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2023 (Page 25)

카자흐텔레콤 광고화면카자흐스탄은 아직 러시아와 같은 국제전화코드(+7)를 사용하고 있다. [카자흐텔레콤 홈페이지 화면캡처. 재판매 및 DB금지](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카자흐스탄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러시아 국제전화 코드(+7) 대신 자체 코드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요청했다고 카진포름통신이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바그다트 무신 카자흐스탄 디지털개발·혁신 및 항공우주산업부 장관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현행 '+7' 대신 '+77'을 할당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이에 ITU 측은 "카자흐스탄에 이미 할당된 코드인 '+997'로 변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면서 "신규 코드(+77) 요청에 대해서는 회의를 열고 논의하겠다"고 답변했다.카자흐스탄은 지금까지 러시아의 국제전화 코드를 사용해 왔으며 2021년부터 자체 코드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almatykim67@yna.co.kr

"더 나은 모습으로 알마티에서 다시 만나요"(알마티=한인일보) = 지난 3월17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 중심에 위치한 콘서트장.알마티 현지 한류팬들은 검은 선글래스를 끼고 무대에 오른 한 뮤지션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아이돌그룹의 해외 콘서트 현장 같았다. 콘서트 내내 환호성은 이어졌고 해당 뮤지션의 이름을 자신의 휴대폰 화면에 띄우거나 직접 손으로 쓴 피켓을 들고 나온 팬들도 있었다.그의 무대에는 통역도 함께 섰다. 노래 한 곡이 끝나고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직전 그는 자신이 부를 노래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싱어송라이터인 그는 자신이 직접 쓴 노래말과 곡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해주었다. 1층 홀은 물론이고 2층까지 꽉 찬 관객들은 휴대폰으로 그를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담기 위해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했다. 어떤 팬은 카자흐 전통 모자를 그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또 어떤 팬은 꽃다발을 그에게 선물로 안겨주었다.그가 빅토르 최의 '뻐꾸기'를 부르자 팬들이 함께 떼창을 부르기도 했다. 그의 친구인 카자흐스탄의 인기 가수 미라스와 함께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바로 싱어송라이터 송원섭(36)의 카자흐스탄 공연 현장의 모습이다.공연장 대기실에서 만난 그는 마침 현지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카자흐 통역을 통해 진행된 인터뷰였다. 그는 경쾌함과 미소를 잃지 않고 여성 리포터의 질문에 성심껏 대답해 주었다.인터뷰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어권에서 인기가 높은 비결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우연히 러시아 유튜브 영상을 보고 댓글을 달고, 러시아 곡을 커버했더니 며칠 만에 구독자가 갑자기 늘어나는 경험을 했어요.”면서 “몇 년 전에 홍대에서 술 마시다가 10만 러시아 유튜버를 알게 됐어요. 내가 찍은 영상이 그 친구 채널에 소개되고 내가 거기에 댓글을 달기도 했죠. 리액션 컨텐츠를 하라는 얘기를 그 친구로 부터 들었구요. 결국, 유튜브를 통한 저의 이런 활동 때문에 러시아어권에서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2019년 모스크바 콘서트를 하게 되었고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지만 올해 이렇게 카자흐스탄 콘서트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나는 카자흐스탄의 한류팬들이 무척 많은데, 그 중에는 고려인 젊은이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오늘의 인터뷰도 알마티 콘서트 계획을 미리 안 고려인 팬들의 성화에 못이겨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사실이었다. 카자흐스탄 투어 계획이 세워지자 마자 현지의 팬들은 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했고, 그런 요구는 나로 하여금 가수 송원섭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게 만들었다.때마침, 러시아의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카자흐스탄의 현지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방영되었는데 그 다큐에서 빅토르 최의 노래를 러시아어로 부르는 그가 나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3년 전 쯤에 한국 문화에 대해 영상을 찍으러 온 러시아 PD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 때 러시아어 노래를 불러보라는 제안을 받고 찍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최의 노래를 ‘꾸꾸쉬까(뻐꾸기)’ 를 비롯해  6곡 정도를 불렀어요.”많은 러시아 가수들이 있고 인기있는 러시아 노래가 많은데, 왜 빅토르 최의 노래를 불렀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빅토르 최에 대해서 예전에는 전혀 몰랐어요. 그러나 빅토르 최가 당시 러시아 사회 분위기를 대변한 가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의 노래에 관심이 갔어요.  특히, 한국어로 번역해서 부르기 보다는 러시아어 원어 그대로 부르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비록 러시아어를 모르지만 배워가면서 그의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면서 가사를 음미한 후에  제가 스스로 만족스러울 때 비로소 노래를 불렀지요. 