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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동포 강제이주 첫 정착지, 카자흐에서 홍보 활동 추진  OKFriends봉사단 출발      김영근 센터장과 봉사단원들이  20일, 인천공항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다짐하고 있다(사진 : 재외동포협력센터 제공)      재외동포청 산하기관인 재외동포협력센터(센터장 김영근, 이하 ‘센터’)는 ‘재외동포와 함께하는 OKFriends 봉사단’을 11월 20일부터 11월 26일까지 CIS 지역에 파견, CIS 지역 동포사회와 교류 활동을 추진하면서 ‘재외동포 차세대동포 모국 초청연수’를 적극 홍보한다. 특히 OKFriends 봉사단은 23일부터 26일까지 알마티를 비롯, 캅차가이, 우슈토베 및 바슈토베 등을 방문, 현지 차세대 동포와 교류하고 현지 동포사회를 경험하며 ‘차세대동포 모국 초청연수’의 의의와 성과를 설명하는 등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전개한다. OKFriends 봉사단은 카자흐 현지에서 우슈토베 및 바슈토베(고려인 강제이주 첫 정착지 표석 및 공동묘지 등 참배) 방문, 캅차가이 한글학교 봉사활동, 국립 고려극장 방문 등의 활동을 앞두고 있다.  김영근 센터장은 “올 여름 모국연수에 헌신한 OKFriends 봉사단이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더 많은 재외동포 청소년·대학생이 내년도 모국연수에 참가하기를 바란다”면서 “재외동포와 함께하는 OKFriends 봉사단의 홍보 활동이 좋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현지 동포사회가 평가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한편, 센터는 25년도에 하계(8차례), 동계(2차례) 연수가 진행될 예정이며, ① 한인정체성 함양 및 유대감 강화(한국 역사문화 이해, 유적지 및 관련 시설 방문, 한국 지역 문화 체험), ② 글로벌 리더 육성(글로벌 중추국가 실현 기여 방안, 거주국과 한국과의 관계 이해)으로 6박 7일간 모국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할 예정이다. (김상욱)

김상욱 고려문화원장/본지주필 카스피해 횡단 국제 운송노선(TITR)   우리나라와 같이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물류 비용은 곧 제품의 현지 가격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수출경쟁력으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물류네트워크 유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는 제품의 경우는 배에 실어 운송하고 부피가 작고 고가의 제품의 경우 항공운송을 하지만, 철도 운송은 비용대비 시간단축 측면에서 매우 유효한 운송수단이다. 실제로, 우리기업들의 대 중앙아, 동유럽 수출의 경우 주로 유라시아 횡단철도를 통해 화물운송을 해 오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방의 경제제재가 시작되면서 전통적인 물류망이 흔들리자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물류 네트워크에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해당 노선은 '카스피해 횡단 국제 운송노선'(TITR)이다.  '중부회랑'(미들 까리도르) 라고도 불리는 이 노선은 카자흐스탄을 동서로 횡단해서 카스피해를 건너는데, 기존 시베리아횡단 철도(TSR) 와 달리 러시아 영토를 거치지 않는 유일한 유라시아 대륙횡단철도 루트이다.     이를 통해 카자흐스탄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을 연결하는 철도 및 육상 루트를 독점함으로써 적지 않은 철로·도로 통과 운송료를 징수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에는 이 노선을 통한 화물 운송량이 2022년과 비교했을 때 86퍼센트나 성장해서 276만 톤을 기록했고, 올해는 420만 톤이 운송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세계은행은 "2030년엔 3배 증가해 1,100만 톤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현재 카자흐스탄은 이 노선을 확대하기 위해 국가 차원 인프라 투자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장기화되는 우크라이나 분쟁으로 러시아와의 무역에 차질을 입자 그 대안으로 중앙아시아와의 무역 파트너 관계를 확대 구축하는 한편, 유럽과 중앙아시아로의 안정적인 운송 루트를 확보함과 동시에 전통적 물류 루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대안으로 이 노선을 주목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국내 물류 업계의 카자흐스탄 출장이 잦아지고 있고 우리 제품을 실은 컨테이너 화물 기차가 그대로 철도 레일이 깔려있는 대형 선박으로 들어가서 카스피해를 건너가는 현장을 둘러보고 물류 효율성을 체크하고 있다. 화물 기차가 그대로 선박 안으로 들어간다고?   