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1
젤톡산과 나자르바예프의 등장 김상욱 본지주필/고려문화원장 '젤톡산' <알마티에 있는 젤톡산 기념비> 이번호 부터는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이라는 제목의 초대 대통령의 전기를 토대로 당시의 급박하게 돌아갔던 국제정세와 카자흐스탄의 운명을 몇 회에 걸쳐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1986년 12월,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후보로 당시 공화국 총리였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를 거부하고 대신 러시아의 고위 관리 겐나지 콜빈에게 맡겼다. 이것은 단순히 지명자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 실수가 되었다. 콜빈의 도착에 뒤이어 발생한 카자흐스탄 젊은이들의 시위가 결국 소비에트 연방을 붕괴시킨 민족문제 발생의 첫 번째 징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자르바예프는 쿠나예프 제 1서기의 퇴진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르바예프도 콜빈의 지명에는 놀랐다. 그가 임명된 이유는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이자 고르바초프의 심복이었기 때문이지만 새로운 직무를 수행하기에 그는 자질이 부족하였다. 콜빈은 카자흐스탄을 알지 못했고 이전에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는 카자흐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고, 카자흐스탄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국민들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지명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나자르바예프는 콜빈이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게오르기 라주몹스키 함께 알마티에 도착하던 1986년 12월 15일 제1 서기 지명에서 자신이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단일 의제인 ‘조직 문제’를 가지고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윈회 회의가 열렸다. 이것은 지도부의 변화를 의미하는 잘 알려진 소비에트식이 수사적 표현이었다. 이 회의에서 라주몹스키는 쿠나예프의 퇴진을 선언하고 공석이 된 자리에 콜빈을 단일 후보로 추천했다. 그가 추천한 후보는 아연한 침묵속에서 참석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18분 뒤 회의는 끝났다. 나자르바예프는 그러한 결정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를 반대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중앙위원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르바예프는 모스크바에 절대 복종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나 카자흐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다. 알마티의 대학생들이 제일 먼저 콜빈 임명에 반대했다. 많은 대학생들은 “우리는 카자흐인 지도자를 요구한다” “독재는 물러가라” “모든 민족은 민족 지도자를 원한다” “우리는 레닌의 민족주의 정책을 지지한다” “개혁한다하면서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라는 슬로건이 쓰인 깃발과 플랭카드를 들고 있었다.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처음 참가자는 300명을 넘지 않았다. 주로 대학교와 단과대학의 젊은이들이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즉시 현장으로 향했고 즉시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에 둘러싸였다. 나자르바예프는 차에서 내려 시위자들과 함께 행진하였다. 시위 참가자수는 2천여명으로 늘어났으나 분위기는 평화롭게 유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광장(현, 공화국 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부청사(현, 알마티 시청)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당 간부들 사이의 분위기는 공포에 가까웠다. 그러한 규모의 항의 시위는 실제로 소연방, 특히 카자흐스탄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콜빈을 지명하기 위해 이곳에 온 모스크바 사절단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랐다. 그들은 사태의 책임자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며 카자흐 지도부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고 카자흐 지도부도 당황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나자르바예프는 신중해 줄 것을 호소한 뒤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리들에게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라고 제안했다. 제1서기로 임무를 시작한 첫날 콜빈은 서로 상반된 의견을 들어야만 했다. 주로 KGB와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의 모스크바 출신 참모들은 시위대를 힘으로 진압하는 권위주의적 방법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알마티 주둔군은 전투 태새를 갖추고 경찰은 광장에 저지선을 만들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경찰관들 특히 민병대원들은 시위대에 공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광장 인근에 있는 민병대원들에게 시위대 해산을 위해 곤봉으로 무장시키라는 지시가 내려갔지만 당시 이 지역 책임자 누르타이 아비카예프는 몽둥이로 시위대를 구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모스크바의 명령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가두시위가 알마티에서 12월 17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중앙아시아 관구 사령관 블라디미르 로보프 장군은 콜빈에게 군병력의 출동을 거부했다. 이 용감한 결정은 이후에 발생한 것 보다 훨씬 더 강한 유혈 충돌을 사전에 예방한 게 틀림없었다. 시위를 지켜보고 있던 당 고위 간부들은 불안했다. 그들은 광장 주변에 설치된 거대한 확성기를 통해 큰 음악소리를 내보내어서 연설이 들리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군중들을 자극하는 트리거가 되었다. 성난 군중들은 연단 쪽으로 눈덩어리와 얼음조각 그리고 돌멩이를 건지기 시작했다. 