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3]
초원의 권력변동이 서방으로 영향을 끼치던 시대에서 서쪽의 변화가 카자흐 초원으로…
지난호에서는 카자흐 칸국의 성립과 변방세력이었던 모스크바 공국 중심의 러시아 라는 지방정권의 등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15세기 중반, 모태인 킵차크 칸국이라는 중앙권력의 약화와 동시에 진행된 지방정권(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카잔 칸국, 시비리 칸국, 카자흐 칸국 등의 난립)들의 탄생은 곧, 이들 간에 중앙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경쟁으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여러 칸국들이 러시아로 병합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이는 러시아의 동진을 의미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까지 닿았고, 남으로는 카자흐 초원과 과거 실크로드 오아시스 도시들까지 그 영향권에 넣었다.
바야흐로 러시아가 청나라와 함께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대륙을 양분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번 호에는 본격적인 현대사를 살피기 전에 현대사 서술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카자흐 초원과 마 와라 알 나흐르 지역(현재의 우즈벡키스탄을 이루는 지역)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의 경우 우즈벡과 카자흐의 성립과 러시아 혁명기, 그리고 소비에트연방 시절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반면, 현대사 전개의 토대가 되었던 카자흐 초원과 우즈벡 지역의 변화에 대해서는 놓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이슬람교의 대중화
카자흐 초원에서 일어난 변화의 동인은 바로 ‘러시아’라고 하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었다.
킵차크칸국내 변방 세력이었던 러시아가 본가를 접수하면서 카자흐초원과 직접 맞닿게 되자 이 지역은 자연스럽게 러시아와의 관계가 깊어져 갔다.
이 과정은 곧 카자흐초원의 유목사회에 여러가지 변화를 불러 일어켰다.
과거에는 초원에서의 변화와 권력변동이 서쪽으로 영향을 끼쳤다면 이 시기부터는 서쪽의 변화로 인해 카자흐 초원이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슬람화의 진전이다. 독자들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는 카라한조 때인 10세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이때 도입된 이슬람교는 지배층 사이에서만 신봉되었고 기층민들까지 전파되지는 않았다.
기층의 유목민들은 옛부터 내려오던 전통데로 하늘(텡그리)을 최고신으로 섬기며 정령 숭배, 애니미즘, 샤머니즘이 융합된 형태인 텡그리 신앙을 믿고 있었다.
샤먼(무당)이 초자연적 존재와 소통하여 제의를 행하는 샤머니즘적 특징을 핵심으로 하되, 자연과 조상을 숭배하고 무속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이 텡그리니즘은 카자흐초원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유목민(흉노, 돌궐, 몽골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무속신앙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주목받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민간 신앙의 형태로 불교나 이슬람교 등과 융합되어 전승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이들과 같은 민족 계통인 타타르인들을 활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들은 일찌기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는데, 라시드 앗 딘의 집사 “부족지”에 따르면 타타르족이 워낙 강력해서 그 위세와 힘을 빌리기 위해 저마다 타타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한다.
이처럼 타타르라는 명칭은 본디 몽골계 한 부족의 이름이었으나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것이 명나라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거꾸로 몽골 혹은 퉁구스족을 가리키는 멸칭으로 그리고 서양에서는 몽골, 튀르크계 등 유목민족 전체를 일컫는 명칭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타타르로 불리는 일부 부족들은 자신들의 기존 부족이름을 버리고, 타타르를 부족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오늘날 타타르인들의 기원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유라시아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사에 등장하는 타타르인들은 이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부분의 타타르인이 수니파 이슬람을 믿으며, 투르크어족 킵차크어파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러시아 내 타타르인은 킵차크칸국의 중심지였던 볼가지역을 중심으로 한 ‘볼가 타타르인’, ‘아스트라한 타타르인, ‘시베리아 타타르인’의 세 집단으로 나뉜다.
이들이 세운 국가였던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 그리고 시비리 칸국이 러시아에 병합되면서 타타르인은 러시아의 동방진출, 중앙아시아 진출에 중용된다.
타타르인들은 러시아정부의 장려속에 중앙아시아 초원을 누비면서 교역활동을 하게 하자 이들을 통해서 이슬람이 기층의 유목민들에게 까지 전파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산 잡화를 제공하고 모피나 가축을 대량으로 사가는 교역 활동을 통해 부를 모으는 한편, 지방 곳곳에 모스크나 마드라사를 세웠다.
