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이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상표/서비스 및 원산지에 관한 협정’ 가입에 관한 법안 채택을 논의중에 있다.   카자흐스탄이 해당 협정 가입국으로 합류할 경우 지적재산권 소유자는 10년간 EAEU 가입국인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에서 지적재산권에 대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지적재산권 등록 절차가 간소화되고 지적재산 보호권이 EAEU 국가에서 단일하게 적용되어 지적재산 소유자의 비용 절감과 투자 유치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카자흐스탄은 지난 1월 2일에 카자흐스탄 ‘양허법’ 및 ‘민관합작투자사업법’(이하 “PPP법”)이 개정하고 해외투자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정된 양허법 및 PPP법에 따라 양허계약의 경우 사업 대상의 투자금액 10%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며, 민간파트너는 민관합작투자사업(PPP) 대상의 투자금 20%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향후 PPP 계약을 수정하거나 해지하기 위한 추가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기관의 승인이 필요하며 공공파트너의 책임 분배와 관련된 내용을 변경하려면 국가예산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개정된 양허법에 따라 카자흐스탄 또는 카자흐스탄 정부를 대리하여 1개 이상의 정부 기관 또는 카자흐스탄 지방자치단체가 PPP의 공공파트너가 될 수 있다.

  2021년 7월 1일부터 시행되는 카자흐스탄 민사소송법 개정안에 따라 1심 투자분쟁 사건의 관할권이 기존의 누르술탄市 법원에서 특별경제법원으로 이전된다.   이번 개정에 따라 항소심은 누르술탄市 법원에서, 상고심은 대법원에서 심리한다.   현행 카자흐스탄 기업법은 ‘투자분쟁’을 기업의 투자 활동과 관련하여 투자자와 카자흐스탄 정부기관 간에 계약상 의무로 인하여 발생하는 분쟁으로 정의하고 있다.   투자 계약의 체결/조기 해지와 관련된 분쟁, 투자 계약에 따라 발생하는 조세, 관세, 환경 및 기타 투자자의 의무 또는 계약조건 준수 여부와 관련한 분쟁 등이 투자분쟁에 해당한다.   아울러 2021년 7월 1일부터 투자분쟁 관련 행정기관의 작위 및 부작위에 대한 불복절차는 기존의 일반법원(민사소송법)이 아닌 특별행정법원(행정소송법)에서 심리하게 된다.   이번 법개정으로 카자흐스탄 사법부는 투자자의 권리 보호와 공정한 재판을 위해 투자분쟁 사건에 대하여 3심제도를 적용하게 되었다.   법무법인(유) 율촌의 이화준 외국변호사는 현재 영국, 독일, 미국인 법률전문가로 구성된 카자흐스탄 대법원 산하 국제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러한 투자분쟁 해결 제도 도입에 관하여 카자흐스탄 사법부와 정부측에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법무법인 율촌 제공)

  2020년 12월 29일자 카자흐스탄 정부령 제908호에 따라 카자흐스탄 정부는 '2021-2025년 민영화 사업 계획'을 승인하였다.   특히 이번 민영화 사업에는 카자흐스탄 국유자산 중 대규모 수력발전소 2개(UstKamenogorsk Hydroelectric Power Plant 및 Shulbinsk Hydroelectric Power Plant)가 포함되었다.   카자흐스탄 재무부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6-2020년 민영화 사업 계획'은 90% 이상 실현되었으나 일부 민영화 사업은 경기 침체로 추진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법무법인 율촌 제공)

 독립국가연합인 CIS지역 동포 단체장들이  지난 20일,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이날 비대면 화상 간담회는 이 지역 동포사회의 주요 현안을 협의하고 애로사항을 청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 이번 간담회는 노성준 CIS한인회총연합회장, 조발실리 전러시아고려인연합회장을 비롯해 전, 현직 한인회장 및 각 지역의 고려인협회장 등 18명이 참가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전·현직 회장들은 ▲CIS 지역에 대한 지원 강화 ▲고려인 동포 한국어 교육 지원 ▲백신 접종자 등에 대한 자가격리 완화 ▲의료영사 파견 등을 동포재단에 요청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노성준 CIS한인회총연합회장은 “‘찾아가는 동포재단’이란 좋은 프로그램을 계기로 비대면이지만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는 것에 기쁘게 생각하며, 이번 간담회가 CIS 지역 동포사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김성곤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CIS 지역은 재외동포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지역으로 우리 한인들이 함께 교류하고 협력해 재외동포사회를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앞으로도 러시아·CIS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우리말을  못해서 통역을 통해서 화상 간담회에 참가한 고려인협회 의 일부 임원들 사이에서는 한인회장들과 별개로 각 지역 고려인협회장들 만을 대상으로 하는 간담회가 개최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한인일보)

