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경제개발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라! 지난 호(14회)에서 현재의 중앙아시아 5개국이 탄생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던 '민족경계획정'작업에 대해 알아보았다. 즉, 20세기 들어 러시아에서도 혁명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짜르 정권의 무리한 중앙아시아 무슬림에 대한 노동력 징발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바스마치'운동은 볼셰비키혁명과 뒤이은 내전이 겹치면서 지역민들의 호응속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내전의 종식과 함께 이 저항운동은 끝이 났지만 소비에트정권은 그동안 응어리진 민족감정을 해소시키고 낙후된 중앙아시아를 새롭게 탈바꿈시켜서 범투르크주의  또는 중앙아시아무슬람연방의  출범을 막으려 했다. 이를 위해 우선 '민족경계획정' 작업에 돌입하였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번호에서는 신생 5개국의 탄생과 곧이어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속에서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를  살펴보겠다  집단농장화를 통한 농업개발 소비에트정권은 '민족경계획정'작업의  완료 후, 중앙아시아의 봉건적 사회와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주목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1920년대 후반에는 중앙아시아 남부 농업지대에 토지 수리개혁을 실시하였고, 이어 전면적인 농업 집단화를 단행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왔던   '콜호즈'가 바로 그것인데,  부농의 토지를 빈농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한 뒤 이를  다시 집단농장체제로  개편해 '콜호즈'를 만들어 나갔다. 이후 각 집단농장의 농업경영 실적에 따라 콜호즈는 해체 또는 주변 농장과의 통합과정을 거쳐 대규모 국영농장인  '솝호즈'로 바뀌기도 하였다.   중앙아시아의 남부지역은  주로  시르다리야강과  아무다리야강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이곳은 '트란스옥시아나' 또는 현지어로 '마 와라 알 나흐르'라  불리면서 옛부터 비옥한 땅으로 유명했다. 두 강을 따라 생긴 오아시스에서는 일찍이 농업이 발달했고, 농업생산력 또한 높았던  지역이었다.  징키스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장담했던  티무르제국이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한 것도 바로 이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야만  대제국의  운영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다리야 강변에서는 면화재배체계가 확립되었다. 주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속하는 아무다리야 강변과  함께 일부  카자흐스탄 남부지역이  목화를 단작하는 지역으로 조성되었다.   당시 '하얀 황금'이라고 불리우던 이 것은 2차대전의 잿더미속에서 소련 경제를 일으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시르다리야강변에는 대규모 벼농사지역이 조성되었다. 가혹했던 카자흐스탄의  농업집단화 카자흐스탄에서는 농업 집단화 과정이 매우 가혹하게 진행된 것으로 유명한데, 수천년 동안 유목생활을 해오던 카자흐인들에게 집단화조치는 맞지 않는 것이어서 매우 저조한 집단화율을 보였다. 이러던 중, 1930년대 초기 급격하고 강제적으로 진행된 농업집단화는 카자흐 유목민의 저항을 불러왔고 때마침 가뭄과 기근까지 겹쳐서 카자흐 인구의 42%에 달하는 175만명의 아사자를 내는 비극을 불러왔다. 이 비극으로 카자흐 초원에는 인구 공동화가 생기게 되었고, 이를 메꿀려는 움직임의  하나로써 고려인을 비롯한 2차대전 당시 소련내 거주하는 적성민족들의 강제이주가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크림 타타르인, 볼가 독일인, 칼미크인, 체첸인, 메스헤트 투르크인 등 수백만명의 소수민족이 강제이주되었다.  이들은 2차대전 당시 독일과 터어키의 연대를 우려한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가 결정된 민족들이다. 물론, 고려인들은 이들보다 4년 일찍 일제와의 무력 충돌 위협을 줄이고 일제와의 국경선에서의 스파이활동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  실로, 고려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30년대  초, 카자흐 초원에서  일어난 대기근의 나비효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앙아시아 농업개발과 고려인  중앙아시아의  농업개발에서  고려인의  흔적은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37년에  강제이주해 온 고려인들의  땀방울이 중앙아시아의 현대적 농업발전에 기여한  공은 실로 크다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고려인들의  높은 정치의식과 집단농장 조직  경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조국을 떠나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은  항일의식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에도 매우  밝고  정치의식이  타민족에  의해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이는  소비에트 중앙정부의  정책들을  매우 잘 이해했고  현실에 적응시키는  능력 또한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연해주 지역에서 이미 집단 농장을 결성, 운영했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면서 대부분 집단 농장별로 이주해 왔다. 