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고려문화원장)
코로나 19의 세계적 확산이 가속되는 가운데 카자흐스탄에는 지난 16일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19일부터는 수도 누르술탄시와 알마티시에 대한 봉쇄조치가 내려졌다. 이들 도시에는 약국과 식료품시장과 상점을 제외한 쇼핑몰, 식당, 체육시설 등이 폐쇄되었고 카자흐인들에게 최대명절인 나우르즈 행사마저 취소되었다.
카자흐스탄 당국과 지방정부 수장들은 방역활동을 강화하면서 코로나 19의 확산에 따른 실업과 경제불안 방지책들을 내놓고 있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각종 공과금 미납에 대한 유예조치를 내렸고 기업들에게는 고용을 유지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에 대해 자금지원을 약속했다. 22일부터는 일부 품목에 대한 수출금지조치도 내려졌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 중에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금수품목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마스크와 같은 방역제품이나 물가안정을 위한 석유 제품이 포함되어 있겠거니 하고 목록을 확인해 본 결과, 예상과는 달리 농산물 뿐이었다. 즉, 메밀, 밀가루, 설탕, 감자, 당근, 순무, 사탕무, 양파, 양배추, 해바라기씨 와 해바라기식용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민들의 식탁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농산물의 안정적인 공급과 가격유지를 위해 카자흐스탄 당국이 한시적으로 수출 금지 조치를 취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쨋던, 코로나 19로 인한 금수품 목록을 통해 내가 사는 카자흐스탄이 자원부국인 동시에 농업대국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
카자흐스탄 농업의 역사
카자흐스탄의 농업개발의 역사는 이미 100년도 훨씬 전인 제정러시아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카자흐 초원 또는 큽차크 초원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역사적으로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세계최초의 유목제국을 건설한 스키타이와 그 뒤를 이은 흉노, 투르크, 몽골제국들이 이 땅을 근거지로 삼아 남쪽 농경민들을 정복하고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후계자 계승문제로 중앙정권이 약화되어 지방권력끼리 생존을 건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삶의 방식은 수천년 전부터 이어져 온 유목이라는 형태를 20세기초까지 유지해 왔다.
그러나 징기스칸의 장남 주우치에게 분할된 큽차크칸국을 구성하던 작은 지방정권 중 하나였던 모스크바 공국은 16세기 들어 서서히 큽차크칸국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18세기 (1723년) 서몽골지역을 지배하던 유목국가 준가르의 침략으로 카자흐 칸이 러시아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러시아가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농업이 시작된다.
러시아에 복속한 카자흐 칸(중, 소 주스)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1820년대가 바로 카자흐스탄 농업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카자흐초원에 진출한 러시아 농민들이 개간한 농토는 수천년동안 이어져 오던 카자흐 유목민들의 계절 이동로를 단절시킴으로써 불만과 반감을 사기도 했으나 짜르정부의 지원으로 러시아 농민들의 이주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를 1차 농업개발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19세기 중엽 러시아농노해방과 함께 자유인이 된 러시아 농민의 카자흐 초원 유입으로 농업개발은 본격화된다. 이후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농민의 이주는 꾸준히 증가하여 급기야 러시아, 우크라이나, 타타르 등 슬라브계통의 이주민이 카자흐인들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된다.
20세기 첫 농업개발의 주인공, 고려인
20세기들어 이루어진 대규모 농업개발사업은 2차례 이루어졌다. 그 첫째는 바로 17만여명의 고려인들이 투입되어 이루어진 농업개발이고 두번째는 소련 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쵸프 시절 이루어진 시베리아 처녀지 개발 사업이다.
20세기에 이루어진 대규모 농업개발의 첫 역사는 1937년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과 함께 시작되었다. 물론 고려인 강제이주의 직접적 계기는 세계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30년대 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