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톡산과 나자르바예프의 등장 김상욱  본지주필/고려문화원장 '젤톡산' <알마티에 있는 젤톡산 기념비>      이번호 부터는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이라는 제목의 초대 대통령의 전기를 토대로 당시의 급박하게 돌아갔던 국제정세와 카자흐스탄의 운명을 몇 회에 걸쳐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1986년  12월,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후보로 당시 공화국 총리였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를 거부하고 대신  러시아의 고위 관리 겐나지 콜빈에게 맡겼다.  이것은 단순히 지명자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 실수가 되었다.  콜빈의 도착에 뒤이어 발생한 카자흐스탄 젊은이들의 시위가 결국 소비에트 연방을 붕괴시킨 민족문제 발생의 첫 번째 징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자르바예프는 쿠나예프 제 1서기의 퇴진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르바예프도 콜빈의 지명에는 놀랐다. 그가 임명된 이유는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이자 고르바초프의 심복이었기 때문이지만 새로운 직무를 수행하기에 그는 자질이 부족하였다.  콜빈은 카자흐스탄을 알지 못했고 이전에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는 카자흐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고, 카자흐스탄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국민들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지명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나자르바예프는 콜빈이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게오르기 라주몹스키 함께 알마티에 도착하던 1986년 12월 15일  제1 서기 지명에서 자신이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단일 의제인 ‘조직 문제’를 가지고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윈회 회의가 열렸다.  이것은 지도부의 변화를 의미하는 잘 알려진 소비에트식이 수사적 표현이었다.     이 회의에서 라주몹스키는 쿠나예프의 퇴진을 선언하고 공석이 된 자리에 콜빈을 단일 후보로 추천했다. 그가 추천한 후보는 아연한 침묵속에서 참석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18분 뒤 회의는 끝났다.   나자르바예프는 그러한 결정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를 반대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중앙위원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르바예프는 모스크바에 절대 복종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나 카자흐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다.   알마티의 대학생들이 제일 먼저  콜빈 임명에 반대했다. 많은 대학생들은  “우리는 카자흐인 지도자를 요구한다”  “독재는 물러가라”  “모든 민족은 민족 지도자를 원한다”   “우리는 레닌의 민족주의 정책을 지지한다”  “개혁한다하면서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라는 슬로건이 쓰인 깃발과 플랭카드를 들고 있었다.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처음 참가자는 300명을 넘지 않았다.   주로 대학교와 단과대학의 젊은이들이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즉시 현장으로 향했고 즉시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에 둘러싸였다.  나자르바예프는 차에서 내려 시위자들과 함께 행진하였다.   시위 참가자수는 2천여명으로 늘어났으나 분위기는 평화롭게 유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광장(현, 공화국 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부청사(현, 알마티 시청)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당 간부들 사이의 분위기는 공포에 가까웠다. 그러한 규모의 항의 시위는 실제로 소연방, 특히 카자흐스탄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콜빈을 지명하기 위해 이곳에 온 모스크바 사절단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랐다. 그들은 사태의 책임자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며 카자흐 지도부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고 카자흐 지도부도 당황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나자르바예프는 신중해 줄 것을 호소한 뒤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리들에게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라고 제안했다.   제1서기로 임무를 시작한 첫날 콜빈은 서로 상반된 의견을 들어야만 했다. 주로 KGB와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의 모스크바 출신 참모들은 시위대를 힘으로 진압하는 권위주의적 방법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알마티 주둔군은 전투 태새를 갖추고 경찰은 광장에 저지선을 만들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경찰관들 특히 민병대원들은 시위대에 공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광장 인근에 있는 민병대원들에게 시위대 해산을 위해 곤봉으로 무장시키라는 지시가 내려갔지만 당시 이 지역 책임자 누르타이 아비카예프는  몽둥이로 시위대를 구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모스크바의 명령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가두시위가 알마티에서 12월 17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중앙아시아 관구 사령관 블라디미르 로보프 장군은 콜빈에게 군병력의 출동을 거부했다. 이 용감한 결정은 이후에 발생한 것 보다 훨씬 더 강한 유혈 충돌을 사전에 예방한 게 틀림없었다.     시위를 지켜보고 있던 당 고위 간부들은 불안했다. 