심지어  콜호즈의  이름도 연해주에서  사용하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서 신생 콜호즈에  붙이는 사례들이  많았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면서 곧바로 고려인들이 주도한 콜호즈를 조성할 수 있었다.  주로 크즐오르다주의 시르다리야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양파와  수박을 재배하기도  했지만 벼와 목화를  대부분 재배했던  고려인  콜호즈는 소련에서 가장 높은 농업생산성을 올리는 대표적인 소수 민족 콜호즈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외국 귀빈들이  소련을  방문 할 때 보여주는  단골  코스에 포함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흐르시쵸프 시절 크즐오르다의  대표적인  고려인  콜호즈인  제3인터내셔널에서  촬영한  영화 필름이 보관되어  있다.   이 필름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서 대형  트랙터와 콤바인으로 황금 물결  일렁이는  벼를 수확하는  고려인 농부의  모습과 이를 견학하러 온 외국 지도자와 방문객들, 콜호즈  내  문화궁전과  농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려인 콜호즈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높은 생산성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1950년대에 고려인 콜호즈에서는 다수의 사회주의 노동 영웅을 배출했다. 이는 민족 대비 가장 높은 노동 영웅 배출 비율을 보여 준 것이었다. 고려인들은 콜호즈내에  학교, 작업장, 탁아소, 회의와 공연을 할 수 있는 인민 대회 궁전, 공동 식당 등을  잘  갖춤으로써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소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카자흐스탄도 자본주의 국가가 되고,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고려인 콜호즈는 위기에 직면했다. 1992년 이후 대부분의 고려인 콜호즈는 집단 농장의 성격을 상실하고 개인이나 기업이 운영하는 농장으로 변모되었다. 사회주의 시절, 대표적인 콜호즈였던 제3 인터내셔널이나 아방가르드 등은 여전히 농업활동을 하고 있지만 집단 농장의 성격을 상실하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경영되고 있다. 많은 고려인들은  자식 교육과  거주  여건 등을  이유로  도시로 떠나고  그  빈자리를 카자흐인 들로 채워졌다. 소수민족의  유형지로 변한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는 특히, 카자흐스탄은 소수민족들의 유형지로 변해버린 듯했다. 여기에 더해 2차대전 후 카자흐 북부지역에 농지 개간('처녀지 개발계획') 과 공업화를 촉진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슬라브계 소련인들이 이주해 옴에 따라서 카자흐인은 이후 오랫동안(소련의  해체로 인한 카자흐스탄이  독립할 때까지) 자신의  공화국에서 인구 2위의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또한, 2차 대전 기간 중에 모스크바와  상트 뻬쩨르부르그  등  유럽에 속한 러시아 지역에  밀집되어 있던 공장시설과  노동자들을 독일군의  침략이 미치지 않는 중앙아시아로 대거  이전시켰는데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특히,  카자흐스탄의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어느 도시에 가더라도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슬라브계 소련인들이  도시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앙아시아  지역민들은 농촌에서 면화 재배  또는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시절에도  중앙아시아는 전체적으로  농업과 목축이  경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소련내에서 국민소득이  항상 하위권에  머물렀고  소련 중앙정부의  보조금으로 부족한  세수를  메꾸었다  이 시기 또 하나 인상적인 대목은  2차대전 종전 후 일본군 포로들이  중앙아시아에 등장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유럽전선에서 독일을  패전시킨 소련군은  전력을  정비해서 동부전선에서  일제의  관동군를  밀어 붙이게된다.  이미  독일과의 전쟁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시베리아의 군수공장에서  생산한 탱크와  비행기로 무장한  소련군은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되던  관동군 60만명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고, 이들을  전쟁복구작업이 한창인  소련 전역에  보내게 되는데  알마티에도 포로들이 오게 된다. 이들이 그  당시 건설한  아파트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고골랴  거리에 있는 4층짜리  벽돌아파트 ( 자신들의 아버지가  지은 건물)앞에서 사진을  찍은 일본인  관광객을 가끔씩  볼 수 있다.  물론, 이 관동군속에는  조선인 징병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별도로 기회를 만들어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스탈린의 대숙청과  새로운 민족 엘리트들의 성장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된  스탈린의 대숙청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자를  가장 많이 사형시킨 사람은  다름아닌 함께 목숨걸고 혁명을 했던 동지들을  숙청한 스탈린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인류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회주의 라는 새로운 길을  가는데 있어서  혁명동지들간에는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했다. 