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 이태원 참사 희생자 카자흐스탄 유학생]
“계속 배우며 살 거야”라던, 26세 마디나의 못다 이룬 꿈
고교시절 언어 공부의 재미에 눈을 떴다.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후 한국 유학을 준비해 2015년 드디어 바라던 한국에 와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학업을 마친 후엔 한국에 정착하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카자흐스탄인 마디나 베이비토브나 셰르니아조바(Мәдина Бейбітқызы Шерниязова)씨 이야기다. 그는 지난 10월 29일 이태원 압사 참사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1996년 4월 22일생, 향년 26세다.
그의 언니 다미라 셰르니아조바씨와 친구 아디야씨는 <오마이뉴스>와 이메일·SNS 채팅 등을 통한 인터뷰에서 마디나씨가 “호기심 왕성한, 배움을 주저하지 않았던 꿈 많은 청년”이었으며 “한국을 정말 좋아했고, 그곳에서 계속 자기 삶을 성장시키며 살기를 꿈꿨다”고도 했다. 마디아씨가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세상엔 배우고 싶은 게 참 많다”였다.
10대 때부터 언어의 세계에 풍덩… 한국어과 진학
마디나씨는 카자흐스탄 서부 도시 악토베에서 태어났다. 석유 자원 등이 매장된 지리적 특성상 석유·가스 회사들이 밀집해 있는 공업도시다.
마디나씨 부계 일가 친척 대부분은 석유 회사에서 일하는 전문가였다. 할아버지는 한 석유회사의 창업주, 아버지는 엔지니어, 언니인 다미라씨도 러시아 우파 주립 석유기술대학에서 공부한 기술자였다. 마디나씨의 어머니는 의사였고, 이모와 외삼촌 등도 모두 의사나 의대 교수로 일했다.
마디나씨가 어렸을 때부터 흥미를 보인 건 언어였다. 그가 졸업한 악퇴베 27번 고등학교의 교장은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마디나는 8학년(중2~중3학년) 때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며 “언어 습득에 매우 능숙했고 공부도 잘했으며, 영어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과정도 졸업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고교 졸업 후 러시아 카잔 연방 대학교 동양어학부에 진학해 한국어를 계속 공부했다. 그때부터 모국어·러시아어·영어, 그리고 한국어까지 4개 국어에 능숙했다. 다미라씨는 “동생은 언어를 가르치는 일도 좋아했다”며 “어린 학생 뿐 아니라 직장인들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쳤고, 외국인에겐 러시아어를 가르쳐줬다. 자기만의 교수법을 스스로 발명해 적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마디나씨는 2015년 국민대 교환학생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교환학생을 마친 후엔 중앙대 경영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아디야씨는 “수료로 과정을 마친 마디나는 올해 가을 논문을 제출하려고 했다”며 “그게 남아 있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암 걸린 앵무새 구조해 수술 치료하기도
여행, 배움, 동물, 이 세 가지는 마디나씨의 지난 삶을 보여주는 열쇳말이다. 한국에서 그와 막역하게 지낸 아디야씨는 2019년 ‘와우코리아서포터즈(Wow Korea Supporters)’로 그를 처음 만났다. 한국관광공사가 한국 관광지 등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주한 외국인 170명으로 꾸린 SNS기자단이다.
아디야씨는 “마디나는 정말 적극적이고 생동감이 넘쳤다. 당시 프로그램 첫 만남에서도 모든 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 정도로 활달했다”며 “SNS 기자단 활동도 열심히 했고, 그 후에도 계속 한국을 여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다미라씨도 말을 이었다.
“마치 자기 생이 짧을 것을 알았던 것처럼, 마디나는 배운 것도 많고, 좋아했던 것도 많아요. 음악을 매우 좋아해 피아노도 배우고 베이스 기타도 배웠어요. 전공 지역의 문화·역사·철학 공부도 좋아했어요. 케이크, 쿠키부터 한국 음식까지 요리도 잘했고, 차(茶)도 좋아했어요. 도자기 컵을 모으고 차, 우유, 쿠키, 디저트 등을 테이블에 진열해놓고 ‘디저트가 함께 없다면 그건 차가 아니야’라고 농담을 하곤 했어요. 훗날 디저트를 파는 카페 운영도 꿈이었죠.
무엇보다 한국을 정말 좋아했어요. 항상 특별한 사랑과 존중을 담아 한국에 대해 얘기하는게 느껴졌어요. 한국의 문화 유산을 찾는 활동 등 여행·관광 프로그램에 꾸준히 등록해 일도 했고요.”
