는 명칭은 옛날 몽골의 침략에 질린 유럽 지식인들이 그들의 전설에 나오는 타르타루스(그리스어로 지옥에서 온 사람)와 몽골을 구성하는 유명한 부족인 타타르를 동일시하여 몽골 전체에 부여한 이름인데, 러시아인도 이를 답습하여 타타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볼가-우랄 지역의 사람들은 그 후에도 계속 타타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말에는 항상 러시아를 괴롭힌 '야만인'이라는 뉘앙스가 따라 다녔다. 요컨대, 카자흐칸국의 성립과 러시아의 등장은 킵차크칸국이라는 중앙권력의 약화와 함께 시기적으로 큰 시차없이 이루어진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건이었다.   러시아의 '억압'과 '동화'정책 러시아는 자신이 차지한 볼가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러시아 귀족과 수도원 또는 도망온 러시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과정에서 타타르인들은 이주해온 러시아인들 때문에 오히려 거주지와 직업에 제한을 당하게 되었고 18세기 말 무렵에는 인구가 역전되어 러시아인이 인국의 52%를 차지하고 타타르인들은 42%에 불구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는 러시아정교의 포교를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개종자에게는 면세특권을 주거나 죄를 사면해주는 방법으로 개종을 유도하는 한편, 반무슬림정책을 펼쳐 한때는 카잔 부근에 있었던 모스크 약 70%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타타르인들은 자신들의 고향 땅을 떠나 카자흐초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중앙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타타르인 디아스포라'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이들은 카자흐초원의 현대사 전개에 있어서 러시아인들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18세기말 중앙유라시아쪽을  눈을 돌린 예카테리나 여제는 동방영토의 안정과 동방무역의 확대를 위해 타타르인들에게 활동의 자유를 주고 이는 상업을 장려하는 등 실용주의적인 포용정책을 폈다. 이 결과 타타르인들은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동방의 이웃 사람들과 친근함을 무기로  러시아인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카자흐  초원과 투르키스탄에서  상권을 확대했고  이들 가운데는  초원을  돌아다니는  잡화상에서부터  대규모 대상 무역을  하는 거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인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동방에서 양모, 피혁, 면사를 가져오고,   러시아에서 직물,  금화,  금속 제품을  가져와서 팜으로써  러시아와  중앙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상업망을  구축했다. 타타르의 부흥 킵차크칸국의 수도가 있었고 주우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의 중심 거점이었던  볼가강유역과 우랄지역에는 상업으로 거부가 된 타타르인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자신이  모든 재산을  고향에  모스크와  마드레사를  짓고 유지하는 비용에 기꺼이  내놓았다. 또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은  투르키스탄, 특히  이슬람교학의  중심지인  부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들은  러시아의 통치하에  쇠퇴한 이슬람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부하라유학을 통해서  러시아문명의  도전에 대항해서  이슬람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이슬람  해석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무슬림도  근대과학과  러시아어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러시아 당국이 초기에  취했던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개종화를  중단하고  중앙아시아 거주민들을  러시아와(정교화)하고  그들 사이에  러시아문화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한 데  영향 받은 바 크다.   카자흐초원의 병합 러시아는 카잔 칸국을  손에 넣고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16세기 말에는 주치 후예를  군주로 추대한  시비르  칸국을 병합하고 18세기 초부터는  카자흐초원  북쪽에서  부터 군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는  러시아 변경방위와  무역의 거점 역할을  동시에  했다. 이때 큰  활약을  한 이들이  바로 '코사크'들이다.  카자흐 초원에  러시아의 패권을  수립하는데 첨병의 역할을 한 이들은 러시아 농민병이라고  할 수 있는데, 15~6세기에 러시아의  동남부 변경지대로 도망간 러시아  부랑민들이 투르크계 종족들과  접촉하면서 생겨난  특이한 집단이다.  원래 '카자흐'와  똑같은 어원 즉, '모험자', '독립적이고 얽매이지  않는  백성'을  뜻하는 투르크어에서 유래했다. 러시아인들은  양자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카자흐인에게 '키르기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들은 이른바  '키르기스-카자흐'인데,  카자흐인은  러시아 혁명  후  1925년까지  이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명칭은  카자흐와  본래  키르기스  사이에  혼동을 일으키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러시아 세력이  카자흐  초원북쪽에 다다를  무렵  유목  카자흐는 이미  정치적 통합성을  상실하고 서쪽에서  부터 차례로 소쥬즈, 중쥬즈, 대쥬즈라고 불리는  3개의  부족  연합체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카자흐의  최대 위협은  같은 유목민인  준가르(티베트불교를  신봉하는 서몽골계 유목집단)의  침략과 약탈이었다. 타쉬켄트, 투르키스탄, 사이람 등  카자흐인의 거점도시들에 대한 침탈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난민은  사마르칸트,  부하라,  페르가나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1730년 소쥬즈의  아불 하이르 칸은  러시아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청원하고 이를 계기로  다른 쥬즈의  칸들도 그의 전례를 따랐다.  