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일보
천산투어 천산투어

[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26]

[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26]

‘대조국전쟁’ 의 기억 공유

공동의 역사, 서로 다른 기억, 그러나 같은 전쟁

김상욱 알마티 고려문화원장

5월이 되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도시 분위기는 조금 달라진다. 거리에는 전쟁 영웅의 사진이 걸리고, 공원에는 붉은 카네이션을 든 사람들이 모이며, 오래된 군복을 입은 노병들이 천천히 광장을 걸어간다. 그리고 5월 9일, 전승절이 되면 두 나라 모두에서 전쟁을 기억하는 행사가 열린다. 이 전쟁은 80년도 더 전에 끝났지만,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는 여전히 현재의 사건처럼 기억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이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이 전쟁을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에는 단순한 전쟁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고, 민족의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으며, 수많은 희생 위에 세워진 국가의 기억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소련 전체가 참여한 총력전이었다. 전선에는 러시아인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인, 카자흐인, 우즈베크인, 조지아인 등 소련을 구성하던 모든 민족이 함께 싸웠다. 전쟁 기간 동안 약 2,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낳은 전쟁 중 하나였다.

  카자흐스탄 역시 이 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렀다. 당시 카자흐스탄에서는 약 120만 명 이상이 전선에 동원되었고, 약 60만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카자흐스탄은 전선뿐 아니라 후방 산업 기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수 공장과 광산, 농업 생산이 모두 전쟁을 위해 동원되었고, 중앙아시아는 사실상 소련 전쟁 경제의 후방 기지가 되었다.

  그래서 카자흐스탄에서도 전승절은 단순히 러시아의 기념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카자흐스탄에서는 5월 9일을 ‘승리의 날’로 기념하며 전쟁 영웅과 참전 용사를 기리는 행사들이 전국적으로 열린다. 군 부대와 학생들이 행진을 하고, 시민들은 전쟁 기념비와 영원의 불꽃 앞에 꽃을 바치며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알마티의 판필로프 공원에 있는 전쟁 기념비 앞에 가 보면, 매년 이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 꽃을 놓고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고,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오고, 어떤 사람들은 군복을 입은 채 옛 전우들을 만난다. 이 장면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카자흐스탄에서도 전승절은 중요한 국가 기념일 가운데 하나다. 많은 도시에서 콘서트, 전시회, 참전 용사 지원 행사, 학교 교육 프로그램 등이 진행되고, 전쟁 영웅의 이름을 딴 거리나 기념비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나는 카자흐스탄에서 전승절 행사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다. 행사장에는 노병들이 훈장을 가슴 가득 달고 앉아 있었고, 젊은 학생들이 꽃을 들고 다가가 노병들의 손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무대에서는 전쟁 노래가 울려 퍼졌고, 사회자는 전쟁 영웅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행사 분위기는 축제라기보다 조용한 추모 행사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크게 떠들지 않았고, 대부분 조용히 서서 노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이 전쟁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가족의 역사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러시아처럼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매년 개최하지는 않지만, 대신 참전 용사 지원, 문화 행사, 기념식,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전쟁 기억을 유지하고 있다. 어떤 해에는 군사 퍼레이드 대신 콘서트나 추모 행사 중심으로 기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승절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 갖는 의미는 조금 다르다.

  러시아에게 이 전쟁은 국가 정체성의 중심에 있는 사건이다. 러시아 역사에서 제정 러시아, 소련, 현대 러시아를 모두 연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역사적 기억이 바로 대조국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이 전쟁 승리를 매우 중요하게 기념하고, 군사 퍼레이드도 크게 진행한다.

  반면 카자흐스탄에서는 이 전쟁을 소련 역사이면서 동시에 카자흐스탄 국민의 역사로 기억한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이 전쟁을 러시아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들이 싸운 전쟁’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전승절 행사에 가 보면 국가 행사라기보다 가족 행사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전승절 행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은 군대나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전사한 가족의 사진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사람들은 사진을 들고 행진하면서 자신들의 가족 이야기를 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웠다”, “우리 할아버지는 베를린까지 갔다” 같은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오간다.

  이 장면을 보면 대조국전쟁은 단순한 국가의 기억이 아니라 가족의 기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가정이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이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 두 나라는 서로 다른 국가이지만, 이 전쟁에 대해서는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 베를린 전투 같은 이야기들은 러시아 역사이면서 동시에 카자흐스탄 역사이기도 하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은 정치적으로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특히 대조국전쟁은 두 나라가 공유하는 가장 강력한 공동 기억이다.

  그래서 매년 5월 9일이 되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는 같은 노래가 울려 퍼지고, 같은 전쟁 이야기가 반복되며, 같은 전쟁 영웅들이 기억된다.

  역사는 때로 국경을 나누지만, 어떤 기억은 국경을 넘어 이어진다. 대조국전쟁의 기억이 바로 그런 역사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은 서로 다른 국가가 되었지만, 이 전쟁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같은 역사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인일보

almatykim67@gmail.com



Follow us

한인일보의 다양한 소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