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일보
천산투어 천산투어

[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25]

[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25]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제국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관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김상욱 알마티 고려문화원장

.  카자흐스탄에게 러시아는 외교 파트너 이전에 하나의 ‘환경’이다.

이 관계를 단순히 외교나 경제 협력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려 한다면 현실의 절반만 보게 된다. 러시아는 선택 가능한 대상이라기보다, 이미 주어진 조건에 가까운 존재다. 두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육상 국경선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 국경은 단순한 경계선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역사와 기억, 이동과 충돌이 축적된 공간이다.

  18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의 남하는 카자흐 초원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유목 중심의 사회 구조는 점차 해체되었고, 정치적 권력 구조 역시 제국의 통치 체계 속으로 편입되었다. 이어진 소비에트 시기에는 산업화와 집단농장화, 강제 이주 정책이 시행되면서 사회 구조 전체가 재편되었다. 특히 북부 지역에 러시아계 인구가 대거 정착하게 된 것은 이 시기의 정책적 결과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카자흐 사회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과거만으로 현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두 나라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카자흐스탄이 선택한 길은 ‘단절’이 아니라 ‘관리’였다. 과거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통제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려는 전략이었다. 이는 감정이 아니라 현실적 판단에 기반한 선택이었다.

  독립 직후 카자흐스탄은 극심한 혼란 속에 있었다. 계획경제는 붕괴되었고, 산업 생산은 급감했으며, 생필품조차 부족한 상황이 이어졌다. 경제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구소련 공급망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연결이 끊기면서 국가 전체가 흔들렸다. 이 시기 카자흐스탄에게 러시아는 벗어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이와 동시에 핵무기 문제가 등장했다. 소련 붕괴 이후 카자흐스탄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큰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미국과 서방은 핵 확산을 막기 위해 비핵화를 강하게 요구했고, 러시아 역시 핵 통제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결국 카자흐스탄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비핵화 국가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선택은 이후 카자흐스탄 외교 정책의 방향을 규정짓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은 복잡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 중국, 미국, 유럽, 이슬람권 국가들이 동시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축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했다. 이때 등장한 전략이 바로 ‘다방향 외교’였다. 여러 강대국과 동시에 관계를 유지하며 균형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서 한동안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내부의 정치·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러시아는 이 지역을 관리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 결과 중앙아시아에는 일종의 지정학적 공백이 발생했고, 이 틈을 미국과 중국, 터키, 유럽이 빠르게 파고들었다. 에너지 개발, 군사 협력, 인프라 투자 등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중앙아시아는 새로운 경쟁의 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지역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국력이 회복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확대하기 시작했다. 경제 협력, 군사 협력, 노동 이주, 에너지 네트워크 등을 통해 영향력을 재구축했고, 그 중심에는 카자흐스탄이 있었다.

  특히 경제적 연결성은 여전히 강력하다. 카자흐스탄의 주요 산업 구조는 러시아와 깊이 얽혀 있다. 에너지 산업, 금속 산업, 철도 물류, 금융 시스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 나라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카자흐스탄의 석유 수출 상당 부분이 러시아를 경유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철도 역시 러시아 네트워크와 연동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현실이다.

  최근 국제 정세의 변화는 이 관계의 복잡성을 더욱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와 서방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카자흐스탄은 점점 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고 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와의 경제적·군사적 협력을 유지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과의 관계도 포기할 수 없다. 특히 제재 환경 속에서 카자흐스탄은 ‘우회 경로’로 활용될 가능성에 대한 외부의 시선을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자흐스탄은 신중한 균형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공식적인 협력 관계는 유지하되, 국제 규범을 위반하는 행동에는 직접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방식이다. 공개적인 충돌을 피하면서도, 자국의 외교적 자율성을 지키려는 선택이다.

  군사 안보 측면에서도 유사한 전략이 나타난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가 주도하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회원국으로서 군사 협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외국 군사 기지의 상시 주둔과 같은 문제에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협력은 하되 종속은 피하는 전략이다.

  러시아 역시 카자흐스탄을 단순한 위성국가로만 보지는 않는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안정적인 국가이며, 러시아 남부 국경의 완충지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두 나라는 경쟁과 협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합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 균형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러시아의 대외 정책이 강경해질수록 카자흐스탄의 외교 공간은 좁아진다. 특정 사안에서 입장을 명확히 하라는 요구가 커질수록,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카자흐스탄은 ‘모호하지만 일관된’ 전략을 선택해 왔다. 공개적으로는 갈등을 피하되, 핵심 이익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분명한 선을 긋는 방식이다.

  국내적으로도 러시아에 대한 인식은 단순하지 않다. 러시아와의 역사적 연결과 경제적 현실을 고려할 때 협력을 중시하는 시각이 존재하는 반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계를 강조하는 시각도 공존한다. 국가는 이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내부 균형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관계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에게 과거의 굴레인가, 아니면 현재의 파트너인가.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소비에트 시기의 집단농장화와 대기근,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의 기억은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로 남아 있다. 동시에 두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을 함께 겪었고, 산업화와 도시화를 공유했으며, 지금도 경제와 인적 교류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카자흐스탄은 이 두 얼굴을 동시에 인정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해 왔다. 과거를 부정하지도, 현재를 맹목적으로 수용하지도 않는 방식. 감정이 아닌 구조와 현실에 기반한 공존 전략이다.

  뉴 그레이트 게임의 시대에도 이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크다.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경쟁 속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는 카자흐스탄 외교의 가장 핵심적인 축 가운데 하나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리와 역사는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정책을 선택할 수 있지만, 이웃은 선택할 수 없다.

  카자흐스탄에게 러시아는 바로 그런 존재다.

한인일보

almatykim67@gmail.com



Follow us

한인일보의 다양한 소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