그들은 광장 주변에 설치된 거대한 확성기를 통해 큰 음악소리를 내보내어서 연설이 들리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군중들을 자극하는 트리거가 되었다.   성난 군중들은 연단 쪽으로 눈덩어리와 얼음조각 그리고 돌멩이를 건지기 시작했다. 돌멩이는 나자르바예프가 말하고 있던 마이크에 맞고 튕겨져 나가 그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   콜빈과 모스크바 출신 당 간부들은 물대포를 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군중들 속에서 알코올 소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누군가가 수제 로켓을 발사했다. 이 중 하나가 콜빈 집무실의 창문에 명중했다. 모스크바에스는 이것이 로켓 공격으로 보고되었다.   이  보고는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12월 17일 저녁   물러난 쿠나예프와 직접  통화를 하게 만들었고 정부 청사로 향하고 있는 젋은이들이 시위행진을 멈추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쿠나예프는 시위대에게 영향을 미칠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미 흩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의 사태가 보여주듯이 그들의 분노는 사글라들지 않았다.   밤에 알마티로 특별기를 타고 크렘린 고위 관리들이 도착했다. 주둔군 사령관의 신중한 입장과는 반대로 내무부 장관 블라소프는 경찰 기동대와 내무부 특수부대를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이 부대들은 12월 17일 일 밤 스베르들롭스크,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같은 러시아 도시들에 있는 병영에서 비행기로 카자흐스탄으로 수송되었다.   12월 18일 늦은 아침 알마티는 약 1만 5천명의 시위대로 가득 찼다. 그들은 카자흐 노래들을 부르며 사기를 북돋우었다.  노래들 중 특별한 것은 준가르족의 침입에 용감하게 저항한 유목민 무사들에 대한 17세기의 장엄한 멜로디인 옐리마이였다.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대해 경찰과 특수기동대는 ‘눈보라 작전’이라는 코드명 하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진압을 시작했다.   이 당시 공화국 총리였던 나자르바예프는 이 비밀 작전에 대해 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는 모스크바 그룹의 손에 장악된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전날 시위자들이 콜빈을 대체하는 후보로 그이 이름을 외쳐댔기 때문이었다.   시위대는 빠르게 흩어지게 만들었지만 2명이 죽고 200명이 중상을 입는 큰 희생을 낳았다.  그 후 4년 동안 이것은 소연방 전역에 심각한 결과를 야기했다. 다른 민족들의 민족운동이 알마티 시위자들을 뒤따라 모스크바의 중앙집권적 통치에 대한 독자적인 저항 운동으로 변해 거리로 나왔기 때문이다.   젤톡산 이라 불리게 된 1986년 12월 사태 이후 카자흐스탄은 불안정한 공화국이 되었다.   “젊은이들에 대한 무력 남용은 비극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시위가 시작된 것이 대부분의 시위자들이 개혁과 개방이라는 고르바초프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탄압된 이후 그들은 소비에트 통치 체제애 대한 모든 존경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라고 나자르바예프는 말하였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2 1991년 8월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 1991년 8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의 모습. /미국 하버드대도서관   공산권의 종주국, 소련에서 시작된 80년대 후반의 개혁, 개방 정책은 당시 소련의 위성국들인 동유럽과 중앙유럽에서는 통제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폴란드, 헝가리를 필두로 한 1989년 동유럽에서의 개혁의 물결은 변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동참으로 혁명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물결은 동유럽 위성 국가들을 넘어 종주국인 소련에도 영향을 미쳤고, 1991년부터 이미 소련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소연방 구성국들에서 벌어진 국민투표 결과로는 연방 유지가 더 높게 나왔지만,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이미 독립을 확정짓고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소련이 무너져가는 분위기에 반발한 공산당 보수파들은 소연방을 유지하고 고르바초프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르바초프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략무기 감축 협정을 조인한 뒤 크림반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 틈을 타서 쿠데타를 감행했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에 돌아오기 하루 전 쿠데타 세력에 의해 크림반도의 별장에 감금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있을 신연방 조약을 구상하던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겐나디 야나예프에게 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라는 협박을 받고 별장에 연금을 당했다.   8월 19일 월요일 아침, 나자르바예프는 전날 옐친을 배웅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침 9시 자신을 깨우는 부인 사라로 부터 "방금 고르바초프가 병에 걸려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가 그 직무를 대행한대요" 라는 말을 들었다.   소연방 해체의 결정타가 된 이른바 1991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올레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KGB 의장,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그리고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국제농업연맹 의장, 알렉산드르 티지야코프 산업교통통신위원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었고 이들은 야나예프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결성했고 8월 18일 4시부터 앞으로 6개월간 일부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이 기간 동안 국정운영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맡는다고 알렸다.   