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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40]

[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40]

홍범도가 잠든 땅, 고려인의 도시 크즐오르다

김상욱  알마티 고려문화원장/본지 주필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직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도시는 당시의 수도였던 알마티였다. 당시에는 ‘알마-아타(’사과 할아버지‘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 도시는 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가는 사실상의 관문이었다. 한국에서 이나라를 방문하려면 누구든지 알마티 공항을 거쳐야 했고, 더불어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각종 고려인 단체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방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다음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찾았던 도시는 바로 크즐오르다였다. 크즐오르다는 천산산맥에서 발원해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초원과 스텝을 가로지르며 서쪽으로 흐르는 시르다리아 강 하류에 자리 잡은 도시로, 카자흐스탄 남

부에서도 서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 도시는 한때 카자흐스탄의 수도로, 이후 수도가 알마티로 옮겨 가면서 행정 중심지의 역할은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주변에는 ‘쿰콜 유전’과 같은 자원 개발 지역이 자리하고 있어 지역 경제의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으며 비록 유전의 소유 구조는 변했지만 여전히 지역 주민들에게 주요한 고용과 현금 흐름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이 도시는 1937년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에 의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한 장소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때 허허벌판이었던 시르다리아 강변은 고려인들의 노동과 기술에 의해 가을이면 황금 물결이 넘실대는 곡창지대로 변모했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벼농사 지역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 변화는 농업 개발의 의미를 뛰어넘어 하나의 문명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동차로 약 세 시간 거리에 소련 시절의 유산인 바이코누르 우주기지가 있어, 소련 해체 이후 한때 이를 관광 자원으로활용하려는 시도 속에서 크즐오르다는 주요 관문 도시로 주목받기도 했다.

  1995년 10월, 이미 초겨울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에 이 도시를 처음 찾았을 때의 풍경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크즐오르다는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했다. 강수량 부족으로 말라 버린 스텝 사이로 구

불구불 흐르는 시르다리아 강만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아침과 저녁에는 한기가 느껴지고 낮에는 늦여름의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하루에도 두 계절이 공존하는 듯한 기후였다.

  당시 도시는 소련 해체 직후의 혼란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낡은 건물과 정돈되지 않은 거리, 아파트 뒤편 골목에 쌓인 쓰레기들은 아랄 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고, 고인 물웅덩이 주변에는 모기들이 들끓었다. 그 풍경은 그저 낙후된 지역이라는 인상에서 그치지 않고 체제 전환기의 공백이 만들어 낸 현실을 그대로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크즐오르다 국립대학교를 방문해 한국어과 학생들의 수업을 참관하고 이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경험은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았다. 고려인 사회 지도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경험한 만찬 문화 역시 독특한 문화적 체험이었다.

  특히 한번 시작하면 30분 가까이 이어지던 건배 제의는 공동체의 기억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튿날에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던 공동묘지를 찾아 참배하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해외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사업이 추진되고 있었고 장군의 유해 역시 국내로 모셔 오

기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비록 그 시도는 여러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때의 현장만큼은 역사와 현실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이틀간의 체류를 통해 형성된 도시의 첫인상은 극단적인 기후와 거친 환경, 전환기의 흔적이 뒤섞인 땅이라는 이미지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다시 방문했을 때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름철의 크즐오르다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강렬했다.

  모기들이 청바지를 뚫고 피를 빨 정도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만큼 혹독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2008년 다시 찾은 크즐오르다는 완전히 다른 도시로 변해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도로는 새롭게 포장되어 있었고 도시 전체가 정비되며 깨끗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새로운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거리에는 이전과는 다른 활기가 감돌았다. 과거의 침체된 분위기는 사라졌으며 변화와 성장의 기운이 도시 전반을 채우고 있었다. 고려인 음식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 ‘부산’이며 ‘아리랑’과 같은 이름의 식당들이 도시의 문화적 특징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크즐오르다의 요식업은 사실상 고려인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호텔 역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되어 여행자들이 머물기에 충분한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나 역시 이 도시를 자주 찾았다. 조선의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묘역이 있고, 전설의 록밴드 키노를 이끈 보컬 빅토르 초이의 유년 시절 기억이 깃든 시르다리아 강이 흐르고, 강제 이주 당시 이전한 연해주 원동조선사범대학이 현재 크즐오르다 국립대학교로 이어진 교육의 역사가 남아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곳은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리는 최정학, 김만삼 등의

인물과 수많은 고려인들이 분투하여 중앙아시아 최대의 벼 생산지로 탈바꿈시킨 공간으로, 고려인들에게는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크즐오르다 주변에 줄지어 늘어선 수천 헥타르 규모의 농장들 중에서도 ‘제3인터내셔널’과 ‘아방가르드’ 콜호즈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수확철이 되면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 들판 위에서 콤바인과 트럭이 움직이는 장면은 이 지역 농업의 규모와 힘을 실감하게 한다. 멀리서 보면 손톱만큼 작아 보이던 기계들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대한 존재로 드러나는 장면은 초원의 스케일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곳의 농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방문객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과거 고려인 지도자들에게 배운 고려말을 여전히 구사하는 경우도 많다. ‘술이’, ‘밥이물이’, ‘개장국’과 같은 단어들은 언어에 담긴 역사와 기억을 비쳐 보인다.

  한편 크즐오르다는 또 다른 문화적 상징을 품고 있다. 1962년 이곳에서 태어난 빅토르 초이는 소련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비록 어린시절 이후 다른 도시로 이주했지만 시르다리아 강에서의 기억과 고려인의 정서는 그의 음악 속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소련 전역에서 이어진 추모 열기는 그가 당시 소련 전역에 끼친 문화적 영향력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크즐오르다 시내를 걷다 보면 기차역 인근에서 홍범도 거리로 이어지는 길을 만나게 되는데, 이처럼 도시 곳곳에서 장군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조선극장 터, 원동사범대학의 흔적,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묘지도 도시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자산은 제대로 보존하고 재구성한다면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엮어 도시 전체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탄생시킬 가능성을 예견하게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도시가 보여 준 변화는 분명했다. 황량했던 공간은 생동감 있는 도시로 변했고 고려인들의 노동이 만들어 낸 농업 기반은 지역 경제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위에 역사와 문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이 덧입혀지고 있다.

크즐오르다라는 이름은 강제 이주의 아픔, 노동과 개척의 역사, 켜켜이 쌓인 한 민족의 기억을 뜻한다. 그리고 그 이름의 의미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축적되고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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