  카자흐스탄에 한국형 스마트팜 시범 온실을 짓는 공사가 최근 시작되었다.   이 스마트팜 시범온실은 한국의 농업기술실용화재단과 카자흐스탄 국립농업대학교가 지난해 체결한 '한국형 스마트팜 시범온실 조성사업 업무협약(MOU)'에 따른 것이다.   이번에 착공한 시범온실은 적설량과 강우량이 많은 알마티 기후를 고려해 결로와 유수 유입을 방지하는 한국형 스마트팜 모델로 설계됐으며, 오는 10월 완공·가동될 예정이다.   재배작물로는 카자흐스탄 국민들의 식탁에 가장 많이 올라가는 야채인 토마토와 오이 그리고 현지 농가의 고부가가치 작목으로 떠오른 딸기 등이다.   또 시범온실은 카자흐스탄 국립농업대학교가 스마트팜 관련 작물의 생육모델 등을 실증하고 현지 대학생과 농업인이 한국의 스마트팜 기술을 배우고 활용하는 장소로 활용된다.   한편, 이번 시범온실 착공을 계기로 카자흐스탄에 한국의 스마트팜 기술과 시스템 수출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는 지난 21일(금), 카자흐스탄 KOICA 동창회의 코로나19 기부물품 증정식이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구홍석 주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 김 베라 하원의원, 사드코바 굴다나 KOICA 동창회장이 참석하였다.   구홍석 대사와 사드코바 KOICA 동창회장은 김 베라 하원의원이 이끌어온 국립자원봉사 네트워크에 4,000 미불 상당의 마스크, 방역복, 방역모, 정수기 등을 기부하였다.   이 물품들은 누르술탄시, 크즐오르다주, 카라간다주, 파블로다르주 병원 8곳에 전달될 예정이다.        구홍석 대사는 “금번 기부를 통해 현지 의료진들의 안전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한국은 카자흐스탄의 전략적 동반자로서 앞으로도 카자흐스탄의 코로나19 위기 극복에 기여하고, 양국간 우호협력 증진 방안을 지속 실천해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원장 이혜란)은 해외문화홍보원 50주년을 맞이하여, 5월 24일(월)부터 6월 11일(금)까지, 주재국민이 쉽게 접하기 힘든 ‘삼행시’를 활용하여 <온라인 삼행시 짓기 이벤트>를 개최한다.   이벤트 응모는 5월 24일(월)부터 6월 9일(수)까지 진행하며, 해외문화홍보원의 영문약자인 “코시스(KOCIS, 노어: ККИС)”와 “한국문화원(ККЦ)”을 활용하여 재치 있는 삼행시 또는 사행시를 응모하면 된다. 그 중 3개 작품을 선별하여 우수작으로 선정, 문화원 로고가 그려진 패션마스크와 마스크스트랩을 문화원 에코백에 동봉하여 증정할 예정이다. 더불어, 우수작을 제외한 응모자들을 대상으로 무작위 추첨을 통해 증정 예정인 경품들도 준비되어 있다. 최종 우수작 선정과 추첨 발표는 6월 11일(금)에 진행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는 전통문화 및 K-POP 등 한류콘텐츠 위주로 개최되던 기존 행사에서, 주재국민이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고 생활 속에서 응용이 가능함과 동시에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한국문화인 ‘삼행시’를 활용한 행사개최를 통해, 다양한 한국문화를 소개함과 동시에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 이혜란 원장은 “올해는 우리 해외문화홍보원이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그간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신 카자흐스탄 국민들이 있었기에, 우리 문화원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번 행사를 준비하였으니,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한국문화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2차 백신 접종을 완료한 사람들에게 일부 혜택을 주고 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지난 4월 말 승인된 규정에 따라, 2차 백신 접종을 마친 사람들은  PCR 검사서 없이 카자흐스탄에 입국할 수 있고, 2차 백신 접종을 마친 밀접접촉자는 자가격리 14일 의무에서 제외되나, 의료진의 관리 하에 있게 된다.   또한 백신 접종자가 입원할 경우, PCR 검사서를 별도로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카자흐스탄에서는 현재까지 260만 도즈 백신이 접종되었고, 1,871,823명이 1차 접종을, 778,346명이 2차 접종을 완료하였다. 1차분 50만 도즈, 2차분 75만 도즈로 백신은 충분히 구비되어있으며, 기존 스케줄에 맞춰 백신 접종이 진행될 것이라고 보건 당국은 밝혔다.   한편, 카라간다 제약 단지에서는 Sputnik V 120만 도즈 백신을 생산할 예정이다.

