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기획특집[기획 시리즈 – 10]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기획 시리즈 – 10]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

1917 2 혁명과 중앙아시아 

지난호(11회)에서 1905년러시아 혁명과 중앙아시아 무슬림 민족운동에 대해 알아보았다.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일어난 1904년러일 전쟁과 1905년 혁명을 계기로 찾아온 언론과 출판의 자유로 인해 제정 러시아내 무슬림의 정치 사회 운동이 크게 활성화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번호에서는 세계사 뒤흔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서막인 1917년2월 혁명과 중앙아시아에 대해 살펴보겠다.

짜르체제를 붕괴를 가져온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다민족국가인 러시아는 민주화 물결을 타고 정치 사회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때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러시아 영내의 무슬림들의 정치, 사회운동들도 활력을 되찾았는데  바쿠, 카잔, 타슈켄트, 오렌부르크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신문과 잡지가  창간되고 정치조직이 생겨났다.

그해 5월, 350년에 걸친 짜르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충만한 가운데 러시아 내지, 아제르바이잔, 볼가(우랄지방), 카자흐  초원을  비롯한 각지에서  온 대표들이 모여 전체 러시아  무슬림대회를 개최하고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자유롭게  토의했다.

이때 격론이 이루어진 것은 장래 러시아 국가의 정치 체제에 관한 문제였는데, 러시아에서 분리, 독립하자는  주장을 편  사람이 없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점은 그 이후 구소련의 해체시기에  이를  주도했던 러시아 대통령 옐친의  노선에  대해 오히려 중앙아시아의  여러 공화국들이 초기엔  소비에트 연방의  유지를 주장했던  것과도 일맥 상통한다.  즉,  유라시아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1민족 1국가’여야 한다는  의식이 유라시아 대륙 동서 의 끝단에 위치한 지역민에  비해서는 비교적 강하지 않다는 반증일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중앙유라시아 지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북방 기마유목집단에 의해 통치되어 왔고 다민족이 하나의 통치권 아래 사는 것에 익숙해 져 있었고, 이러한 역사로 인한 정치문화는 현대를  사는 이들의  의식속에 까지 전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어쟀던,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은 중앙집권을 주장하는 그룹과  연방제를  주장하는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중앙집권파는  하나의 민주적인  러시아공화국을  상정하고  그 안에서 국민들은  종교와 민족의  구별없이 평등한 권리를  부여 받고 교육과  종교  언어를 비롯한 민족문화분야에서  자치를  향유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영토적 자치가  아니라 이른바  문화적  자치를 지향하고 러시아  영내 투르크계  무슬림 집단의  일체성을  강조했다   

타타르인들이 주로 이러한  주장을 했는데  그들은  러시아영내에 널리  퍼져 살면서  자기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  영역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와 함께   그들은 러시아의  민주적인  정치제도와  공통의 법률이  당연히 투르키스탄의  보수적인 무슬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연방파는 지역적 자치에 기초한 완만한 연방제를 상정하고 중앙정부의  역할을 최대한  제한하려 했다  아직까지  자기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 영역을 갖고 있었던 아제르바이잔 과  투르키스탄,  카자흐  대표들이 주로  이러한 주장을  폈다 

무슬림  대표들은 민족주의와  함께 사회 변혁에  대한 의지도  명확히  보여주었다.  즉,  토지개혁과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  남녀의  정치적  평등,  일부다처제와  16세 이하  소녀의 혼인 금지,  8시간  노동제에 대한 결의는  동시대 이슬람  세계에서  획기적  사건이었고  여성의  참정권  문제는 미국보다  앞서는 개혁이었다.  

전체 러시아 무슬림 대회를 전후하여 중앙아시아  각지에  무슬림의 정치 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조직은 무슬림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 러시아  이주자들의 정치세력이  그들의 활동을 가로막는 것을 극복하면서 또 한편으론 무슬림  보수파 들과 방해도 이겨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과 장애물을 극복하고   8월  투르키스탄의 자치를 목표로 하는  첫번째 무슬림 정당인  ‘투르크연방주의자당’이 결성되어  자치운동을 조직화하는데  공헌했다 

카자흐  초원에서도 ‘카자크’신문 주변에 모여 있던 지식인들이 주도하여  정당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해 4월  부터 각지에서  카자흐인 정치 집회를 열고   7월에 개최한 카자흐인 대회의 의결에 따라 자치를 목표로 하는 알라슈당을 결성하였다. 이 정당은 1917년 겨울에 실시한  러시아제헌의회 선거에서  카자흐인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현지 러시아인들 로부터도 적지 않은 지지를 얻어 그 존재를 내외에 과시했다..

2월 혁명은  제정러시아의 보호국인  부하라와 히바에도  동요를몰고왔다. 아미르와 칸의  전제 정치가  이제 제정 러시아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버린 결과였다.  이 시기  청년 히바인은 의회 개설을 요구했고,  청년 부하라인은  러시아 임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아미르에게도 정치적 개혁을  요구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이러한 사회 변혁의  물결은 조국이  일제의 압제에  있음으로 해서 누구보다도 민족 의식이  강했던 재러동포(고려인)들을 자극하여 이들의 정치, 사회 운동이  크게 활성화되고 항일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데 이바지 했다.  또한 일제식민지 조선에도 전해져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 나갔다.  3.1독립만세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일제의 탄압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된  후  연해주에서 가장 먼저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과 연해주가 해외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하게 된 이유들 중의  하나도 이러한  연유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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