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탄압 희생자의 날’ 특별기고
‘알지르’를 아십니까? 김상욱(민주평통자문회의 카자흐스탄지회장) 정치탄압 희생자의 날 오는 31일(월)은 ‘정치탄압 희생자의 날’이다. 이 날은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0년대 후반부터 10여년 동안 옛 소련에서 이루어진 소수민족들에 대한 강제이주와 스탈린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이 날은 CIS(독립국가연합) 고려인들 뿐만 아니라 독일, 크림 타타르, 쿠르드, 체첸 인 등 당시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모든 민족들에게도 특별히 의미가 있다. 가장 먼저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의 뒤를 이어 독일인, 크림타타르인, 쿠르드인, 체첸인 등이 차례로 강제이주라는 공통의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다. ‘원동변강의 국경지역에서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이주시킬 데 대한’ 소련인민위원회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 (1937년 8월 21일부)이 나온 후 1937년 가을, 17만 2천여명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과 우스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 결정서는 몰로또브와 스탈린이 사인했고 일본을 위한 간첩행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예방책으로 이주를 시켰다고 적고 있다. 1937년 9월부터 1938년 초까지 모든 고려인들이 원동에서 강제이주 되었다. 이들 중 9만 8천명이 카자흐스탄으로 왔고, 우즈베키스탄으로 7만 4천명이 갔다. 당시, 고려인들에게 아무런 이유도, 가는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았고 불과 며칠 동안에 길 떠날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고려인들이 탄 화차는 이렇게 고향땅을 뒤로 하고 시베리아벌판을 지나 머나 먼 길을 달렸다. 당시 고려인들은 강제이주과정에서의 고통이나 낯선 중앙아시아에서 황무지를 일구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닦아야 하는 고난의 숙명보다는 자신과 공동체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다. 더불어, ‘강제이주’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이 같은 일이 우리 민족 앞에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할 수도 없었던 숨막히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고통은 가중되었다. ‘인민의 적’, 일제의 간첩행위를 한 ‘배신자’라는 딱지는 고려인들의 처지를 더 어렵게 하였다. 하루 아침에 ‘반역자’로 몰린 고려인들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알지르 수용소’ 는 어떤 곳이었나? 이 글이 ‘알지르를 아십니까?’ 라는 제목을 달고 고려인 강제이주와 당시 상황에 대해 먼저 설명한 이유는 ‘알지르’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강제이주’라는 역사의 한 단면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지르는 ‘Akmola Prison for Wives of Traitor’ 라는 내용의 러시아어 앞 글자들을 따서 불리게 된 명칭이다. 문을 연 1938년부터 폐쇄된 1953년까지 단지 스탈린 체제를 반대하는 남편을 두었다는 이유로 1만 7천여 명의 여성이 수용되었고, 이 가운데 고려인도 있었다. 알지르 수용소가 건설된 부지는 카자흐인 마을과 러시아계 주민들이 살던 7개 마을로부터 압수된 것이었고, 지역주민들의 일부 가축도 수용소의 필요에 의해 몰수를 당했다고 한다. 이곳의 구성원은 ‘조국의 배신자 가족’에 대해 5 년에서 10 년의 징역 또는 먼 지역으로의 추방’이라는 형태의 처벌을 받은 정치범의 부인들로 이루어졌다. 1950 년 초에 알지르 수용소는 폐쇄되었지만 이들은 1958 년까지 이전 거주지로 돌아갈 권리가 없었다. 당시 수감자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에 하나는 카자흐 대초원의 혹독한 기후였다. 여름에는 40 도의 더위와 모래바람, 모기와 벌레 겨울에는 영하 40 도까지 내려가는 혹한과 눈보라는 수감자들을 괴롭혔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수용소 한가운데는 갈대가 무성했는데 이 갈대는 겨울에는 막사를 데우는 땔감으로 사용되었고 여름에는 수용소 막사를 건축하는 재료로 흙과 함께 사용되었다. 노동교화소였던 알제르 수감자들은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과 소포 수령이 금지되었고 과거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는 음악가, 시인, 교사 등도 있었지만 농업이나 건설 현장의 보조로 일했고 병든 노약자와 아이들은 자수와 봉제 공장에서 일했다. 현재는 알지르 박물관이 들어서 있는데, 형체가 없어진 수용소 일부에 정치탄압과 전체주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위해 2007년 5월 31일 (정치탄압 희생자의 날)에 개관하였다. 특히, 박물관 외부에는 1937년 당시 고려인들이 타고 왔던 화차가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다. 알지르는 카자흐스탄의 수도 누르술탄에서 교외로 차를 타고 약 30분을 달리면 갈 수 있고 2013년에 제막된 고려인 정치탄압 희생자 추모비를 볼 수 있다. 추모비는 주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관과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가 스탈린 정권시대의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가혹한 고문, 폭행과 강제노역, 혹독한 기후, 열악한 환경에 의해 희생을 당한 이들에게 영면을 빌고, 다양한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 인권이 존중받는 세상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독일,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등 6개국이 이미 자국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를 설립한 데 이어 일곱번째로 건립된 한국의 추모비 제막식 행사에는 독립유공자 황운정의 딸, 고 황 라이사 운정예브나(당시 93세)가 참석하여 부친인 황운정 선생이 카라간다 강제노동수용소 ‘카를락’에 수감되었으며, 친척 중 한 분이 알지르 수용소에서 희생을 당한 사연을 말해 분위기를 숙연케 했었다. 요컨대, 다가오는 정치탄압 희생자의 날(5월 31일)을 앞두고 정치적 낙인과 가혹행위에 의해 고통과 희생을 당하는 이들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하고 80여년 전, 폭력과 전쟁으로만 문제를 해결할려고 했던 야만의 시기에 희생당한 모든 이들의 넋을 다시 한번 기리면서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 한국인들의 행렬이 카자흐스탄 ‘알지르’에도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