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기획특집[기획 시리즈]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기획 시리즈]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유라시아 관광국가의 현장, 투르키스탄과 야사위 영묘 

‘카자흐스탄의 베네치아’ 케루엔 사라이 복합관광단지 개장


최근, 카자흐스탄의 천년 고도 투르키스탄에서는 투르크어권 국가들에게는 매우 인상적인 행사가 개최되었다.

지난 10일(토) 개최된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의 복합 문화관광단지 ‘케루엔 사라이’의 개장식이 그것인데, 화려한 조명아래 아름다운 운하를 따라 재현된 실크로드 시대의 상인과 장인들의 거리는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했다. 이날 행사에는 아스카르 마민 총리가 참석하여 축사를 통해 투르크어권 국가들의 큰 관심하에 진행된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었다.

일명 ‘카자흐스탄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케루엔 사라이’ 제2의 메카라고도 불리는 투르키스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자 이슬람을 믿는 이들의 순례코스인 ‘호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 맞은 편 아즈레트 술탄 문화보호구역내 20헥타의 대지 위에 조성되었다.

2019 년 12 월에 시작된 이 관광단지에는 낙타의 등에 물건을 싣고 동서양을 오갔던 대상들이 천년의 시간을 뚫고 막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의 거리와 기마유목민들의 문화를 보여주는 원형극장, 박물관, 현대식 쇼핑몰과 부티크, 호텔과 레스토랑, 영화관과 스파, 피트니스 센터까지 관광객들을 위한 모든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설물과 공간들이 수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보트를 타고 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TV뉴스화면을 통해 보트가 건물 사이로 난 운하를 따라 유유히 지나가는 화면을 봤을 때 순간 컴퓨터 그래픽이나 영화 세트장이 아닌지 의심을 갖기도 했었다. 내 기억 속의 투르케스탄은 5월달만 되어도 작열하는 태양볕에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고 한여름에는 40도이상 올라가는 건조한 초원, 물이 귀한 땅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EBS 세계테마기행’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카자흐스탄을 소개할 때 이 야사위영묘를 꼭 포함시켰기 때문에 투르키스탄을 여러차례 다녀왔다. 눈 덮힌 겨울철에 촬영한 한 번을 제외하면 모두 여름철에 방문하였고, 부족한 강수량과 뜨거운 햇볕으로 풀조차 제대로 자라기 어려운 건조한 날씨를 참으며 ‘야사위 영묘’를 촬영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투르키스탄과 관광국가의 꿈

투르키스탄은 2018년 6월 19일을 기해 침켄트가 투르키스탄주(옛 남카자흐스탄주)에서 분리되면서 투르키스탄주의 새로운 주도가 되었다. 트랜스아랄 철도를 따라 침켄트에서 북서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침켄트와 크즐오르다 사이에 있다고 보면 된다.

카자흐 대초원과 중앙아시아 오아시스의 교차점, 실크로드의 카라반 루트의 교차점에서 발생하고 발전한 이 도시는 대초원 유목민의 전통과 오아시스 정착농경 문화가 융합되어 있다.

투르키스탄은 호자 아흐메드 야사위가 이 곳에 묻히면서 붙여졌으며 티무르가 이 곳에 야사위의 영묘를 세우면서 성지로 여겨졌다. 과거에는 ‘샤프가르’, ‘야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도시는 12 세기부터 사료에 처음 등장했고 16 세기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고 호레즘샤, 티무르제국 샤이바니왕조 등 중앙아시아 통치자들의 행정 중심지였다.

최근에는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스탄, 터키,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헝가리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투르크어권 국가 협력위원회 정상회담이 이곳에서 준비될 정도로 투르크문화권의 중심도시로써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비록, 코로나 19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역학상황이 악화되어 온라인회담으로 진행되었지만 투르키스탄이 정상회담의 장소로 계획되었다는 것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 행사에서 정상회담의 주요 회의 주제는 투르키스탄을 투르크문화권의 영적인 도시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이었는데 참가국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이는 카자흐스탄의 큰 외교적 성과로 알려졌는데, 토카예프 대통령은 투르키스탄에 투르크어권 국가를 위한 특별경제구역의 개설까지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정부의 지원과 민간 투자 덕분에 최근 몇 년간 현대적인 관광 시스템이 형성되고 5 성급 호텔이 건설되고 터어키 업체에 의해 국제공항이 건설되는 등 사회 및 문화 인프라가 발전하고 있어 투르키스탄은 카자흐스탄 관광의 주요 중심지로 변모해 가고 있다.

