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들여다 보기]
리더들간의 우정과 신뢰…. 난제를 푸는 효과적인 한 방법
카스피해 유전을 놓고 벌인 러 – 카자흐 간 협상의 뒷 이야기
제2의 사우디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석유매장량을 자랑하는 카스피해.
세계적 규모의 텡기즈 유전과 최근 30년동안 인류가 발견한 유전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카샤간 유전은 모두 카자흐스탄에 속한 카스피해에 위치해 있다. 카자흐스탄에 속한 유전은 이외에도 카라차가낙 등 경제성이 뛰어나고 매장량이 많은 유전들이 있다.
이들 유전이 만약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의 소관으로 남았다면 현재의 카자흐스탄이 가능했을까? 엘바스(국부) 나자르바예프가 자주 언급했듯이 이 유전들은 신생 독립국 카자흐스탄의 미래를 담보할 매우 귀중한 자원들이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카자흐스탄에 양도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카스피해의 잠재력을 예견한 카자흐스탄 리더의 선견지명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끈질간 협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85년 7월.
소련을 새롭게 탈바꿈 시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당 서기장이 되고 불과 4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카스피해 연안의 T35 광구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화재로 인해 고온의 석유가 분출되었고 급기야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200미터 이상의 뜨거운 불기둥이 치솟았다. 석유전문가들 사이에서 ‘세기의 분수’라고 불린 이 사고는 1년만에 겨우 진압되었다.
당시, 이 사고 현장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카자흐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의 신임 총리였다. 불과 몇 달 전45세의 젊은 나이로 총리가 된 나자르바예프는 이 사건을 통해 카스피해에 매장된 석유가 상상이상의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카스피해의 잠재력에 대해 나자르바예프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모스크바 석유산업부의 지질학자들 중 소수에 불과했다.
이후 1989년 6월. 나자르바예프는 카자흐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의 제1서기가 되었고,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고르바초프와 함께 소련의 개혁을 이루어낼 인물로 떠올랐다. 고르바초프는 그를 신뢰했고, 나자르바예프 또한 고르바초프의 개혁 방향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환자는 고르바초프라는 의사에게 너무 늦게 맡겨졌다. 1970년대부터 생산성하락으로 인한 소련경제의 정체, 계획경제의 비효율, 당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가고 있었다. 개혁개방정책으로 자유로운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사회 각 분야에 활기를 불어 놓고자 했던 고르바초프는 강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던 옐친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듯해 보였다.
이때 나자르바예프는 소련의 새 연방법을 준비하던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의 총리로 발탁된다.
1990년
고르바초프대통령은 미국 방문 중 소련의 이름으로 카스피해의 텡기즈 유전개발에 관해 미국석유회사 세브론과의 협약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세브론사와 소련 석유산업부간의 협상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모스크바 석유산업부의 요구와 쉐브론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혔기 때문인데, 이 때 나자르바예프는 고르바쵸프앞으로 한통의 편지를 띄우게 된다.
1991. 7월 고르바쵸프 대통령에 전달된 편지에는 텡기즈 유전에 대한 권리를 카자흐스탄 국무회의가 가져오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이 담겨있었다. 모스크바의 석유산업부 관료들은 댓구할 가치도 없다고 할 정도로 무시했지만 코르바쵸프는 이를 전격 허용하였다. 당시 그는 나자르바예프가 모스크바의 석유산업부 관료들보다 쉐브론 측과의 협상을 훨씬 더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신뢰만으로 텡기즈 유전에 대한 권리를 넘긴 것은 아니고 또 다른 정치적인 역학관계도 고려되었다. 이때는 고르바쵸프는 소비에트를 개혁할 연방조약을 새롭게 만드는 일로 여념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각 공화국 지도자들과 힘든 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였는데, 분리 독립을 희망하는 각 공화국지도자들과의 논쟁을 중재해달라고 희망했다.
카스피해는 바다? 호수?