혁명 직후에는 당내의  소수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세계열강들간의  전쟁의  기운이  높아가던  30년대에 접어들면 당내 민주주의 작동 원리가  멈춰서고 비밀경찰이 활보하던 짜르 통치 시절과 같은 당 운영 원칙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력을  쥔 스탈린은 2차세계대전을  향해가는  국제정세와 반혁명 음모, 국제사회의  대소련 억압정책, 국내적으로 급속한  공업화와 사회주의  건설 등을 이유로 일체의 노선 투쟁을  허용하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한가로이 노선투쟁을  할 때가  아니라는 스탈린의  인식은 동과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일본의  군국주의화, 독일의 나찌즘으로 무장하는  것을 보고 더욱  굳어지게  된다. 이때 스탈린이 빼어든 것은 바로  대숙청이었다.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심받아야 될 사람이다."라고 말한 스탈린과  "1937년은 불가피했소. 우리가 혁명 후에 좌우로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들의 온갖 잔당이 존재하고 있고 파시즘의 공격 위험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파시즘과 연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1937년은 불가피했소. 전쟁 중 제5열이 없었다는 사실로써 우리는 1937년에 대해 빚을 진 거요. 지금 문서들이 감춰져 있으나, 시간이 가면서 진실이 밝혀질 거요. 그들은 적의 첩보기관과 연계되어 있었소." 라고  말한 몰로토프의  말들에서  당시의  절박했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대숙청은 1937년부터 1938년 사이 소련의 정치, 경제, 국방, 행정, 사법, 언론, 문화예술, 과학기술, 교육, 농업, 산업 등 전 분야에서 스탈린 체제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혹은 비판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조리 숙청당한 사건으로써 약 7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형을  당했고 강제노동수용소에 노역이나  질병으로 사망한  인원이 13만여명이 되는  등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당 내의 스탈린 반대파들이 걸려들었고 점차 부하린, 리코프 등 레닌과 함께 혁명을 이끈 고참 볼셰비키들이 대부분 처형되거나 체포되기 전 자살했다. 그리고 이들과 연계된 당과 행정부의 중간 간부들이 끌려가기 시작했고, 점점 퍼져나가서 학계와 언론, 문화예술계를 거쳐 결국에는 민간인을 포함한 온 사회로 확산되었다. 대숙청이 절정을 이루던 1938년에는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소련군까지 숙청의 파도에 휩싸여서 장교단의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때  중앙아시아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비롯한  제반영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자디드  지식인과   옛 알라슈  당  지식인  그리고  무슬림 공산주의자  등   민족엘리트들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그들을  반혁명 활동가  또는 민족주의자로 몰아  숙청함으로써  이후 중앙아시아의  발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민족  엘리트들은  스탈린 사후 비로소 다시  당과  일부 기관의  요직에 등용되었다.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민족 엘리트들이  카자흐의  쿠나예프와  우즈베크의  라시도프이다.  이들은  1960년대에  등장하여  20여년간  양 공화국의 공산당  제1 서기장으로  군림한 지도자들이다.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중앙아시아의 핵심국가 카자흐스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에볼라 바이러스 등을 향후 5년간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핵심 요인으로 꼽았다.   23일 '카진포럼'통신 보도에 따르면 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전날 국가 안전보장이사회가 작성한 향후 5년간 예상되는 5대 안보위협 요인과 해결책을 담은 '2021~2025년 안보 전략' 문건에 서명했다.   전략 문건은 세계화에 따른 활발한 인적 교류 및 이동으로 코로나19 등의 안보 위협이 초국가적 위협요인으로 떠올랐다면서 과학기술 발달에 따른 IT분야의 급격한 변화와 경제, 노사관계의 획기적인 변화, 해외에서 발생하는 금융과 국제무역 분야의 리스크, 역내 주변국간의 긴장 고조 등도 안보 차원의 위협 요인으로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에 대응해 인적 자원에 가장 역점을 두면서 국가의 지적 잠재력을 보존하고 강화·발전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외부 충격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고 생산성 향상과 기술 고도화를 통한 고용 창출과 소득 증대를 꾀하는 한편, 식량 안보와 생태계 보호, 천연자원 관리를 포함한 환경 안보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아울러 전통적인 국가안보 분야인 국방력 확보, 국가정보의 보안과 사이버 위협에 대한 대응 강화 필요성도 강조했다.   카자흐스탄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은 초대 대통령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맡고 있다.

