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으로, 그러나 마음은 아직 알마티에

꿈같던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출근길에 나섰다. 매일 지나던 그 도로, 매일 듣던 음악, 매일 보는 하늘. 그런데 며칠 전, 나는 분명히 알마티에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보이던 설산, ‘침블락’을 바라보며 눈이 부시게 감동받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나에게 여행은 늘 동남아였다. 익숙하고 안전하고 편안했다. 그런데 이번엔 전혀 계획에도 없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어쩌다 보니 발을 들이게 된 낯선 땅이었다.
정말 낯설었다.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 자체도 생소했지만, 알마티라는 도시는 더더욱 그랬다. 거리에는 유럽의 흔적이 묻어났고, 어떤 순간은 몽골을 걷는 듯했다가, 이내 서울 골목 같기도 했다. 그러다 멀리 보이는 설산에 시선을 빼앗기면, 마치 히말라야 어딘가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국적인 풍경만큼이나, 그곳의 사람들도 다양했다. 단일민족의 테두리 속에서 자라며 ‘우리끼리’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나에게,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알마티는 충격처럼 다가왔다. 유럽계의 금발 아이들과, 아시아계의 검은 머리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거리에서도, 버스에서도, 식당과 쇼핑몰에서도.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문득, 고려인들은 어디에 속해 있을까 생각했다. ‘고향’, ‘우리’, ‘민족’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다시금 느꼈다. 나도 모르게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 여행은 언제나 익숙한 세계의 경계를 깨뜨리는 일이다.
이런 생각을 따라 발길은 알마티 박물관으로 향했다. 상쾌한 아침, 버스를 타고 걸음을 옮겨 도착한 그곳엔 카자흐스탄의 오랜 역사가 차분히 전시되어 있었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를 지나 지금의 카자흐스탄이 되기까지, 이 땅은 유목의 숨결을 품고 살아왔다. 더 놀라운 건 그 유목의 흔적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 도시는 도시였지만, 그 안에 숨겨진 수천 년의 시간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단연 침블락이었다. 설산이 품은 고요함을 꼭 한 번 마주하고 싶었다. 셋째 날,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도착했을 때,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지만 나는 의욕이 넘쳤다. 첫 번째 케이블카를 타니 빗방울이 떨어졌고, 두 번째에선 눈발로 바뀌었다.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려던 순간,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얇은 패딩 한 장으로 버티기엔 설산은 너무 추웠고, 마음은 그 소리에 움츠러들었다. 꼭대기엔 오르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마신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와인 한 잔은 이상하게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아쉬움은 다음 여행의 이유가 되어주겠지.
나는 여행을 쉽게 하지 않으려 한다. 택시보단 버스, 전용 리무진보단 동네 산책, 패키지보다는 직접 부딪히는 발걸음을 선호한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도시의 본모습이, 사람들의 진심이 가끔씩 불쑥 나타난다.
공항 가는 날도 그랬다. 퇴근시간,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버스에 올랐다. 사람들로 가득한 버스 안에서 내 가방은 민폐에 가까웠지만, 자리가 나자 사람들이 나를 향해 앉으라 손짓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고, 그 따뜻함은 공항까지 동행했다. 사실 그런 장면은 이번 여행 내내 반복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어르신이 없으면 여성에게 양보했다. 약자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알마티 사람들의 따뜻함을 보며 새삼 나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찰나 같았던 시간,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엔 오래도록 남을 여행이었다. 눈부신 설산과 다채로운 거리, 그리고 말없이 자리를 내어주던 사람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내 마음 어딘가엔 아직도 알마티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지희 사회복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