실로, 19세기 동안 많은 카자흐인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카자흐 지식 엘리트의 등장
두번째 변화는 카자흐 지식 엘리트들의 성장을 꼽을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바이 꾸난바예프, 발리하노프, 알튼사린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타타르인들을 통해 유목민들을 통치하는 기존의 방법에서 다소 정책변경을 시도했다. 타타르인 행정관이나 통역관의 수를 줄이고 카자흐 문어를 육성하고 카자흐인들의 문화적 자립을 고무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결과로써 19세기 후반에 카자흐 지식인 1세대가 탄생하고 이후 카자흐 민족주의자와 연결되는 조류가 탄생했다
아바이 쿠난바예프는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카자흐인을 계몽시킬려고 애썼다. 카자흐스탄의 경제수도 알마티의 시내에 있는 공화국 궁전 광장에는 아바이 동상이 자신의 이름을 딴 ‘아바이’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또한 2025년 작년에는 아바이 탄생 18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행사들이 펼쳐졌다. 카자흐스탄 전역과 해외에서 흉상 건립, 합동 콘서트, 9월 유네스코 본부 기념식 등 행사가 열린 것이다.
특히,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한-카 문화·경제 교류주간을 통해 대한민국 광복 80주년과 함께 기념 합동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실로, 카자흐스탄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시인, 현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카자흐스탄 정부 관계자는 «아바이의 작품들을 접하면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의 정신세계와 지적 유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발리하노프는 러시아식 교육을 받아 육군 특무장교가 되고 그 뒤 동양학 연구자로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그는 카자흐문화를 이슬람 문명의 영향에서 지켜내고 러시아와 서구 문명을 수용하여 카자흐를 문명화시키려 했다.
알튼사린은 카자흐 문어확립에 공헌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러시아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카자흐인의 자립과 발전을 실현하려 했고 러시아 통치가 선사한 카자흐 초원의 재통일이라는 조건을 활용하여 대, 중, 소 쥬즈로 나눠어서 부족에 대한 강한 귀속 의식으로 분열과 갈등을 종식시키고 카자흐의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민족통합을 이루려고 구상한 것이다.
카자흐초원에 등장한 러시아 농민
마지막 변화는 카자흐초원의 인구 구성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19세기 말(1890년)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초원에 들어와 살기시작하였다. 1860년 농노해방 후 수많은 농민들이 유럽쪽 러시아에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이 때 이주한 사람은 대략 650만명 정도였고 이들의 35% 정도가 카자흐 초원으로 이주했다고 추정된다. 다민족 국가인 카자흐스탄은 2차대전 전후 사회상황에 영향 받은 바 크지만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우즈벡 지역의 변화
마 나와 알 나흐르지역(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하는 지역) 지역은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코칸드 칸국으로 나뉘어져서 20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킵차크칸국에서 떨어져 나와 현재 우즈벡키스탄의 원형을 만들었던 우즈베크 유목집단이 세운 샤이바니조는 1599년에 멸망하고 징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의 후예인 잔조(아스트라한조라고도 한다) 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 왕조 역시 전대와 마찬가지로 부하라에 수도를 두고 통치했고 부하라 칸국으로 통칭되었다
히바칸국은 16세기 초 주치의 다섯째 아들 샤이반의 후예인 일바르스가 아무다리아 강 하류의 히바지방(호라즘)에 세운 왕조이다. 쿵그라트부족이 세운 히바칸국은 1920년 소련에 통합될 때까지 호라즘을 지배했다
또한 타쉬켄트와 페르가나 지방에서는 17세기 말기부터 우즈베크와 카자흐 집단의 갈등을 틈타 ‘호자’라고 불리는 실권자들이 사실상의 통치를 하였다.
이런 와중에 페르가나 지방을 중심으로 우즈베크집단의 한 지파인 밍부족이 ‘호자’ 세력을 타도하고 코칸드 칸국을 세웠다. 이들은 동쪽으로 청나라와 서쪽으로는 타쉬켄트를 통해 카자흐 초원이나 러시아와 교역을 하면서 발전했다.
이들 세 칸국을 세웠던 망기트, 쿵그라트, 밍 부족은 과거와는 달리 이미 칭기스칸의 혈통을 과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신 이슬람의 권위를 이용했다.
이들은 카자흐초원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짐에 따라 이슬람의 맹주인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과 우호관계를 체결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국내에 할거한 우즈베크, 투르크멘, 키르기스 유목민의 저항을 근절시키지 못했으며 세 칸국 사이의 갈등과 항쟁은 러시아군의 침공에 직면해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서울에는 2021년 아바이 동상이 세워져 양국 간 문화 교류의 상징이 됐다. 카진폼은 “서울에 세워진 아바이 동상은 양국 우호의 표징이자, 그의 사상이 동아시아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러시아 제국 시절 영내 각지의 타타르인들의 복식과 외양을 묘사한 그림.
사진 왼쪽부터 시베리아 타타르, 크림 타타르, 볼가 타타르 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