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헌법, 그리고 ‘신 카자흐스탄’이라는 실험
김상욱 고려문화원장/본지 주필
얼마 전 카자흐스탄의 한 국영방송사를 찾았다. 한국 방송사와 콘텐츠 교류 확대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미 양국 방송사 간 협력의 틀이 마련되어 있었고,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를 계기로 협력을 더욱 넓혀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져 회의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회의가 끝날 무렵, 나는 오는 8월 한국 방문을 제안했다. 예전 같았으면 반가운 표정으로 일정을 조율했을 사람들이다. 그런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죄송하지만 당분간 해외 출장이 어렵습니다.”
이유를 묻자 모두가 같은 대답을 했다.
“새 헌법이 시행되면서 나라 전체가 바뀌고 있습니다.”
7월 1일부터 발효된 새 헌법에 맞춰 정치제도와 행정조직을 손질하고, 조기 총선을 준비하며, 새로운 의회 체제를 출범시키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방송사 역시 국가적 변화를 기록하고 전달해야 하는 만큼 사실상 비상체제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표정에서 느낀 것은 단순한 업무 과중이 아니었다. 나라의 시스템 자체를 새로 설계하는 거대한 전환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긴장감이었다.
카자흐스탄은 지금 ‘신(新) 카자흐스탄(New Kazakhstan)’이라는 이름의 국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번 개헌은 흔히 생각하는 권력구조 개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와 행정, 산업과 기술, 외교와 국가 전략까지 하나의 큰 그림 속에서 다시 설계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2022년 유혈사태 이후 제기된 정치개혁 요구를 제도적으로 마무리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인공지능(AI) 시대와 미·중 전략경쟁,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변한 국제질서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 재설계이기도 하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은 이를 “새로운 국가 발전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수백 건의 법률을 손질한 데 이어 이제는 새로운 제도 위에서 경제와 사회를 다시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눈에 띄는 변화는 AI를 국가 전략의 중심에 세웠다는 점이다.
많은 나라가 AI를 미래 산업 가운데 하나로 이야기하지만, 카자흐스탄은 국가 운영체계 자체를 AI 중심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행정 서비스는 디지털 플랫폼으로 전환하고,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활용을 헌법적 가치로 끌어올렸으며, 데이터센터와 사이버보안을 국가 핵심 인프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도 함께 내놓았다.
석유와 가스로 성장한 국가가 이제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알마티 북동쪽에 조성 중인 알라타우 신도시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곳은 단순한 신도시가 아니다. AI 기반 스마트시티와 첨단산업을 집적하는 미래형 도시를 목표로 한다.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스마트시티 사업도 추진되고 있으며, 도시 운영 전반에 디지털 트윈과 AI 기술이 적용될 예정이다.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 산업 생태계를 실험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외교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놓인 지정학적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은 어느 한쪽에 기대기보다 다변화 외교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와는 안보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는 제조업과 디지털 산업 협력을 확대하고, 미국과 유럽에는 희토류와 핵심광물, 친환경 에너지 분야 협력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중간회랑(Middle Corridor)의 가치가 급격히 높아졌다. 한때 내륙국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여겨졌던 위치가 이제는 유라시아 물류의 중심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뀌고 있다.
지정학적 약점을 전략적 자산으로 바꾸려는 시도다.
이 변화는 한국에도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양국 협력은 자동차와 건설, 자원개발에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AI, 데이터센터, 스마트시티, 디지털 행정, 물류, 신재생에너지 같은 분야가 새로운 협력의 중심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축적해 온 전자정부와 스마트시티 경험은 카자흐스탄이 추진하는 국가 현대화 전략과 맞닿아 있다. 새로운 협력의 무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제도를 바꾸는 것과 국가를 바꾸는 것은 다르다.
새 헌법이 곧바로 민주주의의 성숙이나 경제적 도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권력구조가 실제로 견제와 균형을 구현할 수 있는지, AI 중심 전략이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다변화 외교가 거대한 강대국 경쟁 속에서도 실질적인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확인해야 할 과제다.
국가 개혁은 선언보다 실행이 어렵고, 제도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31년째 카자흐스탄에서 살아오며 이 나라의 수많은 변화를 지켜봤다. 독립 직후의 혼란도, 석유 호황도, 금융위기도, 정치적 격변도 모두 경험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분명하게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카자흐스탄은 언제나 변화의 속도보다 방향을 더 중시해 왔다.
지금 시작된 ‘신 카자흐스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공 여부는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나라가 더 이상 자원 수출국이라는 과거의 틀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AI와 디지털 기술, 그리고 유라시아를 잇는 지정학적 위치를 새로운 국가 경쟁력으로 만들겠다는 거대한 실험.
그 실험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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