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기획특집[기획 시리즈 – 15]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기획 시리즈 – 15]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

경제개발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라!

지난 호(14회)에서 현재의 중앙아시아 5개국이 탄생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던 ‘민족경계획정’작업에 대해 알아보았다. 즉, 20세기 들어 러시아에서도 혁명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짜르 정권의 무리한 중앙아시아 무슬림에 대한 노동력 징발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바스마치’운동은 볼셰비키혁명과 뒤이은 내전이 겹치면서 지역민들의 호응속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내전의 종식과 함께 이 저항운동은 끝이 났지만 소비에트정권은 그동안 응어리진 민족감정을 해소시키고 낙후된 중앙아시아를 새롭게 탈바꿈시켜서 범투르크주의  또는 중앙아시아무슬람연방의  출범을 막으려 했다. 이를 위해 우선 ‘민족경계획정’ 작업에 돌입하였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번호에서는 신생 5개국의 탄생과 곧이어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속에서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를  살펴보겠다 

집단농장화를 통한 농업개발

소비에트정권은 ‘민족경계획정’작업의  완료 후, 중앙아시아의 봉건적 사회와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주목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1920년대 후반에는 중앙아시아 남부 농업지대에 토지 수리개혁을 실시하였고, 이어 전면적인 농업 집단화를 단행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왔던   ‘콜호즈’가 바로 그것인데,  부농의 토지를 빈농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한 뒤 이를  다시 집단농장체제로  개편해 ‘콜호즈’를 만들어 나갔다. 이후 각 집단농장의 농업경영 실적에 따라 콜호즈는 해체 또는 주변 농장과의 통합과정을 거쳐 대규모 국영농장인  ‘솝호즈’로 바뀌기도 하였다.  

중앙아시아의 남부지역은  주로  시르다리야강과  아무다리야강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이곳은 ‘트란스옥시아나’ 또는 현지어로 ‘마 와라 알 나흐르’라  불리면서 옛부터 비옥한 땅으로 유명했다. 두 강을 따라 생긴 오아시스에서는 일찍이 농업이 발달했고, 농업생산력 또한 높았던  지역이었다.  징키스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장담했던  티무르제국이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한 것도 바로 이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야만  대제국의  운영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다리야 강변에서는 면화재배체계가 확립되었다. 주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속하는 아무다리야 강변과  함께 일부  카자흐스탄 남부지역이  목화를 단작하는 지역으로 조성되었다.   당시 ‘하얀 황금’이라고 불리우던 이 것은 2차대전의 잿더미속에서 소련 경제를 일으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시르다리야강변에는 대규모 벼농사지역이 조성되었다.

가혹했던 카자흐스탄의  농업집단화

카자흐스탄에서는 농업 집단화 과정이 매우 가혹하게 진행된 것으로 유명한데, 수천년 동안 유목생활을 해오던 카자흐인들에게 집단화조치는 맞지 않는 것이어서 매우 저조한 집단화율을 보였다. 이러던 중, 1930년대 초기 급격하고 강제적으로 진행된 농업집단화는 카자흐 유목민의 저항을 불러왔고 때마침 가뭄과 기근까지 겹쳐서 카자흐 인구의 42%에 달하는 175만명의 아사자를 내는 비극을 불러왔다.

이 비극으로 카자흐 초원에는 인구 공동화가 생기게 되었고, 이를 메꿀려는 움직임의  하나로써 고려인을 비롯한 2차대전 당시 소련내 거주하는 적성민족들의 강제이주가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크림 타타르인, 볼가 독일인, 칼미크인, 체첸인, 메스헤트 투르크인 등 수백만명의 소수민족이 강제이주되었다.  이들은 2차대전 당시 독일과 터어키의 연대를 우려한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가 결정된 민족들이다. 물론, 고려인들은 이들보다 4년 일찍 일제와의 무력 충돌 위협을 줄이고 일제와의 국경선에서의 스파이활동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 

실로, 고려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30년대  초, 카자흐 초원에서  일어난 대기근의 나비효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앙아시아 농업개발과 고려인