이는 준가르의 약탈로  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안보와  통상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외교전략이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러시아는  카자흐 초원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미  권위를 상실한  소쥬즈와  중쥬즈의  칸을  대신하여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초원  동남부에  퍼져  있던 대쥬즈의  정치 지도자들도 러시아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러시아당국은 이렇게 차례로 러시아령에  편입된 카자흐  초원을 악몰린스크, 세미팔라찐스크,  세미레치예,  우랄스크,  투르가이,  시르다리아 의  여섯게 주로  나누고 이  중  일부를  '옴스크'에  소재한 초원 총독부 관할 아래 두었다.   요컨대, 카자흐 초원과  러시아는  오래전부터역사적으로 연결성을  가져오고 있었지만 킵차크칸국이라는  하나의 통치권  아래에 놓이면서  좀 더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이는 변방의 작은 공국이었던 러시아가 킵차크 칸국의 지위를 차지한 후에도그 관계는 계속되었고 19세기  부터 펼쳐지는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등장하게 된다.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이번 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카자흐스탄은 언제부터 존재했었나?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와 국경선은 20세기 초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연방 성립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936년 카자흐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연방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중의  하나가 되었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떤 상태였나? 고대부터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땅이었던 이곳은 징기스칸이 세운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징기스칸 이전에도 훈제국, 돌궐제국(투르크제국) 등 수많은 유목제국이 성립되어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역사의  연결성측면에서 보자면  대몽골국부터 시작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은 징기스칸 사후 최근 19세기까지도 징기스칸의 직계 후손이나 그 일족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피의 정통성'을 통한 통치의 정당성 확보라는 유목사회의  오랜 전통이  매우 강하게  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몽골국의 부흥을 목표로 내세웠던 티무르마저 티무르대제국의 건설 이전부터도 현재의  우즈벡지역에서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자신이  직접  칸의 지위에 오를 수는 없었다. 징기스칸의 일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징기키스탄의 피를 물려 받은 공주와 결혼을 함으로써 비로소 칸 가계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자신이 스스로를 칸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땅(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은  징기스칸 생전에 그 아들들에게 나눠졌던 4칸국중 큰아들  주치의  영지였던 킵차크칸국(주치 울루스)과 차가타이칸국(카가타이 울루스)이 시르다리아강을  경계로 서로  교류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북쪽의  유목민들과  남쪽의 오아시스  농경민들은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면서도 교류하면서 살아왔다. 카자흐칸국의 탄생 그러던 중  15세기가 되면서 킵차크칸국(주치 울루스)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그  동부지역에는 '우즈베크'라고 불리는 유목민 집단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을 통솔한 사람은 주치의 다섯째 아들 샤이반의 후손인 아블 하이르칸 (1428~1468)이었다. 아블  하이르칸은 종가인  킵차크칸국으로 부터  분가를 선언하고 서서히 남하하여 티무르제국의 영역인 호라즘을 약탈하고 그를  추종하는 유목민들을 통합하여 1446년 '우즈베크 울루스' 세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카자흐스탄의 남부지역을  흐르는  시리다리아 강  중류지역을  근거지로 삼아오던 유목민들은  케레이칸과  자니 벡  칸(두 사람  모두 주치가문의  일원)을  따라 천산산맥 북쪽 세미레치 지역(오늘날의  알마티주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이주하여  카자흐칸국을 세우게 된다.  이들이 오늘날  카자흐 민족의  기원이 된다. 이들은 킵차크  초원의 유목민들을  추가로 받아들여 자니  벡의 아들인  카심 칸 시대에는 강력한  유목국가인 카자흐칸국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시르다리아 강  중류  유역과  세미레치에 지방의 오아시스  도시를 지배 아래에  넣고 주위의  여러  세력을  위협했다   이들은  적어도 18세기  전반기까지 대, 중, 소 쥬즈(오르다)   라는  카자흐인들의  정치  연합체를 구성하며 살았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와서  정치인들의 출신 배경을 비롯한 현재의   카자흐의  정치와  사회실태를 파악하는데  유용한  분석틀로써 사용되어 지고 있다.  옛 소련의 카자흐 공산당은  대부분 대 쥬즈(울르 쥬즈)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독립 후에도 대쥬즈  출신인 나자르바예프가 대통령이 되고  기타 중,  소쥬즈를 대표하는 정치집단이 존재한다      한편, 아블 하이르칸의  손자인 샤이바니는  카자흐원정은 실패하지만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영토(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사이의 비옥한  오아시스 농경지대)를 차지하게 되는데, 부하라에 입성하고  사마르칸트까지 정복하여17세기초까지 이 지역을 통치함으로써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원형을 만들어나갔다. 