신임 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 대통령령으로 긴급 동원령을 발표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 문제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으며 소련 헌법 제127조 7항에 따라 대통령직을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행한다"고 보도했으며, 수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 군 트럭을 동원한 군인들을 모스크바 시내로 진주시켰고 방송국과 공항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장악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온 세계가 우왕좌왕했으며 고르바초프의 생사와 행방에 대해 각종 예측이 쏟아졌다. 나자르바뎨프의 선택, 쿠데타 반대   나자르바예프는 다음날 투데타 세력이 만든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불법성을 개인 성명서를 작성했다.   8월20일 카자흐스탄 라디오와 TV를 통해 이 성명서는 낭독되었다. 나자르바예프의 성명서는 국제 언론을 통해 전 셰계로 타전되었다.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는 카자흐스탄의 비타협적인 입장은 모스크바에서 시민들의 대중 시위를 이끌어낸 보리스 옐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8월 20일 낮 옐친은 나자르바예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쿠데타 주동자들이 탱크로 옐친의 사무실을 습격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자르바예프에게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자르바예프는 즉시 모스크바로 가서 쿠데타 주동자들과 개인적으로 협상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옐친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고르바초프에 이해 소련의 총리로 추천된 바 있던 나자르바예프는 이 사태를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의 충고되로 그는 모스크바가 아닌 카자흐스탄을 지키면서도 모스크바에 있는 KBG 수장을 비롯한 쿠데타 주동자들과 전화통화를 통해서 설득작업을 시도했다.   옐친은 탱크 위로 올라서서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위해 총파업을 하자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에 수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분노하여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옐친의 봉기 촉구에 일부 군부대는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고 반기를 들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옐친을 지지하는 소련군과 시민들이 육탄벽을 쌓고 쿠데타군에 맞서서 저항하기 시작했고, 한편에선 공수부대가 옐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은 공수부대 사령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소련 시민들의 저항은 무척이나 거세졌고 시베리아에선 수천의 탄광 광부들이 전면 파업했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전면 파업과 함께 25만명의 시민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시민들은 장갑차와 전차를 공격하고 조종수들을 끌어내리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시민들의 반발은 사그라들긴커녕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화염병으로 쿠데타 군의 탱크에 맞서자 쿠데타군은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시민들은 고르바초프에게 여전히 충성하고 있던 KGB 알파 그룹과 합세하여 바리케이트를 쌓고 쿠데타 군을 맨몸으로 막아섰다.   이미 국가비상대책위원회의 명령은 먹혀들지 않고 있었고 통금령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반 쿠데타 세력의 중심에는 옐친이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KGB를 내세워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하며 한 발 물러서자 옐친에게 힘이 실렸다.   옐친은 항쟁을 촉구했고 정교회 세력도 옐친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시위 인파는 50만에 육박했다. 파업은 연방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당황하여 사분오열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세력은 미국과 유럽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반발이 본인들 예상을 초월한 것도 있었지만) 전국에서 들끓는 반발을 억누르지 못했다.   상황이 부정적임을 눈치챈 핵심 인사들이 슬금슬금 사퇴를 선언하며 발을 빼기 시작했고 동원된 군부대들도 이탈하여 옐친에게 합류했다. KGB 의장 크류츠코프는 자신들의 고르바초프 축출이 정당했음을 과시하고 타협을 위해 옐친에게 크림 반도로 가서 고르바초프를 데려가도 좋다고 했지만 이미 사태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8인 국가비상사태위원회들은 모스크바 공항을 통해 출국을 시도했다. 이에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의회는 이들의 체포 명령을 내렸다. 직후 그간의 실세로 거론되던 야나예프 대통령 권한 대행과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의장이 실각하고 군부의 강경 소장파들이 실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원회위원인 야조프 국방장관과 파블로프 총리가 물러나고 모이쉐프 소련군참모장이 국방장관에 오르면서 강경파들이 발악에 가까운 실력 행사에 나섰다.   8월 21일 자정, 8대의 장갑차가 시민들이 차벽으로 만든 바리케이트를 밀어내면서 국회의사당 진입을 시도했다.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져 장갑차들을 불태워버렸고, 탈출하던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세 명의 시민들이 숨지자 시위는 더더욱 거세졌다.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모스크바 시내를 피바다를 만들지 않고서는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결국 소련군은 모스크바 봉쇄를 풀고 철수해 버렸다.   이로써 사실상 공산당과 군부의 보수세력에 의해 시도된 쿠데타는 실패로 끝냈다.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 보수파들의 쿠데타는 해체의 수순을 밟아가던 소연방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동시에 소연방을 대체할 새로운 연방조약의 체결은 물 건너가고 있었다. 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3 소연방의 붕괴

