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
고려문화원장
1937년 스탈린 강제 이주 당시 기근 속에서도 환대
고려인들은 크질오르다 개간하며 ‘번영과 풍요 일궈
김유리 헌법위원회위원장 등 정‧관‧재계에서 맹활약
지난 27일, 카자흐스탄국립도서관에서 열린 고려일보 100주년 기념전시 개막식
<카자흐인들은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에게 빵을 건네며 포용했다. 그 덕분에 고려인들은 낯선땅에서도 잘 정착할 수 있었고 고려일보, 고려극장, 고려말 라디오 등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2023.2.27 almatykim67@yna.co.kr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정착한 이 땅에서 더욱 큰 감회로 104주년 삼일절을 맞고 있다. 2023년 3월 1일은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한 3.1봉기 104주년이 되는 날이다. (‘3.1운동’에는 이 역사적 사건을 다 담아낼 수 없어서 ‘3.1봉기’라고 표현한다)
104년 전 이날 우리 겨레는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극악무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조선의 자주독립을 외쳤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이후 3개월간 전국 방방곡곡에서 진행된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7000여 명이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려일보는 당시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되고 있었는데, 조선의 218개군 중에서 211개 군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약 200만 명이 참가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일보에 따르면, 석달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든 독립의 함성은 일제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잔학하게 진압되어 조선 땅은 애국지사들의 피로 물들었다. 8000명이 피살되었으며 약 1만6000명이 부상을 당했고 5만2000명이 감옥에 갇혔다.
조선에서 일어난 3.1봉기의 메아리는 10만여 명의 동포들이 살고 있는 두만강 건너 연해주에서 울려 퍼졌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니꼴스크-우수리스크, 스빠스크를 비롯해서 동포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3.1봉기에 동조하는 시위행진과 군중집회가 진행됐다. 여기에는 연해주 동포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인, 중국인 그리고 기타 소수민족 대표자들도 적극 참여했다.
일례로 1919년 3월 18일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일제식민주의자들을 반대하고 조선독립을 외치는 대중적 시위운동이 진행되었고 '독립선언서'가 일본영사관구내에 뿌려졌다. 이를 목격한 러시아인 야로멘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은 태극기와 붉은기로 장식되었다. 조선인의 시위는 신한촌에서 시작하여 시내 중심으로 행했다. 자동차를 탄 사람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뿌렸다. 시위 운동 참가자들의 압도적 다수가 조선의 청년들이었지만 러시아인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조선 대표단은 러시아어, 영어, 조선어와 중국어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외국 영사관에 뿌렸고 왜놈들은 '독립선언서'가 눈에 띄면 그것을 뜯어 찢어버렸다.”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간도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대중적 시위와 군중집회가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10월 혁명(1917년)과 이어진 내전으로 인해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조선의 땅과 자주독립을 빼앗아갔으며 조선의 우수한 아들들을 사형시키거나 감옥에 가둔 일본강도들과 벌써 15년동안 싸우고 있다” 고 실상을 전하면서 “조선의 항일독립군이 소련의 붉은 군대와 함께 행동할 때 왜놈들을 블라디보스톡과 조선에서 쫒아낼 수 있다”고 단합을 호소하였다.
이때 연해주에 살고있는 동포들은 이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기 구매를 위한 자금을 모으고 있었고, 국경 부근지역에서는 일제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준 조선인 빠르티잔 부대들이 조직되었다. 항일 빠르티잔부대들은 일본수비대를 공격하여 무기를 노획했고, 철도 교통 연락을 마비시켜 일제의 군부대가 3.1봉기를 진압하는데 출동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3.1봉기 1주년에 즈음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진행되었고 당시 출판물에는 “3월 1일은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국경일이다”라고까지 했다. 1920년 3월 1일 하바롭스크, 니꼴스크-우수리스크 및 기타 동포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조선독립을 위한 시위가 있었고, 동포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도 함께 참가했다.
언론도 호응했다. ‘쁘라브다’, ‘이즈베스찌야’, ‘에호’ 및 당시 연해주에서 발행되던 동포신문들인 ‘로농신보’, ‘경종’, ‘로동자’ 등의 신문들이 자유와 독립을 위한 조선인들의 투쟁에 관해 기사를 쏟아냈다. 1926년 3월 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군중 집회에서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1919년 3월 1일에 휘날린 조선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기치를 승리의 날까지 들고 나가리라 굳게 확신한다”는 연설이 나왔다.
요컨대, 3.1봉기는 자주독립을 향한 온 겨레의 뜨거운 피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하게 만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래서 삼일절은 우리만의 민족 기념일이 아니라 재외동포가 사는 이웃 나라들에서도 그 나라 주민들과 함께 경축하는 국제적인 명절이 되었다.
카자흐에서는 ‘감사의 날’
카자흐스탄 대통령 직속 기구인 ‘민족회의’는 2016년, 국가전략문제연구소에서 회의를 갖고 3월 1일을 ‘감사의 날’로 지정했다. 민족회의 소속 위원들과 카자흐스탄 내 소수민족 대표들뿐만 아니라 의장인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130여 민족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국경일로 지정한다”고 결의한 것이다.
이날이 이 땅에 사는 우리들(고려인)에게는 삼일절과 함께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국경일로 다가오는 이유는 193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거의 1만km에 이르는 거리를 강제 이주당한 우리(고려인)에게 빵을 건넨 이들이 바로 이 땅에 살던 카자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 카자흐초원에 몰아친 가뭄과 기근으로 인해 자신들이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실려 온 우리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의 부모들은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시리다리야 강물을 끌어들여 반사막 기후인 카자흐 땅을 황금빛 벼 이삭이 넘실대는 옥토로 바꾸어 놓는 것으로 화답했다. 고려인 꼴호즈들은 수많은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탄생시키면서 국가의 계획생산량을 초과 달성했다. 흐루시초프 당서기장 시절, 서방의 대표단에게 단골로 보여주었던 농장이 바로 고려인들의 피땀으로 만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던 선봉(아방가르드) 꼴호즈였다.
이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이 독립된 후 신생국 카자흐스탄의 국가기반을 닦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다시 한번 화답했다. 김유리 헌법위원회위원장은 카자흐스탄의 헌법의 기초를 닦았고, 김 블라지미르 카작므스회장은 적자에 시달리던 구리 콤비나트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들었고 런던 증권시장에 상장까지 시켰다.
채유리 카스피언 그룹회장(전 상원의원)은 한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했고, 김 베체슬라브 카스피은행 회장은 카자흐스탄의 금융산업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일조했다. 김 에두아르드 테크노 돔 회장과 남 올렉 쿠아트건설 회장은 카자흐스탄의 가전유통업과 건설업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이외에도 카자흐스탄의 문화예술 분야의 발전과 과학, 의학분야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모국과의 관계를 통해 카자흐스탄 공연문화의 수준을 높이고 한류 확산의 선봉장이 된 고려극장과 코로나19 유행 시기에 보건부 장관으로 활약한 최 알렉세이를 꼽을 수 있다.
포브스지가 발표하는 카자흐스탄의 상위 50위 부자명단에 8명의 고려인들이 포함되는 사실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1937년 강제 이주의 굶주림에 지친 우리에게 빵을 건네던 카자흐인들의 그 따뜻한 마음은 오늘날 평화와 화합의 민족정책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인들의 성공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삼일절이면서 ‘감사의 날’로써 한국과 카자흐스탄에서 동시에 국경일이 되는 3월 1일, 올해는 선조들의 항일 독립정신과 함께 고려인들을 품어준 카자흐초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그 어느 해보다 진하게 가지는 해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