이것을 '레일페리' 라고 하는데,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부닷가에 내렸다가 다시 선박에 선적하는 것이 아니라 화물을 싣은 기차가 레일이 깔려있는 배 속으로 그대로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카스피해를 건넌 후 화물 기차는 배에서 나와 유럽연합, 우크라이나, 튀르키예를 잇는 선박들이 대기하는 조지아의 포티 항구까지 달리게 된다. 그만큼 화물의 선적과 양하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카스피해가 마치 한반도와 비슷한 모양이고 크기는 조금 더 큰 편이다. (동서는 약 300km, 남북은 약 1,200km)  이 카스피해에 동쪽 항구인 카자흐스탄의 악타우항과 서쪽인 아제르바이잔의 바쿠항을 연결하는 노선에 레일 페리가 운항되고 있다.     이 항로를 이용하는 주요 화물을 살펴보면, 첫째, 카프카즈 지역과 중앙아시아 간에 이동하는 화물. 둘째, 대 이란 제재로 인하여 이란을 경유하지 않으려는 화물. 셋째, 러시아를 경유해서 가지 않으려는 우크라이나, 터키, 유럽연합. 미국으로 향하는 화물들. 넷째, 러시아가 경유 운송을 허락하지 않는 항목에 걸리는 화물들, 예를 들면 유럽연합 식료품. 다섯째, 러시아의 비싼 부두 보관료나 까다로운 통관 절차, 화물 정체를 피하고자 하는 화물들이 주로 운송된다.   그동안 러시아와 이란을 거치지 않고 유라시아를 동서로 관통할 방법은 없었는데, 이 카스피해 횡단 루트는 러시아와 이란을 우회하는 유일한 통로로써 ‘친서방 루트’로 활용되고 있다.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러-카자흐간 갈등의 원인이 되다.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본지 주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바이코누르는 카자흐어로 '약초가 많은 갈색 땅'을 의미한다.   신생 독립국 카자흐스탄의 미래를 밝게도 어둡게도 할 요소 중 핵심적인 세 요소를 꼽으라면 러시아, 중국, 카스피해의 석유 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경을 접하고 있는 초강대국 러시아와 중국은 신생국 카자흐스탄에 때로는 협박을 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달콤한 유혹의 손짓을 보내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은 국경 문제를 놓고 이웃의 초강대국을 자극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익에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그들의 압력에 양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자흐스탄은 카스피해에서 미국석유회사 및 국제 송유관 콘소시엄과 상당히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웃한 중소 주변국들은 정치적 경쟁심과 동시에 질투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독립 초기, 카자흐스탄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과 우크라이나와 같은 독립국가연합(CIS)들 가운데 가장 선두에 위치해 있었다. 경제적 개혁과 정치적 안정 측면에서는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였다. 이 시기 신생국 카자흐스탄이 중앙아시아에서 벌인 '빅 게임'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했다.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놓고 러와 갈등 발생   카자흐스탄은 루블과 텡게화의 통화 쇼크로 인한 동요를 진정시키자 마자 보리스 옐친 정부와 관계를 긴장시키는 또 하나의 분쟁이 발생했다. 그것은 우주발사기지 바이코누르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시절 미국과 함께 우주 패권을 다투던 핵심적인 장소였던 이 기지는 양국간의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바이코누르의 폐쇄를 요구하는 카자흐스탄의 여론은 모스크바 지도부를 격노하게 했다.   러시아인들이 소련의 우주 연구 계획의 핵심인 바이코누르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당초부터 바이코누르는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기지로 건설되었다. 후에 그 역할이 수정되어 수많은 우주선들의 역사적 발사를 위한 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1957년 지구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그리고 1961년 유리 가가린에 의한 최초의 궤도 비행, 1963년 최초의 여류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의 비행과 뒤이은, 소유즈, 프로톤, 치클론 과 같은 우주선 발사가 있었다. 당시 이러한 업적은 미국의 유사한 프로그램을 앞질렀다. 그래서 러시아 국민과 학자들 특히 바이코누르에서 우주 연구계획을 주관했던 사람들에는 커다란 자긍심의 원천이었다.   원래 바이코누르 는 카자흐어로 '약초가 많은 갈색 땅'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랄해로 부터 동쪽으로 약 120마일 떨어진 초원 지역의 비옥한 지대를 상징한다. 소비에트 정권은 그곳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처음엔 레닌스크라 불렀다. 