  분수대에서 놀던 어린이가 감전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현지매체들은 잇달은 분수대 감전사고를 전하면서 알마티 분수대에서 놀던 어린이와 시민들이 분수대 전기펌프의 누전으로 인한 감전사고가 계속되고 있어서 각별한 주의와 시공업체의 철저한 점검이 요구된다고 보도했다.   지난 19 일 오후 3시경 알마티시내의 서커스 건물 근처의 분수에서 놀던 두명의 소녀들이 분수대에서 수영을 하기로 하고 이중 한명이 분수대 중앙으로 도달했으나 갑자기 의식을 잃고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가 물에 뛰어들었으나 그녀도 감전되어 의식을 잃었다.   함께 놀던 소녀도 그들을 돕기 위해 손을 잡는 순간 전기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는 사고가 순식간에 발생하였다    사건의 목격자에 의하면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그들을 분수대 밖으로 끌어내고 구급차를 불러 급히 병원으로 후송했다.   아타깝게도 첫번째 소녀와 어머니는 사망하였고 두번째 소녀는 다행히 의식을 회복했다. (한인일보)

  카자흐스탄의 카즈백(QazVac) 백신이 WHO가 응급 상황에서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의약품 목록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카자흐스탄 대통령 카심-조마르 토카예프는 외국인 투자자위원회에서 "나는 카자흐스탄의 잠재적인 과학력 덕분에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자체 백신인 카즈백 (QazVac)을 만들고 출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임을 강조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지난주에 나는 WHO 사무 총장을 만났다. 이 조직은 QazVac을 응급용 권장 의약품 목록에 추가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백신의 생산량을 늘리고 해외 수출을 진행할준비가 되어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카자흐스탄의 생물학적 안전 문제 과학 연구소(RIBSP)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개발한 두 번째 백신에 대한 임상 연구를 시작했다.   QazCoVac-P 백신은 인공적으로 합성 된 SARS-CoV-2 코로나 바이러스 단백질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백신은 두 번째 용량의 근육 내 투여 후 14 일에 백신 접종 된 실험 동물의 체내 면역을 자극한다"고 지적했다.   연구소는 해당 백신을 통해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의 비율이 늘려 시민들의 집단 면역을 가속화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카자흐스탄 교육 과학부 과학위원회 생물 안전 문제 과학 연구소(RIBSP)는 현재 3단계 임상 실험이 진행중인 QazVac 백신에 대한 불활성화 백신을 개발했으며, 7 월 초에 실험이 완료 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인프라·에너지 투자 수요 증가…컨소시엄 구성해 진출 유리    안정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프라와 에너지 투자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의 투자 확대로, 관련 기업들의 투자진출 기회가 풍부해졌다.   한국무역협회와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이 16일 개최한 ‘중앙아시아 진출전략 세미나’에서 예카테리나 EBRD 유라시아 인프라사업 본부장은 “카자흐스탄은 안정적인 경제성장에 따른 인프라 사업이 증가하고 정부의 산업다변화 정책 추진으로 EBRD의 자금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EBRD의 인프라 프로젝트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수처리, 도시교통, 지역난방, 도로건설 등의 프로젝트에 한국기업들의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는 냉전체제 붕괴 후 동구권 및 구소련 연방국가들의 시장경제 체제로의 연착륙을 지원하기 위해 1991년 설립됐다. 2012년 이후에는 투자지역을 중동, 남동부유럽지역, 중앙아시아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 EBRD는 그동안 총 5984건의 프로젝트를 통해 1470억 유로를 투자해왔으며, 카자흐스탄에서 그동안 43건의 프로젝트에 10억7700만 유로를 투자했다.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 ‘누를리 졸 2020~2025’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경제규모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대규모 도로 및 운송 인프라 개발사업인 ‘누를리 졸 2020~2025’를 시행하고 있다. 각 지역 인프라 및 지역을 잇고, 효율적인 물류·운송 인프라 개발을 통해 수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된 사업이다. 이 프로그램의 재원은 중앙 및 지방정부 예산과 국제 금융기관, 민관합작투자사업(PPP), 민간 투자 등을 통해 조달할 계획이며, 총 규모는 약 132억 달러다.   