그리고 그의 노래를 제가 창의적으로 편곡을 해서 부르기도 했어요”사실, 빅토르 최를 ‘러시아 록음악의 전설’이라는 단어로만 소개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추진했던 소련의 개혁정책이 한창이던 80년대 후반, 그는 그 당시 봇물처럼 터져나오던 변화와 개혁이라는 사회분위기를 온 몸으로 표현한 인물이었다. 그 자체가 바로 문화현상이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90년대를 대표했던 서태지와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그는 1962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카자흐스탄 출신의 고려인 2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이 흘러내려 만든 거대한 시르다리야강을 보면서 자랐다.  이 강물을 끌여들여 벼농사를 성공시킨 할아버지 세대들의 땀방울을 보면서 그는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최는 19세 때 록 그룹 '키노'(Kino)를 결성해 약 9년 동안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쳤다. 러시아 특유의 선율에 소련의 압제적 분위기에 맞서는 저항과 자유의 메시지를 담은 그의 음악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최는 일약 소련 록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혈액형’  ‘마지막 영웅’  ‘변화’ 등 수많은 히트곡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러시아 음악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인기 절정에 있던 그는 1990년 8월 순회공연차 들른 라트비아 리가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2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공식 사고 원인은 졸음운전으로 발표됐으나 일각에선 타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8월 15일 되면 지금도 그와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이 알마티의 아르바트 거리에 모여 그를 추모하는 추모공연이 열린다.우리는 이렇게 빅토르 최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10여분의 시간을 보냈다. 잠시 잊고 있던 인터뷰어의 신분을 깨닫고 인간 송원섭과 그의 카자흐스탄 콘서트에 대해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다.ㅇ. 아스타나, 침켄트에서 이어 알마티에서 카자흐스탄 투어의 마무리 공연을 앞두고 있는데 이전 공연은 어땠나?  “아스타나와 침켄트 콘서트를 성황리에 잘 마쳤어요.  아스타나의 경우 음향시설이 대중음악을 공연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만족스러운 공연을 했고 침켄트 공연도 잘 마쳤어요. ”ㅇ. 카자흐스탄에 대한 인상은?“가수 입장에서는 이번 카자흐스탄 콘서트가 처음이다 보니까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담이 많이 되었어요. 그런데 카자흐스탄 투어가 잘 시작되었고 성황리에 마무리되니까 이제는 마음이 매우 편해졌어요.  이번 투어를 통해서 느낀 점은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마음이 매우 따뜻하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아티스트로 왔기 때문에 잘해주는 것일 수 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감정으로 저를 대해주셨어요.  전혀 불편한 것이 없었어요.  제가 많은 사람을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카자흐 사람들은 마음이 열려있고 순수한 것 같습니다.”ㅇ. 카자흐스탄에서는 고려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한국과 카자흐스탄의 정치, 경제, 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큰 활동하고 있어요. 해외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신문인 ‘고려일보’와 ‘고려극장’을 유지하면서 우리 전통문화와 풍습을 지켜나가고 있어요. 특히,  올해는 고려일보창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죠. 혹시 고려인 동포들은 만나보셨어요?“솔직히 저는 고려인에 대해서 예전에는 몰랐어요. 그러나 고려인 가수를 만나서 친구가 되었고 그 이후에 제 스스로 고려인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죠. 강제이주라는 아픈 역사가 있잖아요. 저 뿐만 아니라 한국사람들은 고려인 동포들에 대해서는 감싸 안아주고 싶어해요.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제가 러시아어를 잘 할 수 없어서 동포들에게 제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고, 그들의 사연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에요”ㅇ. 카자흐스탄 팬과 러시아팬들과 차이가 있다면?“단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는 것 같구요, 아스타나에서 공연할 때 제가 느낀 것은 제 공연에 오신 분들의 연령대가 다양했어요.   어머니가 좋아해서 딸을 데리고 온 경우도 있었어요. 모스크바 공연 때는 젊은 팬들이 많았는데, 이 점이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나이 많으신 분이 오는 이유는 30여년 전 인기 가수였던 빅토르 최 노래를 제가 편곡해서 부르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ㅇ. 모스크바 콘서트는 어떻게 성사가 된 것인지요?“사실 저는 러시아와 인연이 많지 않아요.  모스크바는 지금까지 두 번 밖에 못가봤거든요. 그런데 몇 년 전에 러시아 팬들이 자신들이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 모스크바에서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 왔습니다.  