길이 약 60마일, 폭 약 50마일에 이르는 지역을 소련군 사단이 지키던 기지에 소련은 학자들과 기술자들 그리고 군인들을 정착시켜 완벽한 도시를 건설했다.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생태환경적 이유를 들어 우주 기지의 폐쇄를 요구했다. 특히, 아랄해의 고갈과 군사기지 주변의 농경지 파괴라는 환경보호 차원과 함께 지리적 위치상 우주기지에 대한 관할권이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바이코누르를 건설한 것이 바로 그들이고 40년 이상 그것을 관리해 왔고 그것을 세계적 규모의 특수한 과학센터로 변모시켰으므로 우주기지는 여전히 그들의 관할 하에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사이에서 심한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양측이 1992년 우호와 협력에 대한 조약에 조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코누르는 양국 관계을 악화시킬 수 있는 발화점이었다.   1994년 3월, 이 문제를 놓고 양국 정상은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젊지만 노회한 나자르바예프는 현장의 상황을 잘 챙겨서 갔지만 옐친 또한 사전준비를 철저히 잘 했다. 오랜 협상 끝에 양국 정상은 20년간 임대에 관한 협정에 조인했다. 다만, 미리 조율해 놓은 협정문안에 연간 임대료 1억 1천500만 달러 라는 문구가 본문에 삽입되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자신의 전기에서 이때를 회상하면서,  바이코누르에 관한 어렵고 중대한 협약의 조인은 보드카를 곁들인 격의 없는 소통 방식 때문이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바이코누르에 대한 양국간 신속한 합의는 두 나라의 이해관계에 부응하는 것이며 지루한 협상과 오랜 대결보다는 신속한 합의가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당사국들이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 국회와 카자흐스탄 국회를 포함하여 격렬한 비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는 고비를 잘 넘겼고, 첫 기지 임대료는 5년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 러시아의 우주 연구 계획은 계속되었고, 카자흐스탄의 학자들과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선 연구와 조종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11.15.(금) 아스타나 시, 나자르바예프 대학교 K-pop 놀이 한마당 -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원장 구본철, 이하 문화원)은 11월 15일(금) 18시 주재국 최고의 수학기관인 아스타나 시, 나자르바예프 대학에서 카자흐스탄 청년들을 대상으로 ‘K-pop과 함께하는 놀이 한마당’ 행사를 개최하였다. 한국문화원은 이번 행사에서 나자르바예프 대학교 내, 한국어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활발하게

   인천광역시 서구(구청장 강범석) 관내 기업인들로 구성된 무역사절단은 8일(현지시간), 알마티 라핫 팰리스 호텔 컬퍼런스 홀에서 현지 바이어들과 수출상담회 및 시장조사를 진행했다.    이 행사는 우수한 기술력과 제품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해외 마케팅 역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서구 관내 중소기업의 해외 시장 판로 개척을 지원하기 위해 추진됐다.    이번에 알마티를 방문한 기업들은 인천시 서구가 사전 시장조사를 벌여 선정한 수출 가능성이 높은 우수업체 10곳이었다. 주로 건축자재 생산업체들이었는데, 현장에서 제품과 관련한 양해각서(MOU)가 체결되기도 했다.   강범석 서구청장은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한 중소기업들이 판로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안타까웠다"면서 "앞으로도 잠재력이 큰 중앙아시아 시장을  개척할 수 있도록 꾸준히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강 구청장과 기업인들은 고려인 동포기업인으로서 중앙아시아 최대의 아이스크림 공장을 가동하는 신라인 그룹의 신 안드레이 회장을 만나 신라인 그룹이 추진중인 '종합식품클러스터' 계획에 대해 듣고, 관내 중소식품기업들의 현지진출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는 알마티 주지사도 함께 했는데, 다리바예프 바우르잔 주지사는 종합식품클러스터에 입주하는 식품회사에 대한 지방정부 차원의 지원을 약속했다.   인천시 상공회의소는 알마티시 상공회의소 간 교류협력 강화를 통해 인천 지역 기업들과 알마티 지역 기업들간의 기업활동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번에 파견된 기업들은 ㈜비티알수성(엘리베이터부품), ㈜우석엔프라(마사지기 등), ㈜대원테크놀로지(공기살균기), ㈜에이스홈데코(도어), ㈜대림산업(타일/석재용 에폭시 접착제), ㈜오빌(파티션), 한국코머스켐(주)(청소용 세제), ㈜에코데이인터내셔널(LED 경관 조명기구), ㈜이온폴리스(샤워 필터), ㈜유창씨엠아이(중장비 부품) 등이다.

