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기획특집[기획 시리즈 – 10]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기획 시리즈 – 10]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카자흐 초원의  변화… 러시아가 요인 

지난호(9회)에는 카자흐칸국의 성립과 러시아의 등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15세기 중반, 모태인 킵차크 칸국이라는 중앙권력의 약화와 동시에 진행된 지방정권(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카잔 칸국, 시비리 칸국, 카자흐 칸국 등의 난립)들의 탄생은 곧, 이들간에 중앙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경쟁으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여러 칸국들이 러시아로  병합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이는  러시아의 동진을  의미했고 러시아는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까지 닿았고, 남으로는 카자흐 초원과  과거 실크로드 오아시스  도시들까지 그  영향권에 넣었다.  바야흐로  러시아가 청나라와  함께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대륙을 양분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번 호에는  본격적인  현대사를 살피기 전에 현대사 서술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카자흐 초원과  마 와라  알 나흐르 지역(현재의 우즈벡키스탄을  이루는 지역)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도 우즈벡과  카자흐의  성립과 러시아 혁명기, 그리고 소련시절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는 반면  현대사 전개의  토대가  되었던 카자흐 초원과  우즈벡 지역의  변화에 대해서는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화의 진전과 카자흐 지식 엘리트의 등장

카자흐초원에서 일어난  변화의 요인은 바로 ‘러시아’라고  하는 요소이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카자흐초원의  유목사회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과거에는  초원에서의  변화와  권력변동이 서쪽으로  영향을 끼쳤다면 이 시기부터는  서쪽의  변화로 인해  카자흐 초원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슬람화의  진전이다.  독자들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0세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사실, 카라한조(10세기) 때  중앙아시아가  이슬람교가 도입되었으나  지배층 사이에서만  신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같은 민족 계통인 타타르인들을  활용하기로 한 러시아 정부의 정책에 따라 타타르인들이  카자흐초원을 누비면서 교역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카자흐 유목사회에도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산 잡화를 제공하고  모피나 가축을  대량으로 사가는 교역활동을  통해 부를 모으는  한편, 지방 곳곳에 모스크나  마드라사를 세웠다. 실로, 19세기 동안  많은 카자흐인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두번째 변화는 카자흐 지식 엘리트들의 성장을 꼽을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바이 꾸난바예프, 발리하노프, 알튼사린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타타르인들을 통해 유목민들을 통치하는 기존의 방법에서 다소 정책변경을 시도했다. 타타르인 행정관이나  통역관의 수를  줄이고  카자흐 문어를  육성하고  카자흐인들의  문화적 자립을  고무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결과로써  19세기  후반에 카자흐 지식인  1세대가  탄생하고  이후 카자흐 민족주의자와  연결되는 조류가  탄생했다

아바이 쿠난바예프는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카자흐인을  계몽시킬려고  애썼다. 카자흐스탄의 경제수도 알마티의 시내에  있는 공화국 궁전  광장에는 아바이 동상이 자신의  이름을 딴 ‘아바이’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또한 작년 아바이 탄생  175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행사들이 펼쳐졌는데, 카자흐스탄국립고려극장도 기념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그가  남긴 작품집이 세계 각국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카자흐스탄 정부 관계자는 «아바이의 작품들을 접하면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의 정신세계와 지적 유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발리하노프는  러시아식  교육을 받아  육군 특무장교가  되고  그 뒤  동양학 연구자로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그는 카자흐문화를 이슬람  문명의 영향에서  지켜내고 러시아와  서구 문명을  수용하여 카자흐를  문명화시키려 했다.  알튼사린은 카자흐  문어확립에 공헌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러시아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카자흐인의 자립과  발전을  실현하려  했고 러시아  통치가 선사한  카자흐 초원의  재통일이라는 조건을  활용하여 대, 중, 소  쥬즈로 나눠어서  부족에 대한  강한 귀속  의식으로 분열과 갈등을 종식시키고  카자흐의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민족 통합을  이루려고 구상했다.  

마지막  변화는  카자흐초원의 인구구성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19세기 말(1890년)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초원에  들어와  살기시작하였다.  1860년  농노해방 후  수많은  농민들이 유럽쪽  러시아에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이 때  이주한 사람은  대략 650만명  정도였고 이들의  35%  정도가  카자흐 초원으로 이주했다고 추정된다.  다민족 국가인 카자흐스탄은 2차대전 전후 사회상황에  영향 받은 바  크지만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우즈벡 지역의  변화

마 나와 알 나흐르지역(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하는 지역) 지역은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코칸드 칸국으로  나뉘어져서 20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킵차크칸국에서  떨어져 나와  현재 우즈벡키스탄의  원형을  만들었던 우즈베크 유목집단이 세운 샤이바니조는 1599년에  멸망하고 징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의 후예인  잔조(아스트라한조라고도 한다) 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 왕조  역시 전대와  마찬가지로 부하라에  수도를  두고  통치했고 부하라 칸국으로  통칭되었다 

히바칸국은  16세기 초  주치의 다섯째 아들 샤이반의  후예인 일바르스가  아무다리아 강  하류의 히바지방(호라즘)에 세운  왕조이다. 쿵그라트부족이 세운  히바칸국은 1920년  소련에 통합될 때까지  호라즘을  지배했다 

또한  타쉬켄트와 페르가나 지방에서는  17세기 말기부터  우즈베크와 카자흐  집단의 갈등을  틈타 ‘호자’라고  불리는 실권자들이 사실상의 통치를 하였다. 이런  와중에 페르가나 지방을  중심으로 우즈베크집단의  한 지파인  밍부족이  ‘호자’ 세력을  타도하고  코칸드 칸국을 세웠다. 이들은  동쪽으로 청나라와  서쪽으로는  타쉬켄트를 통해 카자흐  초원이나 러시아와  교역을  하면서 발전했다.

이들  세 칸국을 세웠던  망기트  쿵그라트,  밍 부족은  과거와는 달리 이미 칭기스칸의  혈통을  과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신  이슬람의  권위를 이용했다. 이들은 카자흐초원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짐에 따라  이슬람의  맹주인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과  우호관계를 체결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국내에 할거한  우즈베크,  투르크멘,  키르기스  뮤목민의  저항을 근절시키지 못했으며  세 칸국 사이의  갈등과 항쟁은  러시아군의  침공에  직면해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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