버디야라는 러시아의 100만 유튜버도 자기도 모스크바에 가니까 꼭 오라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래서 항공료만 내가 부담해서 모스크바로 떠났고, 나머지 숙박과 공연장 섭외는 그쪽에서 다 알아서 해줬어요. 그게 2019년이었습니다.”ㅇ. 가수 송원섭이 오늘이 있기 전에는 최고의 트럼보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구요?“네, 사실 저는 노래를 잘 하면 것으로도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고등학교때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학 시험도 다 떨어졌어요. 그 시절 친구집에 놀라갔다가 기타 소리에 반해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ㅇ. 처음 꿈은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이었군요?“네, 당장 짚 앞 기타학원에 등록하고 배우기 시작했어요. 제가 태어나서 뭔가에 처음으로 몰입했던 시기였습니다. 얼마나 기타 빠졌는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기타학원에서 살았어요. 그때 제 나이가 20살,  21살 무렵이었죠.  푹 빠지니까 제가 느끼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실력이 늘었고 그때 제 꿈이 최고의 기타리스트였습니다.”ㅇ. 그런데 왜 진로를 바꾸게 되었어요?“21살 때였어요. 친구들이 하나둘씩 군대를 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저는 군악대를 가고 싶었죠.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기타가 아니라 트럼본으로 군악대에 갈 기회가 온 것입니다. 역시 저는 미친듯이 연습을 했고, 실력을 키워 결국 주변의 인정은 물론이고 원하던 대학에도 트럼본 전공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틈틈히 제 곡을 만들기도 했고 세계적인 트럼보니스트의 연주 시디를 사서 연습을 열중한 결과 방송출연 제의도 받게 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저의 트럼본 연주를 들어본 선배들의 추천으로 가수 윤도현씨가 진행하던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죠. ‘나가수’라는 프로에 나가기도 했지요.  당시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는데, 이때까지는 제 꿈은 최고의 트럼보니스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잦아지던 무렵 제 노래를 들은 선배 형으로부터 노래를 한번 불러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이후 연주자가 아닌 가수로서 활동할 기회가 생겼어요.그러나 가수로서의 삶은 힘든 일의 연속이었어요.  가수의 길이 쉽지 않다는 걸 미처 몰랐던 것이지요. 그 무렵  2018년 새해 첫날 저는 한가지 다짐을 했어요. 영어공부를 해보자 결심을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러시아 친구가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다.”ㅇ. 비록 꿈은 바뀌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집중력이 대단했고 또 타고난 소질이 아니라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왔다는 걸 느낄 수 있네요.  현재의 꿈은 무엇인지요?“저는 현재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서  더 유명해지고 싶진 않아요. 제가 노래를 한 곡 했는데,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니까 저도 보답해주고 싶다는 생각 뿐이에요.  누가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잘해주고 싶잖아요.  그래서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유튜버 방송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이에요. 하다보면 언젠가는 보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이번 콘서트도 수익금은 전액 카자흐스탄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결정하진 못했습니다만 가능하다면, 카자흐스탄의 어린이를 한국에서 데려와서 치료를 해준다거나, 아니면 고아원을 돕고 싶어요.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당신의 노래 때문에 힘을 얻고 있어요>  이것은 인터뷰 중인 지금 방금 들어온 유튜브 댓글이에요.  저는 저의 노래와 공연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은 게 저의 꿈입니다”ㅇ. 선한 영향력 끼치고 싶다는 꿈…  참 인상적입니다. 그 꿈이 실현되길 저도 기원하겠구요.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 해야 할 것 같은데, 카자흐스탄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다음달 (4월)에 다시 한번 알마티를 방문할 계획입니다. 카자흐 친구 가수의 초청으로 와서 합동공연을 할 예정인데요, 좀 더 나은 모습, 좀 더 준비된 곡으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ㅇ.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주재국 봄 맞이 최대 명절‘나우르즈’행사 개최 (3.17.)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원장 이혜란)은 3월 17일(금) 16시 수도 아스타나 시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에서 주재국 최대 봄 명절‘나우르즈’를 맞이하여 한국 문화 행사를 개최하였다.  한국문화원은 작년에 이어 지속되는‘한-카 상호문화 교류의 해’를 맞이하여, 양국이 다양한 문화 행사를 통해 서로 알아가고 가까워지며,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카자흐 봄맞이 행사를 기획하였다.  이번