외국인 투자 유치와 사유화를 어떻게 성공시킬 것인가? 김상욱  고려문화원장(본지주필) <알마티 필립 모리스 공장>  신생 독립국 카자흐스탄 경제의 미래는 한마디로 암울 그 자체였다. 갑작스런 소연방의 해체와 준비되지 않은 체제전환 과정속에서 치솟는 물자부족과 물가폭등과 함께 소수 올리가르히들의 '날강도식 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카자흐스탄은 적극적으로 외국자본 유치와 자본주의 경제 운영 능력의 도입을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상황은 녹녹치 않았다. 어떤 외국 기업이 자국민  뿐만 아니라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법적으로 안정된 투자여건을 갖추지 않은 옛 공산주의 국가에 투자를 하겠는가? 외국인 투자자와 기업들은 기업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는 즉, 재산권과 이윤 반출을 보장하는 카자흐스탄의 법률 정비를 전제조건으로 요구했다.   당시 나자르바예프는 1993년에서 1995년 사이 기업 친화적인 제도를 보장하기 위해 141개의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이는 주로 외국인 투자활동과 연관된 경제문제에 관한 것으로써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화 였다.   사유화에 관한 첫번째 실험은 카자흐스탄 정부가 1993년 미국의 필립 모리스 회사에 알마티에 있던 국영담배공장을 1억 2천만 달러에 매각한 것이었다. 국영기업으로 있으면서 공장은 거의 파산지경이었고,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지불하지 못하고 기계부품을 구입하거나 새로운 설비에 투자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주인이 된 필립모리스사는 공장에 미화 2억 4천만 달러를 투입하여 새로운 생산설비를 설치하고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고, 높은 이윤을 보장했다. 이것은 사유화의 좋은 예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심각한 세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 국고에 경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방치되었던 기업이 살아남으로써 직원들과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갔다.   경제이론이 산업현실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나자르바예프는 사유화를 위해 보다 더 과감한 실험을 결심하였다. 그 후 2년 동안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철강 공장과 석탄광, 금광, 전력회사, 정유 기업, 국영 항공사를 포함한 94개의 대형 국영기업들을 살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한편, 이같은 조치는 국부의 유출이라는 불가피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 당시에는 외국인들과 같이 있는 것 조차 반역이라고 간주되던 '소련시대의 외국인 혐오증'을 아직도 가지고 있던 반대론들이 있었고, 국영기업의 사유화를 서두르는 과정에서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자르바예프는 사유화를 '공정과 불공정'의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오직 '효율성과 비효율성'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밀어붙였다. 이때 남긴 나자르바예프의 유명한 말이 있다. 그는 "모두가 완벽하게 확신할 때까지 기다린 후 개혁을 착수할 만큼 시간이 없다. 완벽한 동의를 기다리겠다면 국가도 경제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며 폭넓은 사유화를 추진했다. 비판자들은 나자르바예프의 정실주의로 인해 그의 친척들을 포함한 소수의 카자흐인들만이 막대한 부를 차지했다고 비난하였다.     나자르바예프의 카자흐스탄 정부는 '중도적 사유화', '수표에 의한 사유화', '소규모 사유화', '농업 사유화' 같은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서 실행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다양한 서비스업종과 자영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앞장에서 다룬 새로운 국가 통화의 도입과 함께 사유화와 같은 체제 전환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포함된 개혁 프로그램이 가동되자 카자흐스탄의 경제는 차츰 소련 해체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이 2,600%에 달했던 악몽같은 93년 이후 일련의 개혁조치와 함께 1995년 무렵 인플레이션은 59%까지 완화되었고 그 후 꾸준히 내려갔고, 1996년 부터는 국내 총생산이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경 90%이상의 카자흐스탄 제조 기업들이 사유화되었다.   물론 1998~1999년 한국이 IMF사태를 포함한 아시아에서의 경기 하락과 2008~2009년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는 카자흐스탄의 경제도 불가피하게 침체를 겪었다. 그러나 이 두 시기 사이 9년간 카자흐스탄은 매년 두 자리수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새로운 통화, 새로운 헌법, 새로운 경제 김상욱 고려문화원장/본지주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국민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든 핵무기 문제를 신속하게 조정했다. 그에 비해 경제와  헌법에 관한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사실, 독립 초창기 나자르바예프는 판단의 오류를 범했지만 급진적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임에 따라 비판자들은 그를 비민주적이라고, 심지어 독재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에 수립된 소비에트 연방이 그동안 인류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회주의라는 길을 걸어갔다면, 소련의 해체 후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 과정도 처음 경험해보는 미지의 길이었다. 신생 독립국 카자흐스탄의 역사와 사회경제적인 조건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거기에 더해 체제전환 과정에서 여과없이 노출된 인간의 탐욕은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루블화와 관련된 위기도 예견된 것이었고 실제 카자흐스탄의 체제이행과정에 치명타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독립했으나 루블화 통화 공급권이 여전히 모스크바 은행가들에게 달려있었다. 지금처럼 신용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통화 혹은 카드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은 그 당시에는 중앙은행이 갖고 있던 통화공급권은 일반 경제활동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앙은행장에게 내려진 비밀 명령