김상욱 카자흐스탄, 원전 도입 찬반 국민투표 실시 카자흐스탄에서는 옛 소련 시절인 1973년, 카스피해의 항구도시 악타우 지역에 원전이 처음 건설됐다가 1999년 폐쇄돼서 지금은 원전이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지난 7일, 원전 도입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됐고  71퍼센트의 찬성을 얻어 통과됐다. 현지 언론과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국민투표의 총유권자 1천200만 명 중 63.66퍼센트인 770여만 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이 중 71.12퍼센트가 찬성했다. 발표했습니다. 사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공해를 유발하는 화력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대신 원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대선에서 승리한 2019년에 원전 도입을 제안했다가 국민 반대 여론에 직면해서 한발 물러섰던 적이 있었다. 2019년 원전 건설 반대 여론… 왜? 당시 국민들의 반핵 정서가 생각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1949년 소련의 첫 번째 핵실험이 실시된 곳이 카자흐스탄이었고, 이후 소련이 행한 715회의 핵실험 중 절반 이상인 456회 의 핵실험이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지역에서 행해졌다. 사실상 소련 핵무기의 산실이 된 셈인데, 이러한 핵실험 때문에 카자흐스탄 주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핵실험장이 있던 쿠르차토프 라는 도시는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비밀도시였다. 여기서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세메이시의 주민들까지도 방사능 낙진피해를 입었는데, 카자흐스탄의 주장에 따르면, 50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한다.  카자흐인들이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비로소 이곳에 대해 알게 되었고, 끔찍한 현실에 분노해서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91년 8월 29일에 핵실험장을 폐쇄할 수 있었다. UN은 8월 29일을 국제 핵실험 반대의 날로 선포하여 이 일을 기념함으로써 측면 지원을 했었다. 치열한 카자흐 원전 수주전 카자흐스탄 원전 건설에는 100억∼120억 달러(약 13조 5천억∼16조 2천억 원)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토카예프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통해 원전 도입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을 때부터, 원전 건설은 기정사실화됐고 한국, 중국, 프랑스, 러시아 등 국가들이 참여하는, 사실상의 물밑 수주전이 벌어졌다. 카자흐스탄은 과거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인데, 국민투표 전부터 카자흐스탄 당국이 러시아 업체와 원전을 건설키로 이미 결정했고, 형식적으로 치르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을 정도로 수주 상황이 녹녹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토카예프 대통령은 수도 아스타나에서 투표한 뒤 취재진에 잠재적 (원전 건설) 계약자로 단일 국가나 업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개인적 생각은 최첨단 기술을 보유한 글로벌 업체들로 구성된 국제 컨소시엄이 카자흐스탄에서 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특정 국가의 한 업체에게 기회를 줄 것 같지는 않다. 원전 건설 부지, 울켄… 한국과의 과거 인연 원전이 들어설 예정 부지는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인 알마티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져 있는 ‘울켄’이라는 도시이다. 원전은 대량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닷가나 큰 저수량을 가진 대규모 호수가에 건설된다. 울켄 지역은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호수인 발하쉬 호수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소련 시절부터 대형 발전소 건설 최적지로 꼽혀왔던 곳이다.   이곳은 2007년 카자흐스탄 정부가 '울켄 화력발전소 건설' 공사를 발주한 곳이기도 한데, 이때 한국 기업이 수주에 성공했었다.  이 기업이 (삼성엔지니어링)이 시공사로 선정되어 착공식은 물론이고 상당 부분의 기반 조성 공사까지 진행되었었다.  그런데 완성 후 전기요금 인상 이슈 등 제기된 몇 가지 이슈를 양국이 풀지 못해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카자흐스탄 동포사회는 이번에 전체 수주를 못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공정을 수주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우라늄 최대 생산국인 자원부국이지만 주로 석탄을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으로 국내 전력 수요를 충족해 왔고, 또 부족한 전력은 주로 러시아로부터 들여오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이제 자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선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원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일각에선 화력발전소 연료로 석탄보다 공해 유발이 적은 가스를 사용하면 안정적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보도했다.