  (서울=연합뉴스) 김동찬 기자 = 한나래(126위·이하 복식 랭킹·부천시청)-장수정(107위·대구시청) 조가 국제테니스연맹(ITF) 비TV 여자오픈(총상금 4만 달러) 복식에서 준우승했다.  한나래-장수정 조는 4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대회 6일째 복식 결승에서 안나 다닐리나(26위·카자흐스탄)-이리나 시마노비치(167위·러시아) 조에 1-2(4-6 7-6<10-8> 7-10)로 졌다.  한나래-장수정 조는 2세트 타이브레이크에서 매치 포인트 위기를 넘기고 승부를 3세트로 이어갔다.  매치 타이브레이크로 진행된 3세트에서 한나래-장수정 조는 초반 3-1로 앞섰지만 이후 연달아 5실점 하며 승기를 내줬다.  한나래와 장수정은 6일부터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ITF 비TV 여자오픈 2차 대회(총상금 6만 달러)에 나간다.

  (알마티=한인일보) 2월 1일 현재 카자흐스탄 인구는 1천978만8천254명이라고 바이게뉴스가 카자흐스탄 통계청의 최신 인구통계를 인용해 2일 보도했다.  이 중 도시인구는 1천222만7천458명이고 농촌인구는 756만796명이다.  965만8천685명의 남성과 1천12만9천569명의 여성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1월 기준 카자흐스탄 서부 망기스타우(인구 1천명당 27.75명), 투르키스탄(27.23명), 쉼켄트(26.34명) 지역에서 출생률이 가장 높았다.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은 카자흐스탄 정부 관계자와 현지에 주재하는 외교단을 초청해 한국문화 체험행사를 진행했다고 4일 밝혔다.  '2023 한-카자흐 상호 문화교류의 해'를 계기로 마련된 이 행사에는 카자흐 외교부 관계자와 국제기구 및 외교단 대사 내외 등 총 35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복을 입고 한국 전통 놀이와 연꽃 연등 만들기, 연꽃차 시음, 김밥 말기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문화를 체험했다.  이혜란 한국문화원장은 "최근 K-콘텐츠 열풍에 따라 카자흐 내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클래식과 순수예술 K-아트 등으로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며 "이런 현지 수요와 상황을 고려해 다양한 한국문화행사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almatykim67@yna.co.kr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사브가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약 두 달 만에 다시 만나 비공식 정상회담을 가졌다.  카자흐스탄 대통령궁은 4일(현지시간) 토카예프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과의 국경 지역에 있는 카자흐스탄 제2 도시 침켄트에서 마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 회담을 했다고 발표했다.  대통령궁에 따르면 양국 대통령은 비공식 회담에서 상호 신뢰와 우호, 선린의 정신으로 양국 간 동맹관계 강화를 위한 현재 상태와 전망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양국 정상은 또 지난해 12월 토카예프 대통령의 우즈벡 국빈방문 시 합의한 내용에 대한 이행 여부를 점검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양국 간 경제 협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산업·에너지·농업·운수·물류 분야의 상호 교역 확대와 투자 유치, 협력 발전 전망에 대해 논의했다.또한 두 정상은 우크라이나 사태 후 불안정해진 역내 지정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  이에 앞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옛 소련이었던 중앙아시아 5개국 외교장관과 일대일 회담을 한 후 우즈베키스탄도 방문했다.블링컨 장관은 이 순방에서 우크라이나가 흔들리면 중앙아시아 등 옛 소련 국가에서 러시아가 더 대담한 짓을 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러시아의 서방 제재 회피를 돕지 말라고 촉구한 바 있다.almatykim67@yna.co.kr

  2022년 3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서방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시작되었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 때 내려진 대러시아 경제 제재는 금융서비스와 주요 러시아 경제인, 관료, 정치인 등이 그 대상이었고 전략물자 수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러시아 내수 시장의 잠재력 덕분에 제재의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러시아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크진 않았다.  이와 달리 2022년 3월의 대러시아 제재는 서방으로부터 러시아 사회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국제은행결제망 SWIFT에서 러시아 금융기관 대부분이 차단되었고, 러시아 물품의 수입 금지 및 러시아에서의 서방 기업의 경제활동 역시 중단됐다. 국제은행결제망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업활동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미국과 EU의 러시아 경제 제재는 2014년의 제재와는 달리 효과를 보이는 듯했다.  소련 붕괴로 이념에서 벗어난 러시아 사회를 상징하던 맥도날드가 러시아에서 철수했고, 러시아인들이 사랑했던 애플의 상품과 온라인 서비스도 러시아 시장에서 사라졌다. 아디다스, 나이키, 이케아, 유니클로 등 서방 상품들도 마찬가지였다.  생필품, 유통망, 식품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사라진 서방의 주요 상품 중 하나가 자동차다. 