젤톡산과 나자르바예프의 등장 김상욱  본지주필/고려문화원장 '젤톡산' <알마티에 있는 젤톡산 기념비>      이번호 부터는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이라는 제목의 초대 대통령의 전기를 토대로 당시의 급박하게 돌아갔던 국제정세와 카자흐스탄의 운명을 몇 회에 걸쳐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1986년  12월,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후보로 당시 공화국 총리였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를 거부하고 대신  러시아의 고위 관리 겐나지 콜빈에게 맡겼다.  이것은 단순히 지명자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 실수가 되었다.  콜빈의 도착에 뒤이어 발생한 카자흐스탄 젊은이들의 시위가 결국 소비에트 연방을 붕괴시킨 민족문제 발생의 첫 번째 징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자르바예프는 쿠나예프 제 1서기의 퇴진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르바예프도 콜빈의 지명에는 놀랐다. 그가 임명된 이유는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이자 고르바초프의 심복이었기 때문이지만 새로운 직무를 수행하기에 그는 자질이 부족하였다.  콜빈은 카자흐스탄을 알지 못했고 이전에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는 카자흐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고, 카자흐스탄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국민들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지명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나자르바예프는 콜빈이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게오르기 라주몹스키 함께 알마티에 도착하던 1986년 12월 15일  제1 서기 지명에서 자신이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단일 의제인 ‘조직 문제’를 가지고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윈회 회의가 열렸다.  이것은 지도부의 변화를 의미하는 잘 알려진 소비에트식이 수사적 표현이었다.     이 회의에서 라주몹스키는 쿠나예프의 퇴진을 선언하고 공석이 된 자리에 콜빈을 단일 후보로 추천했다. 그가 추천한 후보는 아연한 침묵속에서 참석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18분 뒤 회의는 끝났다.   나자르바예프는 그러한 결정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를 반대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중앙위원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르바예프는 모스크바에 절대 복종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나 카자흐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다.   알마티의 대학생들이 제일 먼저  콜빈 임명에 반대했다. 많은 대학생들은  “우리는 카자흐인 지도자를 요구한다”  “독재는 물러가라”  “모든 민족은 민족 지도자를 원한다”   “우리는 레닌의 민족주의 정책을 지지한다”  “개혁한다하면서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라는 슬로건이 쓰인 깃발과 플랭카드를 들고 있었다.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처음 참가자는 300명을 넘지 않았다.   주로 대학교와 단과대학의 젊은이들이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즉시 현장으로 향했고 즉시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에 둘러싸였다.  나자르바예프는 차에서 내려 시위자들과 함께 행진하였다.   시위 참가자수는 2천여명으로 늘어났으나 분위기는 평화롭게 유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광장(현, 공화국 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부청사(현, 알마티 시청)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당 간부들 사이의 분위기는 공포에 가까웠다. 그러한 규모의 항의 시위는 실제로 소연방, 특히 카자흐스탄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콜빈을 지명하기 위해 이곳에 온 모스크바 사절단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랐다. 그들은 사태의 책임자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며 카자흐 지도부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고 카자흐 지도부도 당황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나자르바예프는 신중해 줄 것을 호소한 뒤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리들에게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라고 제안했다.   제1서기로 임무를 시작한 첫날 콜빈은 서로 상반된 의견을 들어야만 했다. 주로 KGB와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의 모스크바 출신 참모들은 시위대를 힘으로 진압하는 권위주의적 방법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알마티 주둔군은 전투 태새를 갖추고 경찰은 광장에 저지선을 만들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경찰관들 특히 민병대원들은 시위대에 공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광장 인근에 있는 민병대원들에게 시위대 해산을 위해 곤봉으로 무장시키라는 지시가 내려갔지만 당시 이 지역 책임자 누르타이 아비카예프는  몽둥이로 시위대를 구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모스크바의 명령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가두시위가 알마티에서 12월 17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중앙아시아 관구 사령관 블라디미르 로보프 장군은 콜빈에게 군병력의 출동을 거부했다. 