돌멩이는 나자르바예프가 말하고 있던 마이크에 맞고 튕겨져 나가 그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 콜빈과 모스크바 출신 당 간부들은 물대포를 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군중들 속에서 알코올 소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누군가가 수제 로켓을 발사했다. 이 중 하나가 콜빈 집무실의 창문에 명중했다. 모스크바에스는 이것이 로켓 공격으로 보고되었다. 이 보고는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12월 17일 저녁 물러난 쿠나예프와 직접 통화를 하게 만들었고 정부 청사로 향하고 있는 젋은이들이 시위행진을 멈추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쿠나예프는 시위대에게 영향을 미칠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미 흩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의 사태가 보여주듯이 그들의 분노는 사글라들지 않았다. 밤에 알마티로 특별기를 타고 크렘린 고위 관리들이 도착했다. 주둔군 사령관의 신중한 입장과는 반대로 내무부 장관 블라소프는 경찰 기동대와 내무부 특수부대를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이 부대들은 12월 17일 일 밤 스베르들롭스크,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같은 러시아 도시들에 있는 병영에서 비행기로 카자흐스탄으로 수송되었다. 12월 18일 늦은 아침 알마티는 약 1만 5천명의 시위대로 가득 찼다. 그들은 카자흐 노래들을 부르며 사기를 북돋우었다. 노래들 중 특별한 것은 준가르족의 침입에 용감하게 저항한 유목민 무사들에 대한 17세기의 장엄한 멜로디인 옐리마이였다.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대해 경찰과 특수기동대는 ‘눈보라 작전’이라는 코드명 하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진압을 시작했다. 이 당시 공화국 총리였던 나자르바예프는 이 비밀 작전에 대해 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는 모스크바 그룹의 손에 장악된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전날 시위자들이 콜빈을 대체하는 후보로 그이 이름을 외쳐댔기 때문이었다. 시위대는 빠르게 흩어지게 만들었지만 2명이 죽고 200명이 중상을 입는 큰 희생을 낳았다. 그 후 4년 동안 이것은 소연방 전역에 심각한 결과를 야기했다. 다른 민족들의 민족운동이 알마티 시위자들을 뒤따라 모스크바의 중앙집권적 통치에 대한 독자적인 저항 운동으로 변해 거리로 나왔기 때문이다. 젤톡산 이라 불리게 된 1986년 12월 사태 이후 카자흐스탄은 불안정한 공화국이 되었다. “젊은이들에 대한 무력 남용은 비극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시위가 시작된 것이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개혁과 개방이라는 고르바초프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탄압된 이후 그들은 소비에트 통치 체제애 대한 모든 존경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라고 나자르바예프는 말하였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2 1991년 8월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 1991년 8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의 모습. /미국 하버드대도서관 공산권의 종주국, 소련에서 시작된 80년대 후반의 개혁, 개방 정책은 당시 소련의 위성국들인 동유럽과 중앙유럽에서는 통제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폴란드, 헝가리를 필두로 한 1989년 동유럽에서의 개혁의 물결은 변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동참으로 혁명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물결은 동유럽 위성 국가들을 넘어 종주국인 소련에도 영향을 미쳤고, 1991년부터 이미 소련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소연방 구성국들에서 벌어진 국민투표 결과로는 연방 유지가 더 높게 나왔지만,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이미 독립을 확정짓고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소련이 무너져가는 분위기에 반발한 공산당 보수파들은 소연방을 유지하고 고르바초프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르바초프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략무기 감축 협정을 조인한 뒤 크림반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 틈을 타서 쿠데타를 감행했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에 돌아오기 하루 전 쿠데타 세력에 의해 크림반도의 별장에 감금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있을 신연방 조약을 구상하던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겐나디 야나예프에게 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라는 협박을 받고 별장에 연금을 당했다. 8월 19일 월요일 아침, 나자르바예프는 전날 옐친을 배웅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침 9시 자신을 깨우는 부인 사라로 부터 "방금 고르바초프가 병에 걸려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가 그 직무를 대행한대요" 라는 말을 들었다. 소연방 해체의 결정타가 된 이른바 1991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올레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KGB 의장,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그리고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국제농업연맹 의장, 알렉산드르 티지야코프 산업교통통신위원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었고 이들은 야나예프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결성했고 8월 18일 4시부터 앞으로 6개월간 일부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이 기간 동안 국정운영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맡는다고 알렸다. 