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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간 볍씨

김상욱

알마티 고려문화원장

본지 주필

  인천공항에서 서쪽으로 약 6시간 30분을 비행하면 카자흐스탄 최대의 도시이자, 중앙아시아의 항공허브인 알마티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국내선으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서쪽으로 2시간을 더 날아가면 크즐오르다 라는 도시가 있다.

  카자흐어로 ‘붉은 천막’이라는 뜻을 가진 이 도시는 천산산맥에서 발원한 시르다르야 강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한때 카자흐스탄의 수도였다. 

  동서남북 사방 수백킬로미터를 달려도 작은 언덕 하나 없이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볼 수 있다. 강수량이 적고 겨울에는 무척 추운 한량사막 기후인데, 그 땅이 매우 척박하여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천년 동안 이곳은 낙타와 양을 키우며 살아온 유목민들의 땅이었다.

  이런 도시의 상징탑에 벼이삭이 조각되어 있다면 믿으시겠는가? 공항에서 도심까지는 약 20여분이 걸리는데, 도시 초입에 다다르면 우뚝 솟은 상징탑의 꼭대기에 벼이삭이  새겨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1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역사의 한 토막을 호출해와야 한다.

벼농사의 달인이 겪은 역사의 아이러니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전세계에 번져가던 혁명의 불길은 러시아에서 마침내 성공했다. 혁명과 곧 이은 내전으로 러시아의 경제는 피폐해졌다.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전후복구와 경제발전을 위해 크즐오르다 지역을 주목했다 시르다리야강을 활용한 농업혁명과 이를 담당할 고려인에 주목했던 것이었다.

  이를 위해 당시 정부관계자들은 연해주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 12가정을 카자흐스탄으로 초청했다. 평생을 땅에 메어 살아온 우리의 선조들이 척박한 황무지를 옥토로 바꿀 농업전문가로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이들이 실험재배한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벼였다. 대부분의 생육 기간 동안 논에 물이 있는 상태로 재배되는 작물인 벼는 밀에 비해 물을 두 배 넘게 필요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수량이 적고 특히나 소금기가 많은 이 지역에서 쌀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한 도전에 고려인들이 나선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벼농사의 성공은 고려인들을 고난과 시련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 결과를 만들었다. 고려인 강제이주의 경제적 배경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

  1931년, 일본이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침략을 본격화하자 일본인과 외모구별이 어려운 한인과 중국인들에 대한 소련당국의 경계는 커져만 갔고 1937년 7월 일본이 전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위기감을 느낀 소련당국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의 이주시켰다.

  강제이주의 배경을 놓고 국내외의 다양한 견해중에 일본과 대립하기 싫었던 소련의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혁명과 내전으로 피폐화된 자국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대외갈등을 피하고 싶은 것이 소련의 속내였고, 극동의 한인을 일본이 분쟁의 씨앗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중앙아시아의 농업개발을 위해 고려인들의 농업기술력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주가 시작되자 일본은 재빨리 외교라인을 통해 소련에 항의했다. 소련은 한인의 이주는 자국 시민에 대한 문제라고 주장하며 선을 그었지만, 일본은 한인들을 자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런 사실을 식민지 조선에 알려서 일반 민중들에게 반소 정서를 퍼뜨리는데 활용했고 이러한 정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퇴거는 즉시 시작되어 1938년 1월 1일에 끝낼 것을 명령받았다. 열차 사고의 결과로 일부 사상자가 발생했다.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중앙문서보관소, f. 1208, op 1, d. 23, l. 3,5,8,9). 한인들 사이에서 이미 전염병, 특히 어린이의 홍역이 시작되어 60 %의 사망률을 보였다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중앙문서보관소, f. 1490, op. 1, d. 7, l. 11).

  카자흐스탄에서는 1938년 봄, 70개의 독립적인 집단농장이 형성되었다. 이 중에는 크즐오르다 지역의 22개 쌀 재배 농장을 포함했다.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중앙문서보관소, f. 1481, op. 10, d. 13, l. 76-97).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가져온 볍씨를 크즐오르다의 황무지에 뿌려서 이 지역을 중앙아시아 최대의 벼농사 지대로 탈바꿈시켰다.  현재 이곳은 카자흐스탄 쌀생산량의 93%를 담당하고 있고 카자흐스탄을 쌀 수출국으로 만들었다.

고려인의 밥상은 바미무리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 더 넓게는 중앙아시아 농업개발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미 1907년 러시아 연해주 시절 부터 수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에 벼농사를 보급한 쌀농사의 달인들은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끌어올렸고, 중앙아시아에 이주해서도 수전농법을 통해 획기적인 벼생산량을 기록했다

  당시 자타가 공인했던 벼 재배 영웅은 김만삼이었다. 그는 크즐오르다 ‘선봉’콜호즈에서 벼 재배 성공신화를 이끌었다. 강제이주된 지 불과 4년 뒤에 터진 2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능력이 크게 빛을 발했고 스탈린의 주목을 끌었다. 그래서 1945년과 1946년 두 번에 걸쳐 ‘붉은 노동훈장’을 받았다.