이 용감한 결정은 이후에 발생한 것 보다 훨씬 더 강한 유혈 충돌을 사전에 예방한 게 틀림없었다.     시위를 지켜보고 있던 당 고위 간부들은 불안했다. 그들은 광장 주변에 설치된 거대한 확성기를 통해 큰 음악소리를 내보내어서 연설이 들리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군중들을 자극하는 트리거가 되었다.   성난 군중들은 연단 쪽으로 눈덩어리와 얼음조각 그리고 돌멩이를 건지기 시작했다. 돌멩이는 나자르바예프가 말하고 있던 마이크에 맞고 튕겨져 나가 그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   콜빈과 모스크바 출신 당 간부들은 물대포를 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군중들 속에서 알코올 소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누군가가 수제 로켓을 발사했다. 이 중 하나가 콜빈 집무실의 창문에 명중했다. 모스크바에스는 이것이 로켓 공격으로 보고되었다.   이  보고는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12월 17일 저녁   물러난 쿠나예프와 직접  통화를 하게 만들었고 정부 청사로 향하고 있는 젋은이들이 시위행진을 멈추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쿠나예프는 시위대에게 영향을 미칠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미 흩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의 사태가 보여주듯이 그들의 분노는 사글라들지 않았다.   밤에 알마티로 특별기를 타고 크렘린 고위 관리들이 도착했다. 주둔군 사령관의 신중한 입장과는 반대로 내무부 장관 블라소프는 경찰 기동대와 내무부 특수부대를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이 부대들은 12월 17일 일 밤 스베르들롭스크,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같은 러시아 도시들에 있는 병영에서 비행기로 카자흐스탄으로 수송되었다.   12월 18일 늦은 아침 알마티는 약 1만 5천명의 시위대로 가득 찼다. 그들은 카자흐 노래들을 부르며 사기를 북돋우었다.  노래들 중 특별한 것은 준가르족의 침입에 용감하게 저항한 유목민 무사들에 대한 17세기의 장엄한 멜로디인 옐리마이였다.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대해 경찰과 특수기동대는 ‘눈보라 작전’이라는 코드명 하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진압을 시작했다.   이 당시 공화국 총리였던 나자르바예프는 이 비밀 작전에 대해 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는 모스크바 그룹의 손에 장악된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전날 시위자들이 콜빈을 대체하는 후보로 그이 이름을 외쳐댔기 때문이었다.   시위대는 빠르게 흩어지게 만들었지만 2명이 죽고 200명이 중상을 입는 큰 희생을 낳았다.  그 후 4년 동안 이것은 소연방 전역에 심각한 결과를 야기했다. 다른 민족들의 민족운동이 알마티 시위자들을 뒤따라 모스크바의 중앙집권적 통치에 대한 독자적인 저항 운동으로 변해 거리로 나왔기 때문이다.   젤톡산 이라 불리게 된 1986년 12월 사태 이후 카자흐스탄은 불안정한 공화국이 되었다.   “젊은이들에 대한 무력 남용은 비극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시위가 시작된 것이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개혁과 개방이라는 고르바초프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탄압된 이후 그들은 소비에트 통치 체제애 대한 모든 존경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라고 나자르바예프는 말하였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2 1991년 8월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 1991년 8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의 모습. /미국 하버드대도서관   공산권의 종주국, 소련에서 시작된 80년대 후반의 개혁, 개방 정책은 당시 소련의 위성국들인 동유럽과 중앙유럽에서는 통제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폴란드, 헝가리를 필두로 한 1989년 동유럽에서의 개혁의 물결은 변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동참으로 혁명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물결은 동유럽 위성 국가들을 넘어 종주국인 소련에도 영향을 미쳤고, 1991년부터 이미 소련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소연방 구성국들에서 벌어진 국민투표 결과로는 연방 유지가 더 높게 나왔지만,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이미 독립을 확정짓고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소련이 무너져가는 분위기에 반발한 공산당 보수파들은 소연방을 유지하고 고르바초프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르바초프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략무기 감축 협정을 조인한 뒤 크림반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 틈을 타서 쿠데타를 감행했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에 돌아오기 하루 전 쿠데타 세력에 의해 크림반도의 별장에 감금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있을 신연방 조약을 구상하던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겐나디 야나예프에게 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라는 협박을 받고 별장에 연금을 당했다.   8월 19일 월요일 아침, 나자르바예프는 전날 옐친을 배웅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침 9시 자신을 깨우는 부인 사라로 부터 "방금 고르바초프가 병에 걸려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가 그 직무를 대행한대요" 라는 말을 들었다.   소연방 해체의 결정타가 된 이른바 1991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올레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KGB 의장,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그리고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국제농업연맹 의장, 알렉산드르 티지야코프 산업교통통신위원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었고 이들은 야나예프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결성했고 8월 18일 4시부터 앞으로 6개월간 일부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이 기간 동안 국정운영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맡는다고 알렸다.   