러시아의 부유층들이 즐겨 탔던 독일 자동차와 중산층에게 인기 있었던 기아와 현대 차동차가 러시아 시장에서 사라졌다.  2018년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한국은 가장 높은 점유율을 기록했다. 201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외곽에 15만평 규모의 생산 공장을 설립한 현대 자동차의 투자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연간 20만대 이상을 생산하고 판매했던 기아와 현대 자동차는 2022년 경제 제재와 함께 러시아 시장에서 급속도로 사라졌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러시아 소비자들은 낯선 자동차 카탈로그를 살피고 있었다. 모든 서방 기업의 자동차 생산과 수입이 금지되었고 현재 러시아에는 중국 자동차만 수입되고 있다.  2023년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러시아 시장에 쏟아낸 자동차 상표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창안자동차(Changan), 체리(Chery, Exeed, OMODA, Jetour), 이치(FAW), 장화이(JAC) (DFM), 광저우자동차(GAC), 지리(Geely, Livan), 만리장성(Great Wall, Skywell, Tank, Haval), 홍치(Hongqi), 둥펑자동차(Voyah) 등 중국 자동차의 물결이라고 할 정도이다.  불과 2년 전인 2021년에 Haval, Chery, Geely, Changan 같은 중국 자동차 브랜드가 러시아 시장에 판매한 차량은 총 8만 대가 되지 않았다. 같은 해 기아와 현대가 30만 대를 팔아 한국은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최대 판매국이었다. 2018년 러시아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의 점유율이 2%대였음을 고려하면 러시아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가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2022년 중국 자동차가 러시아 시장에서 30%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한 것은 러시아 경제 제재 때문이었다.  중국 자동차 기업들은 독자 브랜드로 러시아 시장에 진출할 뿐 아니라 러시아 자동차 기업에서 합작 형태로도 생산하기 때문에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는 1년 만에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대로라면 2023년 중국 자동차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40%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021년 러시아 냉장고, 세탁기 시장에서 판매 대수와 판매량에서 1위는 LG였지만 2022년은 중국 하이얼이 1위를 차지했고, 2023년 러시아 시장에서 한국산 생활 가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일본과 유럽의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을 떠났을 때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 경제 제재를 기회로 한국 기업들의 자리를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한번 잃은 시장을 되찾는 것은 새롭게 개척하기보다 더 어렵다.  중국이 해외 인터넷으로부터 자국민을 차단했다면, 러시아인들을 고립시킨 건 미국이었다. 서방 기업이 러시아에서 활동하지 않으면서 러시아 정부의 통제를 받는 정보통신 회사들이 등장했고, 러시아 내의 반전(反戰) 움직임이나 양심 있는 언론인들의 언로가 막혀 버렸다.  2023년 현재 러시아 경제는 어떠한 혼란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상점의 매대에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생산된 소비재, 공산품이 부족함 없이 진열되어 있다. 러시아인들은 애플과 맥도날드, 기아-현대와 LG, 삼성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전쟁을 유리하게 끝내려 했던 미국의 전략은 실패했고, 오히려 경제 제재의 대가는 기업이 치르고 있다. 그 어느 국가보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이 경제 제재로 얻는 가치와 이익은 무엇일까?  1853년 크림전쟁에서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이 1904년 2월 러일전쟁까지 이어졌고 이 세계적 대립 속에서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기도 했다. 새로운 냉전의 장막 앞에서 다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김상욱고려문화원장해마다 3월 초가 되면 카자흐스탄의 꽃가게들은 대목을 맞이한다.  ‘세계여성의 날(3월8일)’을 맞아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딸과 직장 동료들에게 선물할 꽃을 사기 위한 남성 손님들로 붐비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공휴일인 8일보다 하루 전날에 여성 동료들에게 꽃을 선물하고 부서마다 작은 파티를 열어 여성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가정에서는 남성들이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다.20세기 초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불타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미국 노동자들이 궐기한 날에서 유래되어 1975년 UN이 3월 8일을 공식적으로 '여성의 날'로 지정했다. 구소련국가들에서는 이날을 공휴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는데 봄맞이 축제의 성격도 겸하면서 대대적으로 경축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처음으로 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시작되어 1945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조선총독부가 딱히 명분이 없어 탄압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일제로 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는 이 날이 공개적으로 기념되지 못했다. 