쉼켄트 고려인협회 35주년 기념, 문화행사 공동주최 쉼켄트 고려인협회 35주년 문화행사 연계, 쉼켄트 지역 순회영화제 개최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원장 구본철, 이하 문화원)은 10월 19일(토) 12시 쉼켄트 시 우정의 집에서 쉼켄트 고려민족문화협회와 공동 주관으로, 창립 35주년 기념 문화행사를 개최하였다. 쉼켄트 고려민족문화협회 판 유리 라디오노비치 회장의 개회사로 시작된 이번 행사에서는, 쉼켄트 고려인협회 소속 청소년팀의 사물놀이 공연과 쉼켄트 및

<캅차가이 호수> <노래하는 사막> <악타우 산> <콜사이  호수> <차른 케년> <빅  알마티  호수> <콕 쟈일라우> <침불락>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을 통틀어 관동팔경이라고 한다.   대관령의 동쪽을 가리키는 관동은 대부분 강원도 동해안 지방인데, 명승지가 많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관동팔경에는 정자나 누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풍류를 즐기고 빼어난 경치를 노래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이자 시인인 정철(鄭澈)은 가사인 「관동별곡」에서 금강산 일대의 산수미와 더불어 관동팔경의 경치를 노래하였다.   카자흐스탄의 '관동8경' 에 해당되는 '천산 8경'   천산 8경은 기자에서 국내 최초로 여행감독으로 성공적인 전업을 이룬 고재열 감독이 10여일 전에 카자흐스탄을 다녀가고 난 뒤 붙인 이름이다. 아래의 천산 8경에 대한 감상은 고감독의 페이스북에 올라있는 것을 옮긴 것이다   천산8경 제1경 - 까작의 우유니   캄차카이호수로 들어서는 길, 구름에 가려 천산산맥의 설산이 보이지 않아 실망했다. 그런데 이건 뭐지? 호수가 하늘색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호수와 하늘 사이에 구름이 놓이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육지는 한 줄 봉제선으로만 존재하고.   이 풍경을 ‘까유니’라 부르기로 했다. 카자흐스탄(까작)의 우유니라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호수에 들어갔다. 바닷가와 똑같은 모래바닥이었다. 포즈를 취하니 여지없이 우유니 사막. 찐풍경을 담아냈다. 천산8경 제2경 - 노래하는 사막   골산과 골산 사이에 강으로 이어지는 외줄기 미니사막이다. 이번에도 노래는 하지 않았다.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는 건 바람이 잦아들어 오르기 쉬웠다는 얘기. 뒤쳐진 일행 몇몇은 노래를 듣기도.   천산산맥은 다양한 대자연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 노래하는 사막도 그중 인상적인 스펙트럼 중 하나. 일찍 새벽에 오르거나 느즈막히 석양에 오르면 좋다. <천산 2경 - 노래하는 사막> 천산8경 중 제3경 - 악타우산   신기한 산이다. 멀리서 보면 전형적인 악산인데ㅡ가보면 흙산이다. 멀리서는 위압적인데 직접 올라보면 포근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뷰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가 훨씬 좋다. 융기후 침식 중인 지형으로 위흐에서 내려다보아야 골이 잘 드러난다.   비바람에 침식되어 모양이 계속 변한다. 내가 밟은 발자국으로 인해 새로운 물길이 생기고 침식이 촉진되어 산의 모양을 변형시킬 수도 있다.   트레킹로가 따로 없다. 내 맘대로 원하는 만큼 갔다가 내려오면 된다. 일행에게 일단 원하는 만큼 올라간 뒤에 ‘나는 물방울이다’라는 생각으로 골을 따라 내려오라 했다.   석양까지 보고 내려올 걸, 좀 아쉽다. 천산 8경 중 제 4경 - 콜사이 호수   관광지와 여행지의 극적 대비를 보여주는 곳. 데크길에서 100m만 벗어나도 그 많던 관광객이 다 사라졌다. 이 훌륭한 트레킹로를 즐기는 사람들이 우리 일행 뿐이었다.   원래 콜사이호수 트레킹은 1호수에서 출발해 2호수를 거쳐 3호수까지 이르는 코스다. 편도 13km 표고차는 600m 정도. 작년에는 2호수까지 다녀왔다(3호수는 군사지역이라 통행 금지).   올해는 일정상 1호수 주변만 걸었다. 신비스러운 습지와 이끼지대를 걷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콜사이 호수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피크닉존에서 뽀글이에 보드카 한 잔 하고 내려왔다. <천산 4경 - 콜사이 호수> 천산8경 중 제5경 - 챠른 캐년    천산산맥 아래 일리강 유역에 다양한 모양의 캐년이 형성되어 있다. 문캐년 블랙캐년 챠른캐년. 그 중에서 챠른캐년이 까작인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다. 보통 캐년은 위에서 잠시 내려다 보는 것이 전부인데, 챠른캐년은 아래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왕복 한 시간 정도면 훌륭한 캐년 트레킹을 할 수 있다. 걸어 내려가면 일리강을 만나는데 강을 따라 고개를 숙인 버드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면 무릉이 따로 없다. 이번엔 일정에 여유가 있어서 충분히 시간을 갖고 왔다.

