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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스뽀르트 선수 배기태와 알마티 메데오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스포츠 강국 카자흐스탄은 동계종목에서도 넓은 저변과 함께 뛰어난 선수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강국들 중 하나이다.  침불락이라는 천혜의 스키장은 설상 종목을  하기에 안성맞춤이고 알마티 인근의 악불락은 크로스컨트리와 바이애슬론 등의 경기를 하기에 역시 천혜를 조건을 갖추었다. 이외에도 알마티에만 해도 ‘발루얀샬락’과 ‘알마티 아레나’, ‘할릭 아레나’등 국제규격을 갖춘 실내 빙상경기장들이 있고 수도 아스타나에서도 국제빙상경기장이 있어서 국제대회가 자주 개최되곤 한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감동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그 직전까지 극에 달했던 남북, 북미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적으로 평화모드로 바꾼 역사적인 대회로 기록됨과 동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올림픽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평창올림픽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른다.

고려인들은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정상회담 등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비핵화를 위한 일련의 회담과 조치들이 숨가쁘게 벌어지는 것을 희망찬 눈으로 지켜보면서 머지 않아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서울 찍고 평양 나들이를 할 수 있을 기대감에 벅차 있었다.

그래서 평창동계올림픽 경기들을 그 어느때 보다 열심히 지켜보았고, 최민정, 김아랑, 김예진, 심석희, 이유빈, 이승훈 등의 금메달을 목에 걸 때마다 마치 자신이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인 양 기뻐했고 대한민국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메달을 딸 수 있는지 의아해 하기 까지 했다.  

우리나라가 동계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 덕분었다. 서양선수들보다 체격이 작아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쇼트트랙,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강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흔히, 선수들은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내린다’고 말한다. 평소의 실력 못지않게 대회 당일의 심리적 안정감과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만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시간과 노력, 재능, 투자 등 수많은 요소가 어우러져야지만 메달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경우 2010년 밴쿠버 올림픽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 등이 주인공들이었고 이들은 TV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국민들의 기억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겼다.

남조선 스뽀르트 선수 배기태

<사진설명 : 고려일보는 1988년 3월 8일자 4면에 ‘경기는 치열했다’는 제하의 기사로써  당시의 경기를 보도하고 있다.>

그럼, 이런 결실을 맺게 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는 70년대의 간판스타 이영하로 부터 시작되어 80년대 중반부터는 배기태라는 선수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배기태는 1988년 캘거리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1987년 월드컵 3차대회 500m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서 198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메데우 경기장에서 열린 세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소련은 적성국가로써 교류가 없었을 뿐더러 모스크바도 아니고 알마아따(현재의 알마티)에서 열리는 대회는 국민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바로 이 대회에서 배기태 선수가 500미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7년 알마티에서 열렸던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국의 빙상국가대표팀 감독은 “제가 배기태 선수에 이어 그 대회에서 동메달을 땄어요”라면서 “그때 우리 선수들은 소련에서 대회가 열린다고만 알고 비행기를 탔는데, 몇 번 갈아타기를 거듭해서 도착한 경기장이 바로 이 메데오 경기장이었습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직항노선으로 6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을 수십시간을 돌아서 왔었죠”고 당시를 회상해주었다.

        한편, 고려일보는 1988년 3월 8일자 4면에 ‘경기는 치열했다’는 제하의 기사로써  당시의 경기를 보도하고 있다.

“’세계기록소유자이며 남조선 쓰뽀르트선수인 배기태가 36.89초간에  거리를 돌파하여 첫자리에 나서 금메달을 쟁취하였다

         특히, 시상식에서 활짝 웃으며 팔을 벌리고 있는 배기태 선수의 사진과 함께 <500메뜨르경주에서 남조선 선수 배기태가 승리하였다>고 사진 설명을 붙여놓았다.

고려일보의 김훈 기자는 1988년 3월 5~6일  알마티의 메데오 경기장에서는 세계남자스피드스케이드선수권대회가 진행되었다면서 메데오 경기장에 선수와 진행요원, 관중 등 1만 2천명이 모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고려일보에 따르면, 경기장의 중앙관람석에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1비서 ..꼴빈을 비롯한 쏘베트직업동맹공청동맹 기관 책임일군들이 있었다경기개막식에서 선수권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알마티시집행위원회 위원장 ..누르까질로브 그리고 국제빙상스포츠연맹을 대표하여 .뻬루크(이태리) 축사를 하였다.

82 세계선수권대회 참가자들의 다수는 금년 동계올림픽에서 참가한 선수들이였다세계선수권대회가 진행된 이틀간의 날씨는 아주 따뜻하였다때문에 경기장의 얼음판을 리상적이라고는 말할  없었다.  

경기장에서 여러 나라 국기들이 휘날렸고 수많은 외국손님들이 특별히 눈에 띄우게 만든 가지각색의 플랭카드맑고 푸른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관중들의 함성 등은 경기장을 흥겨운 명절분위기로 휩싸게 하였다.

500메터 경주가 시작되었다.  12번째로 출전한 세계기록소유자이며 남조선스포츠선수인 배기태가 3689초간에  거리를 돌파하여 첫자리에 나서 금메달을 쟁취하였다둘째 자리를 플레임(미국), 셋째 자리를  아오야나기(일본) 차지하였다.   본사기자   김훈

        배기태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차례나 500m 우승을 차지하고 1990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는 종합챔피언에 오르는 등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당시 대한민국 최초의 메달 획득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으나, 근소한 차이로 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그는 1990년,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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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atykim6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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