‘알지르’를 아십니까? 김상욱(민주평통자문회의 카자흐스탄지회장) 정치탄압 희생자의 날 오는 31일(월)은 ‘정치탄압 희생자의 날’이다. 이 날은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0년대 후반부터 10여년 동안 옛 소련에서 이루어진 소수민족들에 대한 강제이주와 스탈린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이 날은 CIS(독립국가연합) 고려인들 뿐만 아니라 독일, 크림 타타르, 쿠르드, 체첸 인 등 당시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모든 민족들에게도 특별히 의미가 있다. 가장 먼저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의 뒤를 이어 독일인, 크림타타르인, 쿠르드인, 체첸인 등이 차례로 강제이주라는 공통의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다.    ‘원동변강의 국경지역에서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이주시킬 데 대한’ 소련인민위원회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 (1937년 8월 21일부)이 나온 후 1937년 가을,  17만 2천여명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과 우스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 결정서는 몰로또브와 스탈린이 사인했고 일본을 위한 간첩행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예방책으로 이주를 시켰다고 적고 있다. 1937년 9월부터 1938년 초까지 모든 고려인들이 원동에서 강제이주 되었다. 이들 중 9만 8천명이 카자흐스탄으로 왔고, 우즈베키스탄으로 7만 4천명이 갔다. 당시, 고려인들에게 아무런 이유도, 가는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았고 불과 며칠 동안에 길 떠날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고려인들이 탄 화차는 이렇게 고향땅을 뒤로 하고 시베리아벌판을 지나 머나 먼 길을 달렸다. 당시 고려인들은 강제이주과정에서의 고통이나 낯선 중앙아시아에서 황무지를 일구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닦아야 하는 고난의 숙명보다는 자신과 공동체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다. 더불어, ‘강제이주’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이 같은 일이 우리 민족 앞에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할 수도 없었던 숨막히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고통은 가중되었다. ‘인민의 적’,  일제의 간첩행위를 한  ‘배신자’라는 딱지는 고려인들의 처지를 더 어렵게 하였다. 하루 아침에 ‘반역자’로 몰린 고려인들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알지르 수용소’ 는 어떤 곳이었나? 이 글이 ‘알지르를 아십니까?’ 라는 제목을 달고 고려인 강제이주와 당시 상황에 대해 먼저  설명한 이유는  ‘알지르’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강제이주’라는 역사의 한 단면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지르는 ‘Akmola Prison for Wives of Traitor’ 라는 내용의 러시아어 앞 글자들을 따서 불리게 된 명칭이다.   문을 연 1938년부터 폐쇄된 1953년까지 단지 스탈린 체제를 반대하는 남편을 두었다는 이유로  1만 7천여 명의 여성이 수용되었고,  이 가운데 고려인도 있었다. 알지르 수용소가 건설된 부지는 카자흐인 마을과 러시아계 주민들이 살던 7개 마을로부터 압수된 것이었고, 지역주민들의 일부 가축도 수용소의 필요에 의해 몰수를 당했다고 한다. 이곳의 구성원은  ‘조국의 배신자 가족’에 대해 5 년에서 10 년의 징역 또는 먼 지역으로의 추방’이라는 형태의 처벌을 받은 정치범의 부인들로 이루어졌다. 1950 년 초에 알지르 수용소는 폐쇄되었지만 이들은 1958 년까지 이전 거주지로 돌아갈 권리가 없었다. 당시 수감자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에 하나는 카자흐 대초원의 혹독한 기후였다. 여름에는 40 도의 더위와 모래바람, 모기와 벌레 겨울에는 영하 40 도까지 내려가는 혹한과 눈보라는 수감자들을 괴롭혔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수용소 한가운데는 갈대가 무성했는데 이 갈대는 겨울에는 막사를 데우는 땔감으로 사용되었고 여름에는 수용소 막사를 건축하는 재료로 흙과 함께 사용되었다. 노동교화소였던 알제르 수감자들은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과 소포 수령이 금지되었고 과거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는 음악가, 시인, 교사 등도 있었지만 농업이나 건설 현장의 보조로 일했고 병든 노약자와 아이들은 자수와 봉제 공장에서 일했다. 현재는 알지르 박물관이 들어서 있는데, 형체가 없어진 수용소 일부에 정치탄압과 전체주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위해 2007년 5월 31일 (정치탄압 희생자의 날)에 개관하였다. 특히, 박물관 외부에는 1937년 당시 고려인들이 타고 왔던 화차가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다. 