카자흐스탄의 매력 2 – 알마티에서 전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여행은 뭐니 뭐니해도 먹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미식 여행가가 아니더라도 카자흐스탄으로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이라면 이 나라 사람들의 주식이 무엇인지?  카자흐인들의 전통음식과 대표 음식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카자흐스탄 여행의 또 하나의 매력은 전세계의 대표적인 음식들을 제대로 맛볼 수 있고 만족도 또한 매우 높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유목민의 후예들이 사는 카자흐스탄에 가면 기름진 양고기만 먹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카자흐스탄에는 130여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서 사는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카자흐인들의 전통음식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식들을 다 맛볼 수 있다. 특히, 알마티 시내에는 세계 3대 음식 중의 하나인 튀르키예 식당이 즐비하다. 이는 고려인들보다 몇 년 뒤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해온 튀르키예인, 쿠르드인 등이 많이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범투르크계 문화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문 식당이 있고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카프카스 지역 민족들이 운영하는 식당들 또한 성업중이다. 이외에도 중국식당이 시내에 많이 늘고 있고 이란 전문 식당도 있다.  같은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형제국인 우즈벡 식당, 위구르,  둥간 민족이 운영하는 식당은 오래전부터 카자흐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들 중의 하나이다.   카자흐인들의 10대 음식 빵과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카자흐인들은 역사적으로 유목민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말고기, 양고기, 소고기, 낙타 고기를 이용한 음식이 잘 발달되어 있고 유제품 또한 다양하다. 카자흐스탄에서 꼭 먹어봐야 할 10가지 요리를 든다면,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베스바르막’이다. 카자흐인들에게 카자흐스탄에서 어떤 요리를 꼭 먹어봐야 하느냐? 고 물어본다면 10명중 10명은 모두 ‘베스바르막’이라고 답할 정도로 이 민족의 대표적인 요리이다. 이것은 말고기, 양고기, 쇠고기 또는 낙타 고기를 삶은 물에 얇은 밀가루 반죽을 넣고 끓여낸 것인데, 우리네 수제비와 비슷해 보이지만 면보다는 그 위에 얹어주는 고기에 양에 놀라게 된다. 학자 이반 레뻬킨은 1770년에 베스바르막이라는 요리가 등장했다고 말하지만, 이 요리는 최소한 18세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카자흐인들이 먹었다고 알려져 있다. 두번째는 ‘카즈’라고 할 수 있다. , ‘말순대’라고 번역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요리이다.  알마티 시내 ‘질료늬’ 바자르에 가거나 동네 정육점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데, 외양은 우리네 순대와 똑같다. 다만 순대보다 좀 더 굵고 길다. 제대로 된 ‘카즈’는 말의 갈비살로 만든다.  이를 기름기가 있는 지방부분과 함께 내장에 소금을 뿌려가면서 채운 후 내장을 양쪽으로 묶어서 완성한다. 