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리즈 – 10]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러시아 혁명과 중앙아시아 무슬림 민족운동
지난호(10회)에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과 타타르인들에 의해 이 지역에 이슬람이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아바이 쿠난바예프’와 같은 카자흐 민족 엘리트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번호에서는 러시아 혁명과 중앙아시아 무슬림 민족운동에 대해 알아보겠다.
제정 러시아를 크게 동요시킨1904년 러-일 전쟁과1년 뒤 일어난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 영내의 무슬림 민족운동을 크게 고양시켰다. 카자흐 초원을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무슬림의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찾아온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주어졌고 이에 따라 무슬림의 정치, 사회 운동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1905년 이후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오렌부르크를 비롯하여, 카잔, 바쿠, 타슈켄트 등 무슬림들의 경제, 문화 중심 도시에서 무슬림 신문과 잡지가 창간되었고 러시아 영내는 물론이고 신장까지 배포되어 무슬림의 정치적 각성에 크게 공헌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주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정치동향에 밝은 타타르 지식인들이었고 이들은 러시아 무슬림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특히, 제1회 대회(1905년8월)때에는 러시아 영내에 거주하는 투르크 민족 대표들이 참여하는 거대한 행사로 치러졌다. 세번의 무슬림 대회를 통해 카자흐 초원, 투르키스탄 카프카스의 무슬림을 상정한 영토적 자치를 구상하거나 러시아 내지의 소수민족인 타타르인과 바슈키르인을 상정한 문화적 자치를 구상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러나 무슬림 연맹은 역사와 문화적 배경과 생활양식이 다른 러시아 영내의 모든 무슬림을 통합시키지 못했다. 실제로 이슬람 문명보다 유럽(러시아)문명을 수용하려 한 카자흐 민족주의자들은 무슬림 연맹에 가담하지 않은 채 독자적 민족운동을 펼쳐나갔다 즉, 카자흐 지식인과 부족 장로들은 1905년카자흐초원에대한 식민의 제한과 사법행정부문에서 카자흐어 사용을 허가할 것을 청원하고 제2두마에 선출된 카자흐의원들은 카자흐 유목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식민 정책의 중단과 빼앗긴 토지의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러시아 정부는 1906년 부터1912년 사이에 제국 내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약 45만명에 달하는 러시아인들을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세미레치에 등지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대대로 카자흐인들이 경작하던 농경지를 이들 이주민에게 분배했다. )
러시아혁명의 길을 연 중앙아시아의 반란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무슬림 민족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중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차 대전에 참전한 제정 러시아는 이 지역 무슬림들이 병역의무 대신 전시세를 내게 하고 이들로 부터 기타 식료품과 가축을 징발하였다. 거기에다 투르키스탄 총독부와 말단 행정기관의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민중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1916년 니콜라이 2세는 전시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중앙아시아 이민족 즉, 투르키스탄에서 성인남자25만영과 카자흐 초원의 여러 주에서 14만명을 후방의 노동력으로 동원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충분한 호구 조사나 사전 준비 없이 갑자기 발표된 칙령은 민중의 불만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가 져왔고 마침 면화 수확기와 라마단을 맞이하고 있던 무슬림민중은 유언비어와 억측이 동반된 강제 동원령 소식을 접하고 대규모항쟁을 전개했다.
사마르칸트, 세미레치에, 투르가이를 비롯한 여러 주에서는 유혈 사태를 동반한민중봉기로 발전했고 때로는 칸을 선출하여 자립적인 정권을 수립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이에 대해 러시아당국은 계엄령을 발포함과 동시에 강력한 부대를 파견하여 반란 진압과 처벌을 맡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세미레치에 주의 카자흐 유목민들은 대거 중국령 동투르키스탄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세미레치에 주를 떠난 난민이 10만호에 달했다고 한다.
조직력도 없고 무기도 부족한 반란은1916년말까지 차례로 격파되었다. 그러나 이 반란으로 러시아 정부가 동원할 수 있었던 이민족은 예상 인원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나아가 이러한 식민지동요은 전시 제정 러시아의 정치,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켰다. 이런 점에서 중앙아시아의 반란은 이듬해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반란은 무슬림이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이듬해 러시아혁명이 발발하고 자유가 선포됨에 따라 많은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들이 해방의 때가 온 것으로 여기고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무장한 러시아 주민들의 소총과 활이었다.
중앙아시아는 이렇게 하여1916년 반란이 초래한 민족사이의 심각한 불신과 대립을 간직한 채 러시아 혁명과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이는 또 중앙아시아 혁명이 식민지 구조의 변혁과 민족관계의 재편성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떠맡고 있었음을 위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