누를리 졸 2020~2025 추진과 동시에 카자흐스탄은 중국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의 지리적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운송 인프라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   2019년 기준 카자흐스탄의 건설산업은 전년대비 19.2% 성장했다. 알마티, 누르술탄 등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택건설 붐이 일었으며, 가스 파이프 라인, 송유관 등 건설에도 대규모 자본이 투입됐다. 또, 누를리 졸 프로젝트 진행으로 건축자재의 생산량도 3.3배 증가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전략적 위치로, 정부 및 중국의 투자가 집중돼 운송 부문은 향후 10년간 건설시장의 성장을 견인할 것으로 전망되며, 후발 프로젝트의 발주도 예상된다. 또, 카자흐스탄은 다자개발기구로부터 조달받은 자금을 정부 입찰 프로젝트 뿐만 아니라 민간 부문 프로젝트 추진에도 사용하고 있어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파트너사와 컨소시엄 구성…운송 인프라 유리   우리나라는 2019년 4월 한-카자흐 정상외교의 결과로 ‘Fresh Wind 2019~2022’ 경제협력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Fresh Wind란 경제교류 강화 및 상호투자 증대를 목적으로 한-카자흐스탄 양국 간 체결된 프로그램으로 통관·인프라·보건의료·관광·중소기업 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할 전망이다.   카자흐스탄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은 역량 있는 파트너와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현지 역량을 보완하는 전략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현재 SK건설과 도로교통공사가 구성한 컨소시엄이 카자흐스탄 알마티 순환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운송 인프라 분야 후발 프로젝트 수주 기회를 잡아 카자흐스탄에 진출하는 것이 유리해 보인다. (중기이코노미)

  카자흐스탄 과학 교육부는 새로운 국정 역사 교과서를 편찬했다.   텡그리뉴스이 보도에 의하면, 5~9학년 학생들이 배우게 될 카자흐스탄사와 세계사 교과서가 최근 작업을 완료하였다.   기존에 사용하던 다양한 역사교과서와 차이점은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정확한 설명을 다는 것을 위주로 수정했으며, 민족사에 대한 개념도 새롭게 도입되었다. 즉, 카자흐스탄인은 이 영토의 자생적 (원산지에 속하는) 인구라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도록"초점이 맞추어져 있다.(한인일보)

 고려인, 사할린동포, 중국동포 대상 KBS 한민족방송(사회공헌방송부 황형선 부장)이 중국 동북 3성을 비롯해 CIS지역과 러시아(사할린) 등에 사는 북방동포들을 대상으로 한민족 체험수기를 공모한다.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는 1998년부터 이어져 온 KBS 한민족방송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올해 23회째를 맞는 한민족 체험 수기에는 생활 속에서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우리말과 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민족경계획정’ 작업과 중앙아시아 5개국의 탄생  지난 호(13회)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수립시킨 10월 혁명과 뒤이은  내전으로 인한 혼란기 동안  중앙아시아 즉,  투르키스탄에서는 '바스마치' 운동이라는 저항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는 내전과 소비에트 정권 초기 일부 정책적 오류 등이 겹치면서 지역민들의 호응속에 소비에트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확대되었고 이에 대응하는 모스크바의 정책은 현재의 중앙아시아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이번 호에서는 이 중에서도 현재 중앙아시아 5개국이 탄생되는 즉,  티무르제국 이후 부하라칸국, 히바칸국, 코칸드칸국 으로 나뉘어져 있던 이 지역에 현재와 같은 5개의 나라가 만들어 지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던  '민족경계획정' 작업에 대해 알아보겠다. '민족경계획정'작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지난 호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바스마치' 운동을 다시 한번 상기해봐야 한다.  이는 한마디로 제정 러시아 영토내에 거주하던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제정 러시아와 소련에 반기를 든 봉기였다. 이 운동의 근원은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러시아 제국의 무슬림 징병으로 인해 반러시아 감정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1916년 중앙아시아 폭력사태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달 후 10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폭력사태는 투르키스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특히 코칸드칸국의 수도가  있었던 페르가나 분지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로 발전하였고 볼셰비키와 반혁명파간의 내전이 발생하자 수 년 동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게릴라전 및 재래식 야전을 전개하면서 소비에트 정권에 저항했다. 