조리법은 의외로 간단한데, 끓는 물에 넣고 2시간 이상 삶아주면 된다. 다만 주의할 것은 물에 넣기 전에 이쑤시게 등으로 미리 구멍을 내줘야 한다. 카자흐인의 각 가정에는 자신들만의 이 요리들의 레시피가 있고 이것은 대대로 전승되어오고 있는데, 위에서 말한 베스바르막과 카즈는 명절이나 가족 잔치 또는 손님이 왔을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표적인 음식들이다. 베스바르막과 카즈 다음으로 어떤 다른 카자흐 요리를 먹어봐야 할까?  ‘시르네’라고 불리는 요리는 큰 가마솥에 기름을 두르고 어린 양고기에 감자와 양파 및 기타 야채를 넣고 오랫동안 구워내는 음식이다.   카자흐스탄의 인기 요리에는 수프가 포함된다. 케스파 라고 하는 음식은 쇠고기, 양고기 또는 말고기의 갈비살을 푹 삶은 뒤 면과 당근, 야채를 넣고 완성하는 수프인데, 고기와 함께 그 국물에 면을 풀어서 먹는다는 측면에서 우리식네 닭칼국수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카자흐인들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뼈는 국물을 더 진하게 만들어 준다고 해서 이 케스파를 끓일 때 뼈를 꼭 함께 넣고 끓인다. 지역에 따라서는 낙타고기를 넣고 끓이는 케스파도 있다. 다음으로 ‘콕탈’이라는 생선 요리이다. 주로 육류를 즐겨 먹는 카자흐인들이지만 일리강 등지에서 잡은 민물 생선들을 ‘콕탈니짜’라는 틀에 넣고 훈제를 해서 먹는다. 만약 카자흐인 이웃이나 친구들과 캅차가이 호수나 일리강 쪽으로 봄맞이 피크닉을 간다면 이 콕탈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큰 생선의 배를 따고 펴서 그릴 위에 올려 놓는다, 반쯤 익은 생선 위에 얇게 썬 토마토와 양파를 올려 훈제해서 먹는다. 다음으로 쿠므스 인데, 이것은 비록 음식은 아니고 음료임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에서 꼭 먹어봐야 할 요리 중에 빼놓을 수 없다. 쿠미스는 암말의 젖으로 만든 건강에 좋은 음료이기 때문이다. 위염, 결핵, 심혈관 및 기타 질병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암말의 우유에는 티아민(B1), 리보플라빈(B2), 비타민 B12, 비오틴, 비타민 C, 엽산 및 판토텐산 등 많은 비타민이 포함되어 있다. 쿠므스는 알코올 성분이 있기 때문에 (약 4.5%) 이를 마신 뒤 운전을 하면 안된다. 바우르사키는 카자흐인들의 가정에 마치 필수품처럼 늘 식탁에 놓이는 음식이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발효시켰다가 기름에 튀겨 내는 빵이다.  바우르삭은 맛이 달콤하며 별도의 요리로 취급되는데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항상 무언가와 함께 먹는다. 끝으로 라그만을 먹어봐야 한다. 이것은 일부 카자흐 요리가 그러하듯이 주변 민족들 중의 하나인 위구르인들의 대표적인 음식을 차용한 것이다. 수타면을 삶아서 그 위에 고기와 야채를 올려주는 이 음식은 우리네 잔치국수와 비견될 만 하다. 멸치 육수에 국수 그리고 지단과 고기를  올려 놓는 우리네 국수보다 카자흐인들의 라그만은 수타면에 고기를 많이 얹고 국물이 조금 있다는 차이가 있다. 이에 비해 위구르인들이 만들어 먹는 원조 라그만은 수타면에 볶은 고기와 야채를 손님이 보는 앞에서 얹어준다.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위구르인들이 27만 5천 명 정도 살고 있는데, 원조 라그만의 맛과 시골 카자흐인들이 만들어 먹는 라그만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충남도의원 방문단은 26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를 방문, 신 유리회장을 포함한 임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 충남도의회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고려인 민족정체성 강화와 차세대 육성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이는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이상근 위원장을 비롯한 교육위소속 의원과 전문위원, 교육청 기획국장을 포함한 13명의 방문단은 26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를  방문했다.    이 위원장은 "220만 충남도민을 대표하는 48명의 의원중에서 교육위 소속 8명의 의원들이 고려인 동포 교육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면서 방문 목적을 밝히며 간담회를 시작했다.   