다미라씨는 동생이 한국에 있는 동안 일본어까지 공부해 훗날 일본을 갈 계획도 세웠다고 소개하면서 호기심이 왕성한 성격답게, 책 중에서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가장 좋아했다고 했다.
마디나씨는 유기 동물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평소에 유기동물 보호 센터에 기부를 하거나 직접 동물을 구조해 키우기도 했다. 앵무새를 특히 좋아했던 그는 한국에서 앵무새 2마리를 키웠다. 연두색 날개의 ‘뚱이’와 연한 하늘색 날개의 ‘솜사탕’이다.
지난 8월 뚱이가 숨을 거두자 마디나씨는 그를 화장해 반려동물 추모공간에 봉안했다. 다른 앵무새는 암을 앓고 있었고, 마디나씨는 직접 수술비용을 마련해 치료해줬다. 이 앵무새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다른 친구가 입양해 키우고 있다.
유족은 그의 앞으로 모인 후원금을 유기동물 보호센터들에 기부할 계획이다. 시신 이송 비용이 문제가 되자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그를 위한 후원금을 모았고, 이 중 일부를 마디나의 이름으로 카자흐스탄의 한 동물보호센터에 기부했다.
사고 직전 언니와 영상통화… 영상으로 시신 확인한 아버지
다미라씨는 사고 직전인 10월 29일 밤 9시 47분께 마디나씨로부터 영상 메시지를 받았다. 다미라씨 휴대전화엔 아직 그가 보낸 영상 메시지가 남아있다. 자매는 평소에도 하루에 1~2회씩 통화할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 다미라씨는 사고 당일 기억에 대해 현지 언론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마디나는 당시 친구를 만나고 있었고, 함께 저녁을 먹고 이태원 메인 도로를 걷기로 했다. 그런데 인파가 너무 많아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인파에 휘말렸고, 친구가 앞으로 밀쳐지며 둘은 헤어지게됐고, 친구는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마디나의 친구가 의식을 찾은 뒤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마디나는 보이지 않았고 이후 경찰이 도착했다고 한다. 친구는 ‘모든 게 문자 그대로 3초 만에 벌어졌고 무엇을 이해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가족은 사고 다음날인 10월 30일 카자흐스탄 영사의 전화를 받고 마디나의 사망 소식을 알았다. 항상 전화와 문자에 답장을 하던 딸이 갑자기 연락이 없자 어머니가 아침부터 딸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던 차였다. 영사는 아버지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시신 확인을 부탁했고, 아버지는 영상으로 누워있는 딸의 시신을 확인했다.
한국 정부가 외국인 희생자의 시신 운구 비용 등을 선제 지원하지 않아 금전적인 문제가 생기자,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직접 후원금을 모금했다. 이들은 마디나의 유류품을 모아 그의 관과 함께 화물기를 이용해 부쳤다. 마디나씨의 시신은 11월 3일 수도 알마티에 도착했다. 그리고 5일 고향 악토베에 도착했다.
유족은 무슬림 전통에 따라 그가 누워있는 관을 하룻밤 동안 그의 방에 놓아두었다. 유족과 친척들 모두 밤새도록 기도문을 읊었다. 그의 발인이 있었던 다음 날 아침에도 100여명의 조문객이 모여 기도문을 함께 읊었다. 마디나씨는 할아버지와 일가 친척들이 안장된 묘지에 함께 묻혔다.
유족 “매일이 고통… 사고 진상 알고 싶다”
“사랑과 웃음이 가득했던 내 동생… 매일 저녁마다 엄마와 함께 동생의 유류품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통이 너무 큽니다. 마디나는 지난 여름 카자흐스탄을 깜짝 방문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동생을 한국에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6살 위 언니인 다미라씨는 그의 탄생과 첫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밝혔다. 또 직접 동생에게 기는 법과 걷는 법과 가르치면서 함께 컸다고 했다. 다미라씨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다미라씨는 “우리는 이 사건이 국가기관과 지자체가 그같은 규모의 행사에 시민 안전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아 생긴 과실 범죄라고 생각한다”며 “긴급 대응을 해야 할 경찰도 너무 미흡하게 일했다”고 밝혔다. 그는 기자에게 “조금이라도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알고 싶다. 당시 길거리를 찍은 영상이나 사진이 공개된 것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친구 아디야씨는 목이 메이는 목소리로 “공평하지 않다. 그녀는 너무 어리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이어 “나와 마디나는 ‘한국은 안전하고 어떤 (위험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항상 말했었다”며 “(이태원 참사는) 한국 정부와 경찰이 그들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사고다. 한국 정부의 책임”이라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