신임 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 대통령령으로 긴급 동원령을 발표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 문제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으며 소련 헌법 제127조 7항에 따라 대통령직을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행한다"고 보도했으며, 수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 군 트럭을 동원한 군인들을 모스크바 시내로 진주시켰고 방송국과 공항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장악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온 세계가 우왕좌왕했으며 고르바초프의 생사와 행방에 대해 각종 예측이 쏟아졌다. 나자르바뎨프의 선택, 쿠데타 반대 나자르바예프는 다음날 투데타 세력이 만든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불법성을 개인 성명서를 작성했다. 8월20일 카자흐스탄 라디오와 TV를 통해 이 성명서는 낭독되었다. 나자르바예프의 성명서는 국제 언론을 통해 전 셰계로 타전되었다.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는 카자흐스탄의 비타협적인 입장은 모스크바에서 시민들의 대중 시위를 이끌어낸 보리스 옐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8월 20일 낮 옐친은 나자르바예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쿠데타 주동자들이 탱크로 옐친의 사무실을 습격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자르바예프에게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자르바예프는 즉시 모스크바로 가서 쿠데타 주동자들과 개인적으로 협상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옐친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고르바초프에 이해 소련의 총리로 추천된 바 있던 나자르바예프는 이 사태를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의 충고되로 그는 모스크바가 아닌 카자흐스탄을 지키면서도 모스크바에 있는 KBG 수장을 비롯한 쿠데타 주동자들과 전화통화를 통해서 설득작업을 시도했다. 옐친은 탱크 위로 올라서서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위해 총파업을 하자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에 수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분노하여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옐친의 봉기 촉구에 일부 군부대는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고 반기를 들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옐친을 지지하는 소련군과 시민들이 육탄벽을 쌓고 쿠데타군에 맞서서 저항하기 시작했고, 한편에선 공수부대가 옐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은 공수부대 사령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소련 시민들의 저항은 무척이나 거세졌고 시베리아에선 수천의 탄광 광부들이 전면 파업했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전면 파업과 함께 25만명의 시민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시민들은 장갑차와 전차를 공격하고 조종수들을 끌어내리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시민들의 반발은 사그라들긴커녕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화염병으로 쿠데타 군의 탱크에 맞서자 쿠데타군은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시민들은 고르바초프에게 여전히 충성하고 있던 KGB 알파 그룹과 합세하여 바리케이트를 쌓고 쿠데타 군을 맨몸으로 막아섰다. 이미 국가비상대책위원회의 명령은 먹혀들지 않고 있었고 통금령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반 쿠데타 세력의 중심에는 옐친이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KGB를 내세워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하며 한 발 물러서자 옐친에게 힘이 실렸다. 옐친은 항쟁을 촉구했고 정교회 세력도 옐친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시위 인파는 50만에 육박했다. 파업은 연방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당황하여 사분오열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세력은 미국과 유럽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반발이 본인들 예상을 초월한 것도 있었지만) 전국에서 들끓는 반발을 억누르지 못했다. 상황이 부정적임을 눈치챈 핵심 인사들이 슬금슬금 사퇴를 선언하며 발을 빼기 시작했고 동원된 군부대들도 이탈하여 옐친에게 합류했다. KGB 의장 크류츠코프는 자신들의 고르바초프 축출이 정당했음을 과시하고 타협을 위해 옐친에게 크림 반도로 가서 고르바초프를 데려가도 좋다고 했지만 이미 사태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8인 국가비상사태위원회들은 모스크바 공항을 통해 출국을 시도했다. 이에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의회는 이들의 체포 명령을 내렸다. 직후 그간의 실세로 거론되던 야나예프 대통령 권한 대행과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의장이 실각하고 군부의 강경 소장파들이 실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원회위원인 야조프 국방장관과 파블로프 총리가 물러나고 모이쉐프 소련군참모장이 국방장관에 오르면서 강경파들이 발악에 가까운 실력 행사에 나섰다. 8월 21일 자정, 8대의 장갑차가 시민들이 차벽으로 만든 바리케이트를 밀어내면서 국회의사당 진입을 시도했다.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져 장갑차들을 불태워버렸고, 탈출하던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세 명의 시민들이 숨지자 시위는 더더욱 거세졌다.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모스크바 시내를 피바다를 만들지 않고서는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결국 소련군은 모스크바 봉쇄를 풀고 철수해 버렸다. 이로써 사실상 공산당과 군부의 보수세력에 의해 시도된 쿠데타는 실패로 끝냈다.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 보수파들의 쿠데타는 해체의 수순을 밟아가던 소연방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동시에 소연방을 대체할 새로운 연방조약의 체결은 물 건너가고 있었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3 소연방의 붕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