신임 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 대통령령으로 긴급 동원령을 발표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 문제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으며 소련 헌법 제127조 7항에 따라 대통령직을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행한다"고 보도했으며, 수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 군 트럭을 동원한 군인들을 모스크바 시내로 진주시켰고 방송국과 공항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장악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온 세계가 우왕좌왕했으며 고르바초프의 생사와 행방에 대해 각종 예측이 쏟아졌다. 나자르바뎨프의 선택, 쿠데타 반대   나자르바예프는 다음날 투데타 세력이 만든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불법성을 개인 성명서를 작성했다.   8월20일 카자흐스탄 라디오와 TV를 통해 이 성명서는 낭독되었다. 나자르바예프의 성명서는 국제 언론을 통해 전 셰계로 타전되었다.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는 카자흐스탄의 비타협적인 입장은 모스크바에서 시민들의 대중 시위를 이끌어낸 보리스 옐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8월 20일 낮 옐친은 나자르바예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쿠데타 주동자들이 탱크로 옐친의 사무실을 습격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자르바예프에게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자르바예프는 즉시 모스크바로 가서 쿠데타 주동자들과 개인적으로 협상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옐친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고르바초프에 이해 소련의 총리로 추천된 바 있던 나자르바예프는 이 사태를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의 충고되로 그는 모스크바가 아닌 카자흐스탄을 지키면서도 모스크바에 있는 KBG 수장을 비롯한 쿠데타 주동자들과 전화통화를 통해서 설득작업을 시도했다.   옐친은 탱크 위로 올라서서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위해 총파업을 하자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에 수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분노하여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옐친의 봉기 촉구에 일부 군부대는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고 반기를 들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옐친을 지지하는 소련군과 시민들이 육탄벽을 쌓고 쿠데타군에 맞서서 저항하기 시작했고, 한편에선 공수부대가 옐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은 공수부대 사령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소련 시민들의 저항은 무척이나 거세졌고 시베리아에선 수천의 탄광 광부들이 전면 파업했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전면 파업과 함께 25만명의 시민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시민들은 장갑차와 전차를 공격하고 조종수들을 끌어내리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시민들의 반발은 사그라들긴커녕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화염병으로 쿠데타 군의 탱크에 맞서자 쿠데타군은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시민들은 고르바초프에게 여전히 충성하고 있던 KGB 알파 그룹과 합세하여 바리케이트를 쌓고 쿠데타 군을 맨몸으로 막아섰다.   이미 국가비상대책위원회의 명령은 먹혀들지 않고 있었고 통금령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반 쿠데타 세력의 중심에는 옐친이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KGB를 내세워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하며 한 발 물러서자 옐친에게 힘이 실렸다.   옐친은 항쟁을 촉구했고 정교회 세력도 옐친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시위 인파는 50만에 육박했다. 파업은 연방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당황하여 사분오열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세력은 미국과 유럽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반발이 본인들 예상을 초월한 것도 있었지만) 전국에서 들끓는 반발을 억누르지 못했다.   상황이 부정적임을 눈치챈 핵심 인사들이 슬금슬금 사퇴를 선언하며 발을 빼기 시작했고 동원된 군부대들도 이탈하여 옐친에게 합류했다. KGB 의장 크류츠코프는 자신들의 고르바초프 축출이 정당했음을 과시하고 타협을 위해 옐친에게 크림 반도로 가서 고르바초프를 데려가도 좋다고 했지만 이미 사태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8인 국가비상사태위원회들은 모스크바 공항을 통해 출국을 시도했다. 이에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의회는 이들의 체포 명령을 내렸다. 직후 그간의 실세로 거론되던 야나예프 대통령 권한 대행과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의장이 실각하고 군부의 강경 소장파들이 실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원회위원인 야조프 국방장관과 파블로프 총리가 물러나고 모이쉐프 소련군참모장이 국방장관에 오르면서 강경파들이 발악에 가까운 실력 행사에 나섰다.   8월 21일 자정, 8대의 장갑차가 시민들이 차벽으로 만든 바리케이트를 밀어내면서 국회의사당 진입을 시도했다.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져 장갑차들을 불태워버렸고, 탈출하던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세 명의 시민들이 숨지자 시위는 더더욱 거세졌다.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모스크바 시내를 피바다를 만들지 않고서는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결국 소련군은 모스크바 봉쇄를 풀고 철수해 버렸다.   이로써 사실상 공산당과 군부의 보수세력에 의해 시도된 쿠데타는 실패로 끝냈다.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 보수파들의 쿠데타는 해체의 수순을 밟아가던 소연방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동시에 소연방을 대체할 새로운 연방조약의 체결은 물 건너가고 있었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3 소연방의 붕괴