  김만삼의 뛰어난 벼재배기술은 당연히 인근 꼴호즈에 사는 동포들에게도 전수되었지만 이브라이 자하예프 라는 제자에게도 이어졌다. 이 제자는 후에 스탈린상을 수상했고,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민족간의 농업문화 전수와 교류의 좋은 사례로 거론된다.

  사정이 이러하자 고려인들이 사는 콜호즈에서는 ‘고려말’(우리말)을 배우는 카자흐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꼴호즈 조합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 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고려말은 당시 최첨단의 기술용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올 봄, 고려문화원이 매년 실시하는 고려인 동포현장 답사 차 크즐오르다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크즐오르다에서 자동차로 약 3시간을 달리면,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이 우주로 나갈 때 이용한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 도착하는데, 이곳까지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서 고려인이 만든 꼴호즈들이 있다. 이중에 한 곳이 바로 ‘선봉’ 꼴호즈인데, 가을 추수때는 지평선 끝까지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장관을 목도할 수 있는 곳이다.

  마을에 들어서자 도로와 가로등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날씨가 아직 쌀쌀해서 인지 문화궁전내 대강당은 따뜻한 난방이 들어오고 있었고, 1층 전시관에는 노동영웅, 김만삼의 사진과 그가 달성한 쌀 생산량과 기타 업적이 적혀 있었다.

  문화궁전 근처의 김 안토니나 할머니 댁을 예고 없이 들렀다. 마침 가족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멀리 모국에서 손님이 오셨다면서 며느리에게 먹던 밥상을   치우고 새로 상을 봐오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러지 마시라고 말하고, 밥상을 사진에 담아도 되는지 여줘보고 허락을 얻었다.

  그 밥상에는 바미무리(밥이물이:물밥), 짐치(김치), 된장, 토마토가 놓여있었다. 늘 이렇게 드시냐는 질문에 김 안토니아 할머니는 “고려사람들은 바비무리, 짐치, 장무리(장물 : 된장국) 만 있으면 되지 또 뭐가 필요하겠소” 라며 웃으면 대답해주었다.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 모국과의 오랜 단절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문화와 우리의 식습관을 유지하고 있는데, 밥과 김치 외에도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차떠기(찰떡), 증페이(증편), 가주리(한과) 등이 있다. 이 모두가 고려인들이 쌀농사를 짓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내가 자주 가는 베라 할머니댁의 경우, 접시보다 약간 음푹한 그릇에 밥을 동그랗게 퍼 놓고, 찐고치(고추를 삶은 것)를 된장에 찍어 먹으라고 내놓는다 거나 밥그릇 옆에 밥그릇보다 큰 물그릇을 놓아주면서 물그릇에 밥을 담아서 말아 먹어라고 한다. 이때 보통  배챠짐치(배추김치)를 주 반찬으로 먹는다.

고려인 합창단의 단장이기도 한 이 분은 많은 손님을 자주 치루기로 유명한데, 손님이 20명을 넘을 경우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서 국시 분트리(국시 분틀 : 국수 뽑는 기계)로 국시를 만들고 자신의 텃밭에서 직접 키운 호박, 고치, 파, 오이, 토마토, 불기(상추), 염지(부추), 깻잎 등을 넉넉히 넣고 맛있게 국수를 만들어 대접하곤 한다.

  한편, 갈수록 인기를 높여가고 있는 K-푸드.  한식이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훨씬 전부터 카자흐스탄에서는 이미 한식(韓食)은 ‘고려인들의 음식’으로써 꽤나 익숙한 존재였다.

  소련 시절부터 전국의 재래시장의 매대와 슈퍼마켓의 진열대, 그리고 러시아인ˑ카자흐인ˑ고려인 구분 없이 전국민의 식탁 위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다양한 ‘까레이스키 살라트(고려인 샐러드)’였다. 카자흐스탄 최대도시 알마티 시내 한복판에 있는 ‘질료늬 바자르(청과물시장)’의 고려인 김치 골목에 가보면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민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고려인 동포사회는 문화접변을 통한 식문화의 변화속에서도 밥을 주식으로 하면서 다양한 ‘까레이스키 살라트’를 반찬으로 먹는 우리의 식습관을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어제 고려인 행사에서 만난 베라 할머니는 일중일 동안 휴양소에 다녀오시느라 알마티를 비웠다면서 내일 점심때 합창단원을 다 모아서 밥먹기로 했다면서 나에게 꼭 참석하라고 하신다.

  내일 베라 할머니댁의 밥상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