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6]
볼셰비키10월 혁명과 투르키스탄 자치 정부

지난 호에서 세계사를 뒤흔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서막인 2월 혁명이 중앙아시아에서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보았다.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정치 사회운동은 크게 두가지 흐름을 이루었는데, 첫째로 민주적인 러시아공화국을 상정하고 그 안에서 국민들은 종교와 민족의 구별없이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고 교육과 종교 언어를 비롯한 민족문화분야에서 자치를 향유하면 된다고 주장했던 그룹과 둘째, 지역적 자치에 기초한 완만한 연방제를 상정하고 중앙정부의 역할을 최대한 제한하려 했던 연방파 등이 활동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때론 격론을 벌이기도 했으나 러시아에서 분리, 독립 주장을 편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언급하였다.
투르키스탄 자치 정부와 바스마치 운동
이번 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수립시킨 10월 혁명과 뒤이은 내전으로 인한 혼란기 동안 중앙아시아에서는 어떤 사회운동이 일어났는 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정권을 잡은 레닌은 러시아내의 모든 무슬림들을 향한 역사적인 호소문을 발표했다. «볼가 연안과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 시베리아와 투르키스탄의 키르기스인과 사르트인 카프카스지역의 체첸인과 산악 민족들…» 로 시작하는 이 호소문을 통해서 이들 무슬림들이 신앙과 관습, 민족, 문화 제도의 자유를 선언했고 러시아내 모든 민족의 권리는 똑같고 소비에트에 의해 보호된다는 것을 만방에 알렸다.
10월 혁명과 이어진 반혁명파인 백군과 적군 사이의 치열한 내전의 시작은 식료품과 물자의 생산과 수송체계의 해체를 가져왔고 러시아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당시 투르키스탄지역의 대도시를 제외하면, 볼셰비키는 일반 무슬림 민중들 속에서 지지기반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슬림 자치운동세력들은 이러한 소비에트 정권의 출현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놓고 큰 결단을 내려야했다
투르키스탄의 이슬람 개혁주의자들은 10월 혁명이 일어난 그 다음달인 1917년 11월, 현재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지역에 있는 코간드에 모여 제4회 투르키스탄 무슬림대회를 열고 투르키스탄의 자치를 선언하는데 성공했다.
이 자치정부는 타쉬켄트에 수립된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할 수는 있었지만 군사력은 물론 조직과 재정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이 자치정부를 계급적 기반이 없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부에 지나지 안는다고 규정하고 이듬해 2월, 붉은 군대와 아르메니아 군대를 동원해서 해체시켜 버린다.
이렇게 하여 무슬림 자치 정부는 소멸되었지만 무슬림의 정치, 문화 운동은 그 후 다음 세가기 방향에서 새롭게 발전했다.
첫번째는 ‘바스마치’ 운동이다. 이는 러시아 혁명기에 제정 러시아의 옛 식민지 투르키스탄의 현지 무슬림들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여 벌인 반 혁명 운동을 말한다. ‘바스마치’는 비적, 침입자 등을 뜻하는데,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비에트정권은 ‘바스마치’세력을 반소비에트 저항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운동은 내전에 의해 극도로 악화된 식량 사정과 지역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소비에트 정권의 시책으로 인해 급속도로 확대되었는데 한때 무슬림 무장 세력의 수가 2만명에 이를 정도로 소비에트 정권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1924년 4월 사마르칸트에서 ‘투르키스탄 투르크 독립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이 운동에는 민족주의자 뿐 아니라 옛 지배층, 농민, 유목민, 수피 등 다양한 집단이 참여했는데, 1918 ~ 1924년의 절정기를 거쳐 지역에 따라서 1930년대까지 지속되어 소비에트 정권을 위협했다
두번째 흐름은 자디드 지식인들이 소비에트 정권 아래서 전개한 교육과 문화 운동이다. 소비에트공화국 테두리안에서 점진적으로 투르키스탄인에 의한 자치의 기초를 닦고 내실을 다지려고 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소비에트 정권과 제휴하는 것은 무슬림 보수파의 반동적 행위와 간섭에 맞서 무슬림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유효한 전략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피트라트라는 자인데, 타쉬켄트에서 ‘차가타이 간담회’ 라는 문학동아리를 설립하여 아랍문자표기의 개혁, 구비문학의 수집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되 동시에 투르키스탄인을 위한 새로운 문어를 창출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세기 초 투르키스탄에는 러시아총독부가 채용한 이른바 관제 문어인 ‘사르트어’를 비롯하여 타타르어, 오스만어, 공통 투르크어 를 비롯한 여러 문어들이 혼재했다.
피트라트는 이러한 혼란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차가타이어 전통에 의거하여 아랍어, 페르시아어, 러시아어의 요소를 제거한 새로운 문어를 창안하려고 했다.
그들은 독자적인 문어를 통해서 투르키스탄 공화국의 국민을 창출하려 해던 것이다.
세번째는 소비에트 정권에 의한 ‘현지민화 정책’ 아래서 투르키스탄 공산당에서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무슬림 공산당원의 활동이다.
초기 소비에트정권은 과거 식민자였던 러시아인 정권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고 대러시아주의와 가혹한 징발을 수반한 전시 공산주의, 노골적인 반 이슬람정책은 무슬림 민족의 반감을 사서 바스마치 세력의 확대를 불러왔다.