역대 정권이 이 날을 사회주의 영향하에 탄생된 것으로 여겼고 또한 여성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들어 한국이 민주화되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행사를 치룰 수 있게 되었고 2018년에 비로소 '여성의 날'이 법정 기념일이 되었다. 한국사회가 여성의 인권과 권리에 대해 얼마나 둔감한 가부장적인 사회였는지를 반증해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녀평등이 실현되었고 특히나 한 자녀를 둔 가정의 증가로 인해 아들 딸 구분없이 모두 다 귀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의 일부 영역에서는 여전히 여성차별과 혐오가 있고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사노동에 대해 공적영역에서 전면적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전환이 아쉽다.펠르랭과 김 알렉산드라 빼뜨로브나2012년 프랑스에서 장관이 된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펠르랭. 한국 이름은 김종숙이며, 태어난지 3~4일만에 서울의 길거리에 버려졌다가 고아원에 들어갔고 생후 6개월때 프랑스로 입양되었다.2012년 중소기업·디지털경제 담당장관으로 입각했다. 이후 통상국무장관을 거쳐 ‘문화대국 프랑스’의 문화 행정을 책임지는 문화부장관 등 3년 반 동안 3개 장관을 역임했다. 장관 퇴임 후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기사)장을 경제 부문에서 받았다.한국에서는 그녀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신문과 방송은  "한국인이 프랑스 장관이 되었다!"고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그녀가 성장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자신을 외국으로 입양보낸 나라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그녀의 ‘화려한 성공’과 ‘위대한 한국인’에만 포커스를  맞췄다. 그러나 그녀는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프랑스인이고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 뿐'이라고 분명히 선을 긋었다.사실, 펠르랭보다 먼저 외국에서 여성장관이 된 재외동포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한세기나 앞서서… 그녀의 이름은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그녀의 이름은  <소련 공산당 역사> 제2권에 10월혁명과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아르만드, 아르쮸히나 등의 여성 혁명가들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고,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 백과사전에도 사진과 함께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의 생애에 대해서는 <조선역사> 제2권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는 1885년에 니꼴쓰크 - 우수리스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금지된 마르크스작품을 탐독했다.  1914~1917년 수천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던 우랄의 사업장에서 통역으로 일했다. 그는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하였고,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이었다.”유감스럽게도 탁월한 혁명가이자 국제주의자였으며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랬던 첫 한인 여성공산당원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공식 자료는 이게 거의 전부이다시피 하다.  김 마뜨웨이 찌모페이비치가 쓴 <원동에서 소비에트주권을 위한 투쟁에서의 조선인 국제주의자들 (1918~1922)>이란 책에 그녀에 대해 그나마 조금 기록되어 있지만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크즐오르다 사범대학 교원 우 블라지미르는 최대한 문헌자료, 친척들 그리고 혁명가와 함께 투쟁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회상기 등에 기초하여 그녀의 삶을 재현한 후 고려일보에 기고하였다.김 알렉산드라는  1885년 2월 22일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교의 시넬니코보 한인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동중철도 건설장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국인과 조서인 철도건설 노동자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 노동자들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하는 《만인산》과 《왕정산》이라는 비단으로 만든 우산을 선물했다고 한다.189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블라디보스톡의 오빠에게 온 16세의 김 알렉산드라는 독서에 탐닉하며 열정적으로 학창생활을 보냈다. 검은 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았던 그녀는 러시아의 진보적인 사상가였던 게르첸이나 체르느이쉐프스키 등의 사상서적들을 탐독하며 미래의 혁명가를 꿈꾸었다.노동자의 통역가에서 대변자로결혼과 출산, 자녀양육을 하며 블라디보스톡에서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아가던 김  알렉산드라는 러시아혁명 직전,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수천명 규모로 모집했던 우랄지방의 나제쥔스키 벌목장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된다. 체불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속에서 일하던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민족 차별까지 받았다.  