주변정세 : 러와 청제국의  등장   킵차크칸국과 티무르제국간의 관계는 한마디로 '협력'과 '경쟁' 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대몽골국의 후예들중에서 종가를 자임해온 킵차크칸국은 과거 차가타이칸국과 일칸국의 영토를 모두 아우른  티무르제국은 물론이고 징기스칸의 직할지 였던 몽골 고원과 중원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이나  후계자 선정 등의 일에 간여를 하여 분쟁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종가로써의 권위를 유지해 왔었다. 그러나 대대로 비옥한 페르시아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오던  킵차크칸국의 칸들은 티무르가 페르시아와  아랍, 소아시아지역까지 정복하자 잦은 갈등을 빚어왔다. 때로는 형제국으로써 '협력'관계를 유지했지만 기습적인 약탈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는 티무르의 킵차크칸국에  대한 원정을 불러왔고 수도 바투사라이가 그의 손에 함락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런 역사가 전개되자 킵차크 칸국의 중앙권력 약해지고 칸의 권위도 실추되었다. 세금이나 공물납부를  거부하고  중앙에  반기를 지방정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모스크바 공국이었는데, 16세기 접어들면서 세력을 키운 모스크바 공국은 루시인들이 사는 땅의 북동부를 중심으로 짜르 러시아를 세우고 분열된 킵차크 칸국의 후예들인 크림칸국, 카잔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시비리 칸국 등을 차례로 손에 넣으면서 대제국으로 성장해 나간다. 이때 러시아를 동진시킨 주요 동력은 모피였는데, 마치 미국의 골든러시 때문에 서부개척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시베리아산 모피는 유럽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구가하였고, 러시아의  모피 사냥꾼들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시베리아 진출 60년 만에  베링해에 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다. 한편,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의  대칸인 쿠빌라이가 몽골고원과 중원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세운  원은  주원장이  세운 명에 의해 중원을  빼앗기고 몽골고원으로 축소되었다가  마침  만주에서 흥기한  여진족이 세운  후금(나중에  대청으로 고침) 에 의해 징기스칸으로  부터 내려오던 대몽골국의  옥쇄를 헌납당하게 된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대몽골국의 정통성과  유라시아유목민에 대한  종주권은 청으로 넘어가고 청의 황제는 중원에 사는 한족들의 황제임과 동시에 유목민들의 대칸으로서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  더해  17세기에  접어들면  몽골고원에서는 대몽골국의  부흥을 내걸고  서몽골 지역의  오이라트부가 몽골고원을 통합하게 된다. 이들은 세계적 제국으로 발전한 청과  러시아 사이에서 과거 대몽골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준가르 유목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준가르는 한때 몽골고원과 티벳을 연결하여 큰 세력을 떨치게 되고 현재의  카자흐스탄 남동부지역인 세미레치에를  자주  침략한다. 카자흐인들은  이 때를 '수난의  시기'로 역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 같은  유목민으로서 좋은 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은  잔인한 복수를  동반한 전쟁이었고  이를 계기로 카자흐인들은  서쪽의 러시아 짜르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이는 19세기 말까지 진행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 또는 카자흐에  대한 러시아의  병합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하게 된다. 18세기 말에는 아블라이 칸이라는 유능한 지도자가 내부 갈등을 통합하고, 청과 러시아 사이에 균형 외교를 펼치며 준가르 잔당들을 제압했으나, 그 후임자들은 러시아에 휘둘리게 되었고 청의 준가르 정복으로 인해 알마티와  일리 강 지역과 발하쉬 호수 동남부는 청의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  카자흐스탄 북부와 중부지역에 8개의 러시아식 행정구역을 두어 지배하에 두었다가 1860년대에 이르면 카자흐스탄 전역이 러시아의 영토가 된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 및 적백내전 기간 동안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키르기스 자치 공화국'의 일부로서 편입되었다가 1924년부터 추진된 민족 구성을 바탕으로 한 자치 공화국 구성 개편으로 1925년 4월부터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으로 명명되었다가 1936년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카자흐스탄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저지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일방적 무비자 제도의 잠정중단' 조치를 올해 12월 31일까지 연장했다고 '텡그리뉴스'가 5일 보도했다.   카자흐스탄 외교부는 "연장 대상국은 57개국으로써 해당 외국인에 대한 무비자 입국·체류·출국제도가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대상국에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국과 이스라엘, 태국, 오만, 멕시코 등 신규 확진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국가들이 포함됐다.   다만, 한국과 러시아, 아랍에미리트(UAE), 터키 등 19개국에 대해서는 기존처럼 무비자 제도를 적용한다.   이와 함께 카자흐스탄을 경유하는 중국과 인도 국민을 위한 72시간 비자 면제제도도 올해 12월 31일까지 중단됐다.   카자흐스탄은 작년 4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정부령으로 2020년 11월 1일까지 비자면제 중단 조치를 내렸다가 올해 5월 1일까지 연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