마침내, 1924년 4월 사마르칸트에서  '투르키스탄 투르크 독립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8 부터 6년동안 중앙아시아를 반 소비에트 저항운동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바스마치'운동은  1924년 붉은 군대에 의해 제압되었고,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즉시 '민족  경제 획정' 작업이 추진하게 된다. 이는 혁명 후에도 제정 러시아 시대의 행정구역에  기초하고 있었던  투르키스탄 자치소비에트공화국과 부하라 소비에트공화국, 호라즘(히바)소비에트공화국을 모드 해체하고 여기에 중앙아시아 역사상처음으로 1민족 1국가의 국민 국가를 수립하기로 위한 획기적인 작업이었다. 같은 해 10월 성립된  우즈베크와 투르크멘의 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필두로 하여 현 공화국 시스템의 원형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투르키스탄 북부의 카자흐인 거주지역이  키르기스스탄자치공화국에 편입되어  카자흐인의 통합이 실현되고 나중에 카자흐스탄이 된 카자흐자치공화국이 성립(1925년)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이는 언듯 보면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도 상응하고 근대 유럽의 개별 국민국가 원칙에 맞는 듯이 보이지만, 향후 갖가지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경계 획정 토론에 참가한 한 카자흐 대표는  "중앙아시아는 지역, 경제, 민족학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단일체이다.  그래서 경계 획정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를 절단하여 머리와 손발과 몸통을 따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중앙정부의 안에 반대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개별 민족국가로 분할하는 이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는  무슬림 공산주의자와  자디드  지식인들의 범투르크주의를 막고,  혁명과  내전과정에서  증폭된 민족 사이의 적대관계를 제거하여 여러 민족의 발전을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개별 민족공화국의 건설은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원리에도 들어맞았다.  그러나 민족의 실체가 아직 확실하지 않고 다양한 집단이 뒤섞여 살고 있었던 중앙아시아 상황에서 이를 실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외부에서 유입된 이민자들이 특히, 북방 유목민들이 토착민들을 지배하면서 동화되어 현지화되어 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중남미 지역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배자들에 의해 통치되면서 오랜 기간 인종 융합이 일어남으로써  백인 부부 사이에 흑인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처럼, 중앙아시아도 이에 못지 않게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민족간에 교류와 융합이 일어난 지역이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독자적인 계보의식과 부족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카자흐, 키르기스,  투르크멘 등 유목민들은 개개 민족으로 편성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오아시스 농업에  종사하는 정주민인 우즈베크와 타지크의 경우에는 그 구별이 다분히 자의적일 수박에 없었다. 이때 생겨난  우즈베크인이라는 민족은 유목 우즈베크의  여러 부족을 비롯한  부족 조직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유목 또는 반유목 투르크계 집단과 그들이  이동해 오기 훨씬 이전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투르크계 정주민(이른바 샤르트)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후자는 사회, 문화적으로 볼 때 전자보다 오히려 이란계 언어를 쓰는 타지크인에 가까웠다. 실제로 구소련 해체 후 우즈베키스탄을 오랫동안 통치하면서 신생 독립국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적 정통성을 세우고 티무르와 같은 민족 영웅을 재조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까리모프 전 대통령의 어머니도 타지크인이었다. 페르가나 분지를 비롯한 다양한 민족 집단이 뒤섞여 살고 있는 지역에서 국경선을 긋는 일 자체가 용이하지 않았고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이때 탄생한 중앙아시아 5개국은  다민족 국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민족별 공화국이 수립되자 소수 민족에 대한 동화의 힘이 미치기 시작했다.   예를들면,  우즈베크령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서   거주하는 타지크어  사용 주민 대부분이 우즈베크인이 된 것은 나중에  심각한 민족 문제를 불러왔다. 