신유리 회장은 방문단에게 고려인 현황에 대해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의료, 학술,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김베라 하원의원을 비롯한 성공한 고려인들의 이름을 거명했다.   또한 신회장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은 고려인 인구가 매년 줄어들고 있는데 반해 카자흐스탄은 늘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면서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는 모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동포사회와 카자흐스탄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힘차게 진행해 나가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충남도의회의 성원은 큰 힘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질의 응답시간에 이용국 부위원장, 김응규, 방한일, 김선태, 신한철, 유성재, 이지윤 의원 등은 아산시 신창면 다문화가정 중 고려인 자녀들에 대한 교육문제와 카자흐스탄 유학생유치를 통한 지역활성화 문제, 한국내 카자흐학교 설립에 따른 폐교확보 방안, 고려인협회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신 고려인 마을 조성사업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방문단은 이어 고려극장, 고려문화원, 알마티 교육원 등을 방문하여 충남내 K-POO 고등학교에 입학할려는 카자흐학생 수요조사까지 매우 꼼꼼하고 알찬 일정을 소화해 냈다.   카자흐스탄에는 12만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며 포브스지 선정 50대 부호에 8명의 고려인 사업가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김상욱)

 복싱 4대 기구 미들급 통합 챔피언을 지낸 전설적인 복서 게나디 골로프킨(42·카자흐스탄)이 복싱의 운명이 걸린 직책을 맡았다.   AP통신 등 해외 주요 언론은 26일(현지시간) 골로프킨이 복싱의 올림픽 정식 종목 유지를 목표로 하는 국제단체인 월드 복싱(World Boxing·WB) 올림픽위원회 의장에 선임됐다고 전했다.   골로프킨은 WB를 대표해서 복싱의 올림픽 정식 종목 유지를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긴밀하게 의사소통할 '얼굴' 노릇을 맡았다.   골로프킨은 "복싱을 올림픽 종목으로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라며 "정직과 공정성, 투명성이라는 올림픽 가치에 대해서도 IOC와 긴밀하게 협력할 것"이라고 성명을 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골로프킨은 프로 전향 이후 42승 2무 1패의 전적을 기록하며 프로 복싱 미들급 챔피언으로 오랜 시간 군림했다.   골로프킨은 어머니가 고려인과 러시아인의 혼혈이라 고려인 혈통이기도 하다.   지난해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카자흐스탄 국가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해 행정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올림픽 복싱을 관장해왔던 단체 국제복싱연맹(IBA)은 편파 판정과 불투명한 재정 등을 이유로 IOC로부터 올림픽 퇴출 통보를 받았다.   IOC는 2020 도쿄 올림픽과 2024 파리 올림픽 복싱을 직접 별도의 임시 기구를 만들어 운영했다.   또한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IBA를 대체할 국제기구를 2025년까지 만들지 못하면 복싱을 정식 종목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IBA에 반발해 미국, 영국 등이 주축이 돼 설립한 WB는 지난해 4월 창립했고, 현재까지 44개 국가가 가입했다.   IOC는 꾸준히 WB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하고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WB를 올림픽 종목단체로 인정하진 않았다.  우리나라도 올해 IBA에서 탈퇴해 WB에 가입했고, 카자흐스탄도 골로프킨이 WB 올림픽위원회 의장에 선임된 이후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