김상욱 카자흐스탄, 원전 도입 찬반 국민투표 실시 카자흐스탄에서는 옛 소련 시절인 1973년, 카스피해의 항구도시 악타우 지역에 원전이 처음 건설됐다가 1999년 폐쇄돼서 지금은 원전이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지난 7일, 원전 도입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됐고  71퍼센트의 찬성을 얻어 통과됐다. 현지 언론과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국민투표의 총유권자 1천200만 명 중 63.66퍼센트인 770여만 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이 중 71.12퍼센트가 찬성했다. 발표했습니다. 사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공해를 유발하는 화력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대신 원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대선에서 승리한 2019년에 원전 도입을 제안했다가 국민 반대 여론에 직면해서 한발 물러섰던 적이 있었다. 2019년 원전 건설 반대 여론… 왜? 당시 국민들의 반핵 정서가 생각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1949년 소련의 첫 번째 핵실험이 실시된 곳이 카자흐스탄이었고, 이후 소련이 행한 715회의 핵실험 중 절반 이상인 456회 의 핵실험이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지역에서 행해졌다. 사실상 소련 핵무기의 산실이 된 셈인데, 이러한 핵실험 때문에 카자흐스탄 주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핵실험장이 있던 쿠르차토프 라는 도시는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비밀도시였다. 여기서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세메이시의 주민들까지도 방사능 낙진피해를 입었는데, 카자흐스탄의 주장에 따르면, 50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한다.  카자흐인들이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비로소 이곳에 대해 알게 되었고, 끔찍한 현실에 분노해서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91년 8월 29일에 핵실험장을 폐쇄할 수 있었다. UN은 8월 29일을 국제 핵실험 반대의 날로 선포하여 이 일을 기념함으로써 측면 지원을 했었다. 치열한 카자흐 원전 수주전 카자흐스탄 원전 건설에는 100억∼120억 달러(약 13조 5천억∼16조 2천억 원)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토카예프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통해 원전 도입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을 때부터, 원전 건설은 기정사실화됐고 한국, 중국, 프랑스, 러시아 등 국가들이 참여하는, 사실상의 물밑 수주전이 벌어졌다. 카자흐스탄은 과거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인데, 국민투표 전부터 카자흐스탄 당국이 러시아 업체와 원전을 건설키로 이미 결정했고, 형식적으로 치르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을 정도로 수주 상황이 녹녹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토카예프 대통령은 수도 아스타나에서 투표한 뒤 취재진에 잠재적 (원전 건설) 계약자로 단일 국가나 업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개인적 생각은 최첨단 기술을 보유한 글로벌 업체들로 구성된 국제 컨소시엄이 카자흐스탄에서 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특정 국가의 한 업체에게 기회를 줄 것 같지는 않다. 원전 건설 부지, 울켄… 한국과의 과거 인연 원전이 들어설 예정 부지는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인 알마티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져 있는 ‘울켄’이라는 도시이다. 원전은 대량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닷가나 큰 저수량을 가진 대규모 호수가에 건설된다. 울켄 지역은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호수인 발하쉬 호수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소련 시절부터 대형 발전소 건설 최적지로 꼽혀왔던 곳이다.   이곳은 2007년 카자흐스탄 정부가 '울켄 화력발전소 건설' 공사를 발주한 곳이기도 한데, 이때 한국 기업이 수주에 성공했었다.  이 기업이 (삼성엔지니어링)이 시공사로 선정되어 착공식은 물론이고 상당 부분의 기반 조성 공사까지 진행되었었다.  그런데 완성 후 전기요금 인상 이슈 등 제기된 몇 가지 이슈를 양국이 풀지 못해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카자흐스탄 동포사회는 이번에 전체 수주를 못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공정을 수주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우라늄 최대 생산국인 자원부국이지만 주로 석탄을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으로 국내 전력 수요를 충족해 왔고, 또 부족한 전력은 주로 러시아로부터 들여오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이제 자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선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원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일각에선 화력발전소 연료로 석탄보다 공해 유발이 적은 가스를 사용하면 안정적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