알지르는 카자흐스탄의 수도 누르술탄에서 교외로 차를 타고 약 30분을 달리면 갈 수 있고 2013년에 제막된 고려인 정치탄압 희생자 추모비를 볼 수 있다. 추모비는 주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관과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가 스탈린 정권시대의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가혹한 고문, 폭행과 강제노역, 혹독한 기후, 열악한 환경에 의해 희생을 당한 이들에게 영면을 빌고, 다양한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 인권이 존중받는 세상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독일,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등 6개국이 이미 자국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를 설립한 데 이어 일곱번째로 건립된 한국의 추모비 제막식 행사에는 독립유공자 황운정의 딸, 고 황 라이사 운정예브나(당시 93세)가 참석하여 부친인 황운정 선생이 카라간다 강제노동수용소 ‘카를락’에 수감되었으며, 친척 중 한 분이 알지르 수용소에서 희생을 당한 사연을 말해 분위기를 숙연케 했었다. 요컨대, 다가오는 정치탄압 희생자의 날(5월 31일)을 앞두고 정치적 낙인과 가혹행위에 의해 고통과 희생을 당하는 이들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하고 80여년 전, 폭력과 전쟁으로만 문제를 해결할려고 했던 야만의 시기에 희생당한 모든 이들의 넋을 다시 한번 기리면서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 한국인들의 행렬이 카자흐스탄 ‘알지르’에도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카자흐 초원의  변화… 러시아가 요인  지난호(9회)에는 카자흐칸국의 성립과 러시아의 등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15세기 중반, 모태인 킵차크 칸국이라는 중앙권력의 약화와 동시에 진행된 지방정권(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카잔 칸국, 시비리 칸국, 카자흐 칸국 등의 난립)들의 탄생은 곧, 이들간에 중앙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경쟁으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여러 칸국들이 러시아로  병합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이는  러시아의 동진을  의미했고 러시아는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까지 닿았고, 남으로는 카자흐 초원과  과거 실크로드 오아시스  도시들까지 그  영향권에 넣었다.  바야흐로  러시아가 청나라와  함께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대륙을 양분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번 호에는  본격적인  현대사를 살피기 전에 현대사 서술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카자흐 초원과  마 와라  알 나흐르 지역(현재의 우즈벡키스탄을  이루는 지역)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도 우즈벡과  카자흐의  성립과 러시아 혁명기, 그리고 소련시절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는 반면  현대사 전개의  토대가  되었던 카자흐 초원과  우즈벡 지역의  변화에 대해서는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화의 진전과 카자흐 지식 엘리트의 등장 카자흐초원에서 일어난  변화의 요인은 바로 '러시아'라고  하는 요소이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카자흐초원의  유목사회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과거에는  초원에서의  변화와  권력변동이 서쪽으로  영향을 끼쳤다면 이 시기부터는  서쪽의  변화로 인해  카자흐 초원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슬람화의  진전이다.  독자들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0세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사실, 카라한조(10세기) 때  중앙아시아가  이슬람교가 도입되었으나  지배층 사이에서만  신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같은 민족 계통인 타타르인들을  활용하기로 한 러시아 정부의 정책에 따라 타타르인들이  카자흐초원을 누비면서 교역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카자흐 유목사회에도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산 잡화를 제공하고  모피나 가축을  대량으로 사가는 교역활동을  통해 부를 모으는  한편, 지방 곳곳에 모스크나  마드라사를 세웠다. 실로, 19세기 동안  많은 카자흐인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두번째 변화는 카자흐 지식 엘리트들의 성장을 꼽을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바이 꾸난바예프, 발리하노프, 알튼사린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타타르인들을 통해 유목민들을 통치하는 기존의 방법에서 다소 정책변경을 시도했다. 