알렉산드라는 유창한 러시아어와 해박한 지식으로 노동자들의 입이 돼 주었고, 그들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주면서 서서히 이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된다. 이를 기초로 그녀는  ‘우랄노동자동맹’을 결성했다.이후 김알렉산드라는 그곳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최초의 한인여성 사회민주노동당원(볼셰비키)이 되었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여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라는 제1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대표자회의(1917년 9월)에 참가하는 등 곧바로 당 및 소비에트 혁명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12월 김알렉산드르는 크라스노쉐코프가 지휘하는 극동소비에트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918년 초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 김알렉산드르는 3월에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이자 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등과 주축이 되어 한인사회당과 적위군을 조직했다.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자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불어에 능통했던 김알렉산드라는 그 혁명적 지도력을 인정받아 연해주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1차대전 포로문제와 관련한 혁명사업들, 조선인, 중국인, 헝가리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주의부대 편성사업을 진행해 나갔다.한편 1918년 8월말 극동지역의 내전상황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소비에트 볼셰비키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정권을 붕괴시킬려는 미,영,독,프 등 서구 열강과 함께 일본은 외국간섭군으로는 가장 대규모인 7만명의 육군을 연해주에 파견했다.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홍범도 부대 등의 항일독립군부대를 이 기회에 소탕하겠다는 목표를 실행에 옮겼다.그 결과 1918년 8월 25일-28일기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개최된 제5차 극동지역 노동자대회에서 일시 전선을 포기하고, 한인 혁명지도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아무르주로 이동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1918년 9월 2일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일단의 한인혁명가들은 백위파 군대에게 체포되고 말았다.죽음앞에서도 변치 않는 신념김 알렉산드라 일행은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어 ‘죽음의 객차’에 감금되었다. 칼믜코프의 백위파군들에 의해 그녀는 엄청난 고문과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고 혁명열사로서의 기백을 보였다.  9월 14일 새벽 4시. 백위파 군인들은 ‘죽음의 객차’에서 눈을 가린 채 김 알렉산드라와 사회노동위원 티쉰, 하바로프스크시 재판소장 네페도프를 끌어냈다.티쉰과 네페도프는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김 알렉산드라를 양쪽에서 부추기고 수많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총살당한 일명 ‘죽음의 골짜기’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다. 김알렉산드라는 눈을 가린 수건을 풀어 던지며 외쳤다.“(너희들은)  내가 여자이고 둘째로 내가 조선 여자이니까 끝까지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목숨을 바치며 지킬려는 신념은 로씨야에서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승리할 것이다."총살 직전 마지막 소원을 묻는 질문에 “여덟 발자국만 걷게 해 다오” 라고 말했다. 집행관이 “왜 하필 여덟발자국이냐”라고 되묻자 

김상욱고려문화원장스포츠 강국 카자흐스탄은 동계종목에서도 넓은 저변과 함께 뛰어난 선수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강국들 중 하나이다.  침불락이라는 천혜의 스키장은 설상 종목을  하기에 안성맞춤이고 알마티 인근의 악불락은 크로스컨트리와 바이애슬론 등의 경기를 하기에 역시 천혜를 조건을 갖추었다. 이외에도 알마티에만 해도 '발루얀샬락'과 '알마티 아레나', '할릭 아레나'등 국제규격을 갖춘 실내 빙상경기장들이 있고 수도 아스타나에서도 국제빙상경기장이 있어서 국제대회가 자주 개최되곤 한다.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감동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그 직전까지 극에 달했던 남북, 북미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적으로 평화모드로 바꾼 역사적인 대회로 기록됨과 동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올림픽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평창올림픽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른다.고려인들은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정상회담 등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비핵화를 위한 일련의 회담과 조치들이 숨가쁘게 벌어지는 것을 희망찬 눈으로 지켜보면서 머지 않아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서울 찍고 평양 나들이를 할 수 있을 기대감에 벅차 있었다.