중앙아시아의  중심도시인  타쉬켄트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카자흐와  우즈베크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러한 정책은 문화 영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공화국은 개별적인 문어를 제정하고 역사를 편찬하여 국민 통합을 진척시키려고 했다.  각국의 새로운 국어는 예전의 차가타이어나 공통 투르크어와 다른 개별 민족의 구어에 기초한 문어였다.   그러나 이들 새로운 민족어의 지위는 곧 러시아어가 소비에트 연방 공통어로서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자 흔들렸고,  아랍문자로 표기해오던 것을 일시적으로 라틴문자로 바꾸기도 했지만,  이 역시  1940년 이후에는 모두 키릴 문자로 전환되어 구소련의 해체시기 까지 사용되었다.   혁명기 부터 1920년대 초에 걸쳐  티무르와 차가타이어를 내세워  투르키스탄의 역사, 문화적 일체성을 주창한 피트라트 같은 사람들은 범투르크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로 단죄되어  활동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투르키스탄'이라는 단어도 소련의 실용어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초원이라는 새로운 지역 명칭이 정착되었다. 요컨대, 경계선 획정은 중앙아시아를 개별 민족 공화국으로 나누고 그들을 소비에트 연방의 중앙집권적 정치, 경제 체계에 통합하기 위한 전제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 2021 여름학기 한국어강좌 -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 세종학당은 여름학기 강좌를 6월 21일(월) 개강하여 8월 13일(금)까지 총 8주간 진행한다. 이번 여름학기는 세종한국어 1 ~ 4 정규 과정과 세종 4 레벨 업 특별 과정으로 구성하였다.  정규과정은 한국어에 쉽게 입문하도록 구성한 세종한국어 1부터 점차 난이도 있는 한국어 어휘와 문법을 배우는 세종한국어 2 ~ 4 강좌로 구성하였다. 세종한국어 1 ~ 4 정규과정을 통해 한국어 강좌 수강자들은 난이도별 한국어 학습 단계를 차근차근 밟을 수 있다.  세종 4 레벨 업 특별 강좌는 매주 토요일에 진행된다. 수강자들은 세종 4 레벨 업 강의에서 이전 단계에서 배웠던 내용을 복습함과 동시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한국어 표현들과 회화를 예습할 수 있어 지속적인 한국어 학습을 할 수 있다. ▲ 전국 각지에서 한국어강좌 수강 열기 뜨거워  이번 여름학기 강좌는 지속된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코로나19 격리지침으로 대면 수업을 못하는 아쉬움이 있으나 한국문화원이 위치한 누르술탄이 아닌 다양한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어 학습자들이 강좌를 수강할 수 있다.  수도인 누르술탄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악토베, 악타우 등지에 있는 수강자들도 한국어 배움에 대한 열정만 있다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 그동안 거리상의 한계와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학원과 학교가 없는 환경 때문에 한국어 학습 기회가 없던 수강자들에게 온라인 강좌는 한국어 공부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처럼 먼 거리에 있는 수강자들의 한국어 학습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함께 한국어를 처음 배우기 위해 초급과정인 세종한국어 1 강좌를 신청하는 새로운 한국어 학습 희망자들의 한국어 강좌 수강 열기도 달아올랐다.  이번 여름학기에서 세종한국어 1은 총 12개의 강좌 중 4개 강좌로 가장 많은 수강자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계획보다 더 많은 한국어 학습 입문자들의 수요를 확인하고 이에 부합하여 우리 문화원은 세종한국어 1 추가 개설 신청을 받았다. 모집은 단 4분 만에 완료되었고 세종한국어 1은 1개의 강좌를 추가 개설하여 총 5개의 강좌로 구성하였다.   그만큼 k-pop과 k-drama등의 한류열풍 속 한국 문화를 알기 위하여 또는 한국 여행이나 한국 유학 등의 다양한 목표를 가지고 한국어를 처음 시작하는 한국어 학습 희망자들이 카자흐스탄에 많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 문화원은 여름학기 한국어 강좌를 통한 언어 공부와 함께 한국과 한국 문화를 습득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강좌와 공연 등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코로나19 상황에 맞춰 온·오프라인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안전하게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한국과 한국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 이혜란 원장은‘더위 속에서도 한국어 학습에 대한 관심과 열정에 감사드린다. 이번 여름학기 강좌로 열심히 한국어를 학습하여 강렬한 여름 햇볕 아래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나듯 많은 분들이 한국어 실력을 크게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일시 : 2021년 6월 21일(월요일) - 8월 13일(금요일)참여대상 : 2021 여름학기 한국어 강좌 신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