소련이 해체되고 소련의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 러시아는 카스피해 유전은 당연히 모스크바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석유산업부 관료들은 텡기즈 유전을 다시 러시아로 귀속시킬려고 했다.
1992년부터 카자흐스탄과 모스크바의 관료들간에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러시아의 입장은 너무나도 분명하였다. 모스크바는 카스피해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주장을 하였다. 즉 200해리 경제수역 등의 규정을 담은 국제해양법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카스피해 북부의 대륙붕은 러시아의 소유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설사 바다로 인정하더라도 1921년 러시아와 페르시아간에 조인된 조약에 따라 카스피해는 러시아와 이란이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스크바측은 이런 주장들을 펼치며 고르바쵸프에 의해 양도된 텡기즈 유전에 대한 권리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고 카자흐측은 이를 거부했다. 92년에 시작된 양측의 협상은 근본적인 인식 차이를 노정시키면서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7년 동안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1998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저녁. 옐친과 나자르바예프는 모스크바 인근에 있는 옐친의 별장에서 사적인 저녁자리를 가졌다. 옐친은 나자르바예프가 카자흐스탄의 새 대통령이 되자마자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의 총리로 발탁되자 그에게 소련의 해체는 시간 문제임을 각인시키고 카자흐스탄을 지켜줄 것을 조언했고, 이를 수용한 나자르바예프는 독립국가연합의 출범과정에서 옐친의 기대에 부응함으로써 두 사람간의 우정과 신뢰는 매우 돈독해 있던 상태였다.
소련 공산당 보수파들이 중심이 된 91년 8월의 쿠데타의 실패로 소련해체는 가속이 붙었고, 소련의 투르크계 공화국들만의 독자적인 국가 창설을 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나자르바예프는 ‘~스탄’5개국을 설득하여 독립국가연합에 참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이런 노력들에 힘입어 슬라브국가들만으로 출발할 뻔 했던 독립국가연합은1991년 12월 알마티에서11개 공화국 정상들이 참여한 가운데 ‘알마티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소련을 대체하여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었고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처음 걸어가고 있던 지도자들은 자국의 경제문제처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격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순조로운 체제전환과 외국인 투자활성화를 위해 사활을 걸고 있을 때였다. 특히, 러시아는 세계적인 매장량을 자랑하는 텡기즈 유전을 되돌려 받고자 하는 욕구가 매우 강했다. 실제로, 엄청난 국부의 상실에 격분한 러시아 관료와 석유회사들은 옐친대통령에게 압력과 다양한 로비를 하였다.
이날 저녁 옐친대통령은, 보드카 잔이 몇바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불쑥 “텡기즈를 러시아에 돌려주시오.” 라는 말을 꺼내었다. 화기애애하던 그날 만찬의 분위기를 급격히 냉각시킬 발언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나자르바예프는 이를 마치 예상이나 한 것 처럼 “그러면 오렌부르크를 카자흐스탄에 돌려준다면 그렇게 하겠소. 오렌부르크는 제정러시아 시절, 한때 카자흐스탄의 수도였잖소” 라고 바로 응수했다. 옐친의 선방은 보기좋게 무력화되었고 두 지도자간의 담판은 나자르바예프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급기야 새벽 2시경, 양측 지도자간에 카스피해를 놓고 벌인 7년간의 정치적, 법률적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결정이 내려졌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간에 카스피해 해저 경계선을 확립하는 담판이었다. 기존의 호수와 바다 개념을 모두 철회하고 수정된 중앙선에 따라 카스피해의 해저경계선을 확립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카자흐스탄은 유전이 많이 몰려있는 카스피해 북부의 대륙붕의 상당부분을 자국의 영토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수정된 중앙선에 대한 최종 결정은 푸틴대통령에 의해 2002년에 공식적으로 서명되었지만 98년의 이 사적 식사자리에서 이루어진 담판으로 세계적 석유메이저들은 모스크바가 아닌 아스타나로 향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