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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160여년의 이민사

김상욱

알마티 고려문화원장

본지 주필

  이 글은 지난 12월 23일 서울에서 개막한 광복80주년 기념 특별 사진전 ‘독립군의 후에, 고려인이 사는 땅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 일상들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진과 함께 전시된 텍스트 입니다.

두만강을 넘어 건설된 민족공간

   1863~1864년경 함경도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만든 최초의 한인 마을, 지신허는 러시아 한인 이주(고려인 이주)의 시발점이 되었다. 연해주를 개발하고자 했던 제정 러시아당국의 비교적 우호적인 정책에 따라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고, 연해주 곳곳에 많은 고려인 마을이 생겨났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잃게 되자 우국지사들이 조국독립의 꿈을 안고 연해주로 이주함으로써 연해주 동포사회는 해외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22년 까지 이어진 러시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연해주를 침략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길이 곧, 독립을 앞당기는 것이라 여겼고 국내 진공을 준비했다.

   1920년 6월 봉오동, 10월 청산리 전투의 빛난 승리가 있었던 반면 일본군의 한인촌 초토화 정책에 따라 4월 참변이 일어나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동포사회의 지도자들을 잃게 된다.

  1920년 후반과 1930년대 전반기 까지 동포지도자들은 소련 정부가 말한 민족차별정책의 폐지와 민족자치공간의 확보 약속에 따라 독자적인 민족행정 단위들을 운영했다. 고려인 민족자치구역 두 군데와 고려인 농촌소비에트 1백 52개가 운영되었다. 민족자치구역 두 군데란 두만강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는 포시에트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북부의 수찬 지역이다. 포시에트 지역은 28~37년 10년간, 수찬 지역은 35~37년간 민족자치구역이 존재했다.

  연해주 동포사회의 이렇듯 강한 민족적 역량은 일제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1937년 강제이주

  1937년이 되자 국제정세가 급변했다. 그해 7월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본토 침략을 본격화하자 위협을 느낀 소련 당국은 연해주 지역의 동포사회를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 같은 해 8월, 갑작스런 중앙아시아로의 이주를 명령을 내린다.

  강제이주의 배경을 놓고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데, 일본과 대립하기 싫었던 소련의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혁명과 내전으로 피폐화된 자국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대외갈등을 피하고 싶은 것이 소련의 속내였다. 소련은 극동의 한인을 일본이 분쟁의 씨앗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주가 시작되자 일본은 재빨리 외교라인을 통해 소련에 항의했다. 소련은 한인의 이주는 자국 시민에 대한 문제라고 주장하며 선을 그었지만, 일본은 한인들을 자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런 사실을 식민지 조선에 알려서 일반 민중들에게 반소 정서를 퍼뜨리는데 활용했다. 

  퇴거는 즉시 시작되어 1938년 1월 1일에 끝낼 것을 명령받았다. 열차 사고의 결과로 일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37년 12월 29일, 이주 결과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2만789가족, 9만8천454명의 한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송되었다. 나머지 약 8만 명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이송되었다. 도착하자 마자 맞이한 첫번째 겨울에 한인들은 기차에서 내린 지역의 클럽, 창고, 버려진 사원, 마구간 또는 토굴을 파고 갈대로 지붕을 덮어 지냈다.

중앙아시아에서 꽃핀 한민족의 저력

  1938년 봄, 70개의 독립적인 집단농장이 건설되었다. 이주 후 맞은 첫 봄에 2만1천 300 헥타르의 땅에 쌀, 곡물, 야채, 사료 작물 등을 재배했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가져온 볍씨를 크즐오르다 황무지에 뿌려서 이 지역을 중앙아시아 최대의 벼농사 지대로 탈바꿈시켰다. 현재까지도 이곳은 카자흐스탄 쌀생산량의 93%를 담당하면서 카자흐스탄을 쌀 수출국으로 만들었다.

  당시 자타가 공인했던 벼 재배 영웅은 김만삼이었다.  강제이주된 지 불과 4년 뒤에 터진 2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능력이 크게 빛을 발했고 스탈린의 주목을 끌었다. 그래서 1945년과 1946년 두 번에 걸쳐 ‘붉은 노동훈장’을 받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고려인들은 면화와 벼농사를 지을 농경지를 개발하는 등 중앙아시아 농업개발에 혁혁한 역할을 수행했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는 홍범도 거리와 기념공원과 전시관이 있다. 8개의 도시와 15개의 마을, 23개의 정착지에서 저명한 고려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32개의 거리가 있다. 카스피해 유전과 잠블 지역의 경기장도 고려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소련 해체 후 고려인 동포사회는 체제전화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혼란으로 잠시 어려움을 겪었으나 모국과의 교류를 확대시켜가면서 성공한 고려인을 배출하면서 다시 한번 한민족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카자흐스탄에서 제1부호 역시 고려인이다.

  실로, 한반도에서 날아온 ‘고려인’이라는 민들레 홀씨가 중앙아시아에 찬란한 꽃을 피웠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