 중앙아시아의  농업개발에서  고려인의  흔적은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37년에  강제이주해 온 고려인들의  땀방울이 중앙아시아의 현대적 농업발전에 기여한  공은 실로 크다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고려인들의  높은 정치의식과 집단농장 조직  경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조국을 떠나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은  항일의식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에도 매우  밝고  정치의식이  타민족에  의해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이는  소비에트 중앙정부의  정책들을  매우 잘 이해했고  현실에 적응시키는  능력 또한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연해주 지역에서 이미 집단 농장을 결성, 운영했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면서 대부분 집단 농장별로 이주해 왔다. 심지어  콜호즈의  이름도 연해주에서  사용하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서 신생 콜호즈에  붙이는 사례들이  많았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면서 곧바로 고려인들이 주도한 콜호즈를 조성할 수 있었다.  주로 크즐오르다주의 시르다리야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양파와  수박을 재배하기도  했지만 벼와 목화를  대부분 재배했던  고려인  콜호즈는 소련에서 가장 높은 농업생산성을 올리는 대표적인 소수 민족 콜호즈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외국 귀빈들이  소련을  방문 할 때 보여주는  단골  코스에 포함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흐르시쵸프 시절 크즐오르다의  대표적인  고려인  콜호즈인  제3인터내셔널에서  촬영한  영화 필름이 보관되어  있다.  

이 필름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서 대형  트랙터와 콤바인으로 황금 물결  일렁이는  벼를 수확하는  고려인 농부의  모습과 이를 견학하러 온 외국 지도자와 방문객들, 콜호즈  내  문화궁전과  농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려인 콜호즈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높은 생산성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1950년대에 고려인 콜호즈에서는 다수의 사회주의 노동 영웅을 배출했다. 이는 민족 대비 가장 높은 노동 영웅 배출 비율을 보여 준 것이었다. 고려인들은 콜호즈내에  학교, 작업장, 탁아소, 회의와 공연을 할 수 있는 인민 대회 궁전, 공동 식당 등을  잘  갖춤으로써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소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카자흐스탄도 자본주의 국가가 되고,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고려인 콜호즈는 위기에 직면했다. 1992년 이후 대부분의 고려인 콜호즈는 집단 농장의 성격을 상실하고 개인이나 기업이 운영하는 농장으로 변모되었다. 사회주의 시절, 대표적인 콜호즈였던 제3 인터내셔널이나 아방가르드 등은 여전히 농업활동을 하고 있지만 집단 농장의 성격을 상실하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경영되고 있다.

많은 고려인들은  자식 교육과  거주  여건 등을  이유로  도시로 떠나고  그  빈자리를 카자흐인 들로 채워졌다.

소수민족의  유형지로 변한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는 특히, 카자흐스탄은 소수민족들의 유형지로 변해버린 듯했다. 여기에 더해 2차대전 후 카자흐 북부지역에 농지 개간(‘처녀지 개발계획’) 과 공업화를 촉진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슬라브계 소련인들이 이주해 옴에 따라서 카자흐인은 이후 오랫동안(소련의  해체로 인한 카자흐스탄이  독립할 때까지) 자신의  공화국에서 인구 2위의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또한, 2차 대전 기간 중에 모스크바와  상트 뻬쩨르부르그  등  유럽에 속한 러시아 지역에  밀집되어 있던 공장시설과  노동자들을 독일군의  침략이 미치지 않는 중앙아시아로 대거  이전시켰는데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특히,  카자흐스탄의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어느 도시에 가더라도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슬라브계 소련인들이  도시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앙아시아  지역민들은 농촌에서 면화 재배  또는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시절에도  중앙아시아는 전체적으로  농업과 목축이  경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소련내에서 국민소득이  항상 하위권에  머물렀고  소련 중앙정부의  보조금으로 부족한  세수를  메꾸었다 