2020년 한해 동안 약 5,600 억 텡게의 건설 투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1 년 전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것으로써 약 절반은 국가예산이고, 나머지 절반은 자유경제특구 (SEZ)를 조성하여 유치한 민간 투자이다. 자유경제구역 투자자는 재산세, 법인세 및 토지세가 면제되고 수입품에 대한 관세 및 VAT도 없다.

3월31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투르크권 정상회담에서 토카예프 대통령이 “투르키스탄 지역에 ‘특별경제구역’을 만들어 투르크 국가들이 통합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힌 포부가 현실화될 수 있을지 기대가 모아진다.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야사위 영묘

<침켄트 공항에서 차로 3시간 가까이 달리면 만날 수 있는 호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 아흐메드 야사위는 이슬람교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즘의 지역 종파 창시자다. 영묘는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이다>

<대형 청동 가마솥 ‘카잔’>

야사위 영묘는 투르키스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써 이슬람교의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즘의 지도자였던 호자 아흐메드 야사위의 무덤과 회의실, 식당, 도서관, 모스크 등 기능적으로 다양한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모스크는 기하학적 무늬와 꽃무늬들이 밝은 푸른색으로 그려진 원래 벽화들이 일부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영묘의 벽에는 고대 아라비아 문자인 쿠파체 문자(Kufic inscriptions)가 새겨져 있고, 돔을 받치는 원통형 기둥들에는 코란의 구절들이 새겨져 있다. 티무르가 사망한 1405년에 미완성인 채로 종결된 영묘는 지금까지도 주요 출입구 표면에 겉칠이 되어 있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설계되었던 두 개의 첨탑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영묘내부로 들어가면 ‘카잔디크(Kazandyk)’라는 정사각형의 거대한 홀로 이어지는데, 카잔디크를 덮고 있는 원뿔형 천장은 지름 18.2m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홀의 중앙에는 1399년에 만들어져 제식에 사용되었던 청동 가마솥 ‘카잔(kazan)’이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영묘방문 인증샷을 찍은 장소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호자 아흐메드 야사위의 무덤은 영묘의 북서쪽 끝 중앙 축에 있다. 공간 중앙에는 석관이 놓여 있다.

영묘 부근에는 저명한 이들의 영묘, 작은 모스크, 중세의 목욕탕 등 다른 건축물들도 있다. 영묘의 북쪽에는 옛 요새의 벽이 재건축되어 있어서, 오늘날의 도시와 영묘를 구분하고 있다. 영묘는 점토가 섞인 석고 반죽으로 접착된 구운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그 기반은 원래 점토층으로 되어 있었으나 최근에 콘크리트로 재건축되었다.

1370년대에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티무르는 메소포타미아, 이란, 트란스옥시아나를 아울러 통치했는데, 북쪽 국경지역에 기념비적 공공 건축물과 모스크, 영묘, 마드라사 등의 종교 문화적 건축물을 정책적으로 건설하였다.

야사위의 영묘도 그러한 건축물 중 하나로써 티무르가 영묘를 건축한 것은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나, 거기에는 더욱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들이 있었다.

바로, 수피즘을 이용하여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음을 알았던 티무르는 이 훌륭하고 신성한 영묘의 건설을 통해, 자칫 자신의 통치에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었던 수피들과 거대한 유목민 공동체로부터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영묘의 건설은 1389년~1399년에 시작되어 티무르가 사망한 1405년까지 이어졌다. 티무르 시대의 건축물들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페르시아의 건축 대가들이 사용했던 실험적인 건축적·구조적 공법은 훗날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의 건설에도 적용되었다. 미완성으로 남은 영묘의 입구 및 일부 실내 건축은 당시의 건축 방식에 대한 물리적 흔적을 잘 보여 준다.

16세기에는 영묘의 정문이 수리 및 재건축되었으며, 부하라의 통치자였던 압둘라 칸은 문의 아치를 수리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19세기까지 투르케스탄은 카자흐 칸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19세기에 코칸드 칸이 영묘를 요새화하면서, 그 주위에 진흙 벽돌로 된 방어벽을 설치하였다.

러시아가 투르케스탄 시를 점령했던 1864년에 영묘는 수리가 필요한 상태가 되었고, 1872년에 시 당국은 영묘를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다. 1938년부터 정기적인 보수가 실시되었으며, 1945년부터는 수차례의 복구 활동이 이루어졌다. 최근의 복구 활동은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이어졌다. 구 소련 시대에 영묘는 역사적 건물 겸 박물관으로 취급되었다. 1991년 카자흐스탄 독립 후, 영묘의 강화된 영적 기능은 국가 정체성 형성에도 영향을 주기에 이르렀다.(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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