그래서 평창동계올림픽 경기들을 그 어느때 보다 열심히 지켜보았고, 최민정, 김아랑, 김예진, 심석희, 이유빈, 이승훈 등의 금메달을 목에 걸 때마다 마치 자신이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인 양 기뻐했고 대한민국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메달을 딸 수 있는지 의아해 하기 까지 했다.  우리나라가 동계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 덕분었다. 서양선수들보다 체격이 작아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쇼트트랙,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강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흔히, 선수들은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내린다'고 말한다. 평소의 실력 못지않게 대회 당일의 심리적 안정감과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만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시간과 노력, 재능, 투자 등 수많은 요소가 어우러져야지만 메달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경우 2010년 밴쿠버 올림픽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 등이 주인공들이었고 이들은 TV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국민들의 기억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겼다.남조선 스뽀르트 선수 배기태<사진설명 : 고려일보는 1988년 3월 8일자 4면에 '경기는 치열했다'는 제하의 기사로써  당시의 경기를 보도하고 있다.>그럼, 이런 결실을 맺게 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는 70년대의 간판스타 이영하로 부터 시작되어 80년대 중반부터는 배기태라는 선수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배기태는 1988년 캘거리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1987년 월드컵 3차대회 500m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서 198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메데우 경기장에서 열린 세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소련은 적성국가로써 교류가 없었을 뿐더러 모스크바도 아니고 알마아따(현재의 알마티)에서 열리는 대회는 국민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바로 이 대회에서 배기태 선수가 500미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7년 알마티에서 열렸던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국의 빙상국가대표팀 감독은 “제가 배기태 선수에 이어 그 대회에서 동메달을 땄어요”라면서 “그때 우리 선수들은 소련에서 대회가 열린다고만 알고 비행기를 탔는데, 몇 번 갈아타기를 거듭해서 도착한 경기장이 바로 이 메데오 경기장이었습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직항노선으로 6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을 수십시간을 돌아서 왔었죠”고 당시를 회상해주었다.        한편, 고려일보는 1988년 3월 8일자 4면에 '경기는 치열했다'는 제하의 기사로써  당시의 경기를 보도하고 있다.“'세계기록소유자이며 남조선 쓰뽀르트선수인 배기태가 36.89초간에 이 거리를 돌파하여 첫자리에 나서 금메달을 쟁취하였다”         특히, 시상식에서 활짝 웃으며 팔을 벌리고 있는 배기태 선수의 사진과 함께 <500메뜨르경주에서 남조선 선수 배기태가 승리하였다>고 사진 설명을 붙여놓았다.고려일보의 김훈 기자는 1988년 3월 5~6일  알마티의 메데오 경기장에서는 세계남자스피드스케이드선수권대회가 진행되었다면서 메데오 경기장에 선수와 진행요원, 관중 등 1만 2천명이 모였다고 보도하고 있다.고려일보에 따르면, 경기장의 중앙관람석에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게.웨.꼴빈을 비롯한 당, 쏘베트, 직업동맹, 공청동맹 기관 책임일군들이 있었다. 경기개막식에서 선수권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알마티시집행위원회 위원장 세.까.누르까질로브 그리고 국제빙상스포츠연맹을 대표하여 이.뻬루크(이태리)가 축사를 하였다.제82차 세계선수권대회 참가자들의 다수는 금년 동계올림픽에서 참가한 선수들이였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진행된 이틀간의 날씨는 아주 따뜻하였다. 때문에 경기장의 얼음판을 리상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경기장에서 여러 나라 국기들이 휘날렸고 수많은 외국손님들이 특별히 눈에 띄우게 만든 가지각색의 플랭카드, 맑고 푸른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봄 태양,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관중들의 함성 등은 경기장을 흥겨운 명절분위기로 휩싸게 하였다.500메터 경주가 시작되었다.  제12번째로 출전한 세계기록소유자이며 남조선스포츠선수인 배기태가 3689초간에 이 거리를 돌파하여 첫자리에 나서 금메달을 쟁취하였다. 둘째 자리를 에. 플레임(미국), 셋째 자리를 띠 아오야나기(일본)이 차지하였다.   본사기자   김훈        배기태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차례나 500m 우승을 차지하고 1990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는 종합챔피언에 오르는 등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당시 대한민국 최초의 메달 획득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으나, 근소한 차이로 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그는 1990년,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후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