이 시기 또 하나 인상적인 대목은  2차대전 종전 후 일본군 포로들이  중앙아시아에 등장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유럽전선에서 독일을  패전시킨 소련군은  전력을  정비해서 동부전선에서  일제의  관동군를  밀어 붙이게된다.  이미  독일과의 전쟁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시베리아의 군수공장에서  생산한 탱크와  비행기로 무장한  소련군은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되던  관동군 60만명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고, 이들을  전쟁복구작업이 한창인  소련 전역에  보내게 되는데  알마티에도 포로들이 오게 된다. 이들이 그  당시 건설한  아파트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고골랴  거리에 있는 4층짜리  벽돌아파트 ( 자신들의 아버지가  지은 건물)앞에서 사진을  찍은 일본인  관광객을 가끔씩  볼 수 있다.  물론, 이 관동군속에는  조선인 징병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별도로 기회를 만들어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스탈린의 대숙청과  새로운 민족 엘리트들의 성장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된  스탈린의 대숙청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자를  가장 많이 사형시킨 사람은  다름아닌 함께 목숨걸고 혁명을 했던 동지들을  숙청한 스탈린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인류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회주의 라는 새로운 길을  가는데 있어서  혁명동지들간에는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했다. 혁명 직후에는 당내의  소수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세계열강들간의  전쟁의  기운이  높아가던  30년대에 접어들면 당내 민주주의 작동 원리가  멈춰서고 비밀경찰이 활보하던 짜르 통치 시절과 같은 당 운영 원칙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력을  쥔 스탈린은 2차세계대전을  향해가는  국제정세와 반혁명 음모, 국제사회의  대소련 억압정책, 국내적으로 급속한  공업화와 사회주의  건설 등을 이유로 일체의 노선 투쟁을  허용하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한가로이 노선투쟁을  할 때가  아니라는 스탈린의  인식은 동과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일본의  군국주의화, 독일의 나찌즘으로 무장하는  것을 보고 더욱  굳어지게  된다.

이때 스탈린이 빼어든 것은 바로  대숙청이었다.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심받아야 될 사람이다.”라고 말한 스탈린과  “1937년은 불가피했소. 우리가 혁명 후에 좌우로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들의 온갖 잔당이 존재하고 있고 파시즘의 공격 위험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파시즘과 연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1937년은 불가피했소. 전쟁 중 제5열이 없었다는 사실로써 우리는 1937년에 대해 빚을 진 거요. 지금 문서들이 감춰져 있으나, 시간이 가면서 진실이 밝혀질 거요. 그들은 적의 첩보기관과 연계되어 있었소.” 라고  말한 몰로토프의  말들에서  당시의  절박했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대숙청은 1937년부터 1938년 사이 소련의 정치, 경제, 국방, 행정, 사법, 언론, 문화예술, 과학기술, 교육, 농업, 산업 등 전 분야에서 스탈린 체제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혹은 비판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조리 숙청당한 사건으로써 약 7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형을  당했고 강제노동수용소에 노역이나  질병으로 사망한  인원이 13만여명이 되는  등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당 내의 스탈린 반대파들이 걸려들었고 점차 부하린, 리코프 등 레닌과 함께 혁명을 이끈 고참 볼셰비키들이 대부분 처형되거나 체포되기 전 자살했다. 그리고 이들과 연계된 당과 행정부의 중간 간부들이 끌려가기 시작했고, 점점 퍼져나가서 학계와 언론, 문화예술계를 거쳐 결국에는 민간인을 포함한 온 사회로 확산되었다. 대숙청이 절정을 이루던 1938년에는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소련군까지 숙청의 파도에 휩싸여서 장교단의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때  중앙아시아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비롯한  제반영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자디드  지식인과   옛 알라슈  당  지식인  그리고  무슬림 공산주의자  등   민족엘리트들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그들을  반혁명 활동가  또는 민족주의자로 몰아  숙청함으로써  이후 중앙아시아의  발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민족  엘리트들은  스탈린 사후 비로소 다시  당과  일부 기관의  요직에 등용되었다.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민족 엘리트들이  카자흐의  쿠나예프와  우즈베크의  라시도프이다.  이들은  1960년대에  등장하여  20여년간  양 공화국의 공산당  제1 서기장으로  군림한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출신지방과 부족  그리고 쥐즈에  의거한  강력한 권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이러한 정치 문화는 전통이 되어  현대 중앙아시아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그동안  정치참여의 길이 막히고  체제의 혜택을 받지 못한 민중들 또한 상부상조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지연 또는 혈연 조직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봉건제 근절을강조한  소비에트체제속에서도 이는 유지되고 오히려 강화된 측면이 있다.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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