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기획특집특별 기획 : 주치  울루스  성립  800주년  특별 기획’ – 18

특별 기획 : 주치  울루스  성립  800주년  특별 기획’ – 18

몽골제국의 확장사  1 : 중앙아시아로의 진출

김상욱(고려문화원장, 한인일보 주필)

   몽골고원을 통일한 징기스 칸은 1219년부터 1225년까지 남으로는 인더스강 유역에, 서로는 카스피해를 넘어 남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거의 전역을 지배하에 두고, 1227년 서하를 정복하였다.

  제2대 오고타이 칸(태종, 재위 1229~1241년)은 금을 멸망시키고(1239년) 화북을 영유하였으며, 그 원정군은 러시아로부터 동유럽까지를 석권하였다.

  제4대 몽케칸(재위 1251~1259년)은 서아시아의 압바스왕조를 무너뜨려 그 영역은 동으로는 동해로부터 서로는 남러시아에까지 이르렀다. 뭉케 사후 그 뒤를 이은 쿠빌라이는 마침내 1276년 남송을 함락시킴으로써 몽골제국은 그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이 대영역은 몽고습관에 의해 징기스 칸의 여러 자제에게 분할되었다. 몽고의 본지 및 화북은 몽고 황제의 직할령이 되었고 남러시아에는 킵차크 칸국(장자 쥬치의 아들 바투), 서아시아에는 일 칸국(막내 아들 투루이의 아들 훌라구), 서투루키스탄에는 차가타이 칸국(둘째 아들 차가타이), 동투르키스탄에는 오고타이 칸국(태종의 자손에 의해 계승)의 4칸국이 세워졌고 그 밖의 지역도 징기스 칸의 일족, 유목귀족에게 나누어졌다.

  그리하여 몽골카안을 종주로 하는 대제국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번 호 부터는 바로 이 과정을 몽골제국의 확장사 라는 이름으로 어떤 왕조들이 몽골에 의해 정복당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번째로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했던 호라즘 왕조 부터 살펴보겠다.

호라즘 왕조

  호라즘 왕조 또는 제국은 아무다리야강 하류 유역,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히바에 있었던 튀르크계 국가(1077년~1231년)로 알려져 있다.

  셀주크 왕조의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부장 아누시티긴이 이 땅에 왕이 되었고 아들 쿠트브 웃딘 무함마드(재위 1097~1127)는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에서 독립하여 우르겐치를 수도로 하였다.

  이란,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고 알라 웃딘 무함마드(재위 1200년 – 1220년)는 만주에서 온 카라 키타이(서요)를 정복하고 튀르크 도시인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했다.

  그러나 1218년, 지금의 카자흐스탄 서부에 위치한 오트라르의 영주 이날축이 몽골의 캐러반들을 간첩혐의로 처형하는 순간 이 왕조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외교문제가 되었고 호라즘과 몽골은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을 막 끝낸 후 아직 통치 체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던 호라즘 왕조는 타직인 보병과 투르크인 기병을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분산된 각각의 군대 및 요새들의 공조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최강의 기병들로 구성된 몽골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개전 당시 호라즘의 총 병력은 수십만에 달했다.특히 캉글리족과 킵차크족으로 이루어진 기병대는 호라즘 최강의 군대였다. 거기에 더해 몽골과 호라즘 사이에는 크즐쿰 사막이라는 자연 장애물까지 놓여있었고 몽골인들이 야전에는 강하지만 공성에 서툴다는 정보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몽골군이 과거의 몽골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크즐쿰 사막을 건넌 몽골군은 1219년 오트라르에 도달한다. 칭기스 칸은 “지휘관은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날축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사로잡혀  칭기스 칸 앞에서 금을 녹인 물을 눈에 들이붓는 방식으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사마르칸트에는 약 10만의 수비 병력이 있었으나 1220년 3월 부하라가 함락되자 사마르칸트는 고립되었고 포위된지 닷새만에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징기스칸이 매우 사랑했던 손자가 전사하게 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칭기스 칸으로부터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죽여라”라는 명이 있었고 이는 충실히 지켜졌다고 한다.

  개전 초 부터 우왕좌왕한 모습을 보였던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는 몽골군을 피해 달아났으나 징기스칸 부대의 명장으로 소문난 제베와 수부타이의 집요한 추격을 받아 1220년 12월 카스피해 연안에서 병사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군은 카프카즈지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 러시아 원정의 초석을 쌓게 되는데, 러시아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호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몽골군의 다음 목표는 아랄해 남쪽에 자리잡은 수도 우르겐치. 우르겐치의 성벽은 견고했고 주민들이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시가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골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도시는 함락된 후 주치가 소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주치가 도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고도 한다.

  공성의 진척이 늦어지자 칭기스 칸은 주치와 차가타이를 잘라버리고 오고타이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1221년 4월 우르겐치가 함락되자 주민들은 저항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잘랄 웃 딘은 1221년 몽골군이 철수한 우르겐치로 돌아와 술탄으로 즉위하고 몽골과의 항쟁을 계속했다. 잘랄 웃 딘은 카불 근교에서 벌어진 몽골군과의 야전에서 승리했는데, 이는 호라즘이 몽골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지막 승전이기도 했다. 사마르칸트에 있던 칭기스 칸이 본대를 이끌고 내려와 잘랄 웃 딘의 군대를 궤멸시켰고 근거지인 가즈니를 완전히 파괴했다. 잘랄 웃 딘은 포로로 잡힐 위기에 빠졌으나 기적적으로 탈출해 인도로 달아났다.

Share With:
Rate This Article

almatykim67@gmail.com

No Comments

Sorry, the comment form is closed at this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