타타르인 행정관이나  통역관의 수를  줄이고  카자흐 문어를  육성하고  카자흐인들의  문화적 자립을  고무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결과로써  19세기  후반에 카자흐 지식인  1세대가  탄생하고  이후 카자흐 민족주의자와  연결되는 조류가  탄생했다 아바이 쿠난바예프는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카자흐인을  계몽시킬려고  애썼다. 카자흐스탄의 경제수도 알마티의 시내에  있는 공화국 궁전  광장에는 아바이 동상이 자신의  이름을 딴 '아바이'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또한 작년 아바이 탄생  175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행사들이 펼쳐졌는데, 카자흐스탄국립고려극장도 기념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그가  남긴 작품집이 세계 각국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카자흐스탄 정부 관계자는 «아바이의 작품들을 접하면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의 정신세계와 지적 유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발리하노프는  러시아식  교육을 받아  육군 특무장교가  되고  그 뒤  동양학 연구자로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그는 카자흐문화를 이슬람  문명의 영향에서  지켜내고 러시아와  서구 문명을  수용하여 카자흐를  문명화시키려 했다.  알튼사린은 카자흐  문어확립에 공헌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러시아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카자흐인의 자립과  발전을  실현하려  했고 러시아  통치가 선사한  카자흐 초원의  재통일이라는 조건을  활용하여 대, 중, 소  쥬즈로 나눠어서  부족에 대한  강한 귀속  의식으로 분열과 갈등을 종식시키고  카자흐의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민족 통합을  이루려고 구상했다.   마지막  변화는  카자흐초원의 인구구성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19세기 말(1890년)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초원에  들어와  살기시작하였다.  1860년  농노해방 후  수많은  농민들이 유럽쪽  러시아에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이 때  이주한 사람은  대략 650만명  정도였고 이들의  35%  정도가  카자흐 초원으로 이주했다고 추정된다.  다민족 국가인 카자흐스탄은 2차대전 전후 사회상황에  영향 받은 바  크지만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우즈벡 지역의  변화 마 나와 알 나흐르지역(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하는 지역) 지역은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코칸드 칸국으로  나뉘어져서 20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킵차크칸국에서  떨어져 나와  현재 우즈벡키스탄의  원형을  만들었던 우즈베크 유목집단이 세운 샤이바니조는 1599년에  멸망하고 징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의 후예인  잔조(아스트라한조라고도 한다) 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 왕조  역시 전대와  마찬가지로 부하라에  수도를  두고  통치했고 부하라 칸국으로  통칭되었다  히바칸국은  16세기 초  주치의 다섯째 아들 샤이반의  후예인 일바르스가  아무다리아 강  하류의 히바지방(호라즘)에 세운  왕조이다. 쿵그라트부족이 세운  히바칸국은 1920년  소련에 통합될 때까지  호라즘을  지배했다  또한  타쉬켄트와 페르가나 지방에서는  17세기 말기부터  우즈베크와 카자흐  집단의 갈등을  틈타 '호자'라고  불리는 실권자들이 사실상의 통치를 하였다. 이런  와중에 페르가나 지방을  중심으로 우즈베크집단의  한 지파인  밍부족이  '호자' 세력을  타도하고  코칸드 칸국을 세웠다. 이들은  동쪽으로 청나라와  서쪽으로는  타쉬켄트를 통해 카자흐  초원이나 러시아와  교역을  하면서 발전했다. 이들  세 칸국을 세웠던  망기트  쿵그라트,  밍 부족은  과거와는 달리 이미 칭기스칸의  혈통을  과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신  이슬람의  권위를 이용했다. 이들은 카자흐초원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짐에 따라  이슬람의  맹주인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과  우호관계를 체결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국내에 할거한  우즈베크,  투르크멘,  키르기스  뮤목민의  저항을 근절시키지 못했으며  세 칸국 사이의  갈등과 항쟁은  러시아군의  침공에  직면해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