투르키스탄 내전이 격화되는 것을 우려한 레닌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투르키스탄 무슬림 주민과 소비에트 정권사이의 이 틈새를 메우기 위해서 현지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투르키스탄 지역 무슬림뷰로가 그 성과 가운데 하나인데, 타타르인 술탄가리예프 와 카자흐인 리스쿨로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투르키스탄공화국은 민족적 소비에트 공화국이고 거기에서 자결권을 갖는 집단은 투르크족이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투르크라는 것은 이란계를 포함한 투르키스탄 토착민을 총칭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슬림 공산당원의 행동은 즉시 당 중앙의 개입을 불러왔다. 개별 민족의 독립적 당 조직은 공산당이라는 단일 조직 원리에 반할 뿐 아니라 이 주장은 자칫 범투르크주의 또는 범이슬람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당 중앙은 새롭게 치장한 범투르크주의, 범이슬람주의로 간주하고 대안을 마련하는데 골두하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향후 투르키스탄을 3개의 민족 구역(민족 공화국) 즉,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으로 분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1924년 ‘중앙아시아 민족경계 획정’의 시발점이 되었고 결국 현재의 중앙아시아5개국 탄생의 단초가 되었다 .
요컨대, 러시아 제국의 사회적 모순의 축적과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에 대해 폭압적인 탄압으로 일관했던 짜르 전제정치는 제국내 모든 민족들의 삶을 힘들게 하였고 결국에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정신적 문화적 개혁운동으로 태동하여 투르크-무슬림 공동체의 건설을 지향하는 정치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한 ‘자디드 운동’의 주도세력들은 1차 세계대전과 구시대적 식민 질서의 붕괴와 1917년 두차례에 걸친 혁명 그리고 내전이라는 대변혁의 시대속에서 러시아내 무슬림 사회의 혁명적인 개혁을 열망하는 한편, 소비에트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급진화된 자디드 지식인들로 변해가기도 했다.
한편, 러시아 혁명의 충격은 러시아의 보호국이었던 부하라와 히바 두 보호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1918년 3월 청년 부하리인 조직은 소비에트 정권과 협력하여 아미르 정권에 대한 무장 쿠데타를 기도했다.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부하라와 히바는 내전기 중앙아시아에서 사실상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1920년 투르키스탄 적군이 개입한 소비에트 혁명에 의해 옛체제가 타도되고 부하라와 히바(호라즘)에서도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했다.
바스마치 운동의 시작과 끝
바스마치 운동은 1916년 중앙아시아를 휩쓴 봉기에서 비롯되었다. 그 계기는 짜르 정부가 중앙아시아 지역 주민들을 “외국인”으로 징집하여 후방 부대로 배치하는 칙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전에는 이들이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군 병력이 부족하자 짜르 정부는 정책을 수정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이 징집령을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위협을고 받아들이고 무기를 들었다.
“바스마치”는 “공격하다, 덮치다”라는 뜻의 투르크어 “바스막”에서 유래했으며,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치”가 붙어 “바스마치” 즉, 명사 “약탈자”가 되었다.
1931년까지 15년 동안 활동한 바스마치의 소수의 잔존 세력은 훨씬 더 오랫동안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바스마치 운동의 역사가 1943년에야 비로소 종식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독일 정보기관이 소련 남부에서 테러 활동을 조장하기 위해 만든 바스마치 조직 “파알”이 활동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바스마치는 아프가니스탄 통치자들과 영국으로 부터 무기, 탄약, 자금 지원을 받았고, 러시아 백위파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바스마치는 투르케스탄의 진정한 독립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권력 쟁취에만 몰두했다. 그들이 동족들의 식량을 약탈하고 이교도들에 대해 보인 극도의 잔혹성과 무차별적인 “전투” 방식은 동족의 지지를 잃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바스마치 부대들은 1917년 말 소위 코칸드 자치주 설립을 지지하는 주요 무장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코칸드 자치주의 첫 외교 정책 중 하나는 투르케스탄의 독립 선언이었는데, 소련 정부가 이를 허용한 것은 심각한 실수였다.
민족 독립이라는 이념은 중앙아시아의 많은 주민들을 코칸드 자치주로 끌어들였다. 1918년 2월 22일 자치주가 해체되자, 패배한 지지자 부대들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집단은 최초의 바스마치 부대로 볼 수 있다. 바스마치는 농민들에게 이 부대가 그들의 독립과 자유를 지켜줄 것이라고 확신시키며, 자유 투르케스탄이라는 이상에서 자유 무슬림 투르케스탄이라는 이상으로 빠르게 입장을 전환했다.
그들의 주장은 주로 신생 소비에트 정부의 실책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1918년부터 1922년까지는 바스마치 운동 활동의 절정기였다. 페르가나 계곡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빠르게 북부 투르케스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서쪽으로 부하라 방향으로 더욱 퍼져나갔다.
한때 투르케스탄의 바스마치 인구와 그 세력은 바스마치 세력은 15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거느리고 광대한 영토를 장악했다. 특히 1921년 이브라힘 베크는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대표들과의 일시적인 동맹 덕분에 두샨베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련 정부에 항복한 바스마치 당원들 중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무장 투쟁과 약탈 참여를 포기했다. 바스마치 지도자들은 그때마다 사람들을 모집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마다민 베크와 같은 저명한 인물들조차 “이교도와의 싸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바스마치는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부흥했지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점차 새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바스마치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었고, 지지자 모집 또한 점점 어려워졌다.
중앙아시아에서 소련의 권력에 맞서 마지막까지 투쟁을 이어가려 했던 바스마치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이브라힘 베크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마침내 1920년대 후반, 그는 남은 바스마치 부대들을 자신의 지휘 아래 통합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와 정부군, 두 전선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