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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 고려문화원장 해마다 3월 초가 되면 카자흐스탄의 꽃가게들은 대목을 맞이한다.  ‘세계여성의 날(3월8일)’을 맞아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딸과 직장 동료들에게 선물할 꽃을 사기 위한 남성 손님들로 붐비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공휴일인 8일보다 하루 전날에 여성 동료들에게 꽃을 선물하고 부서마다 작은 파티를 열어 여성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가정에서는 남성들이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다. 20세기 초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불타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미국 노동자들이 궐기한 날에서 유래되어 1975년 UN이 3월 8일을 공식적으로 '여성의 날'로 지정했다. 구소련국가들에서는 이날을 공휴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는데 봄맞이 축제의 성격도 겸하면서 대대적으로 경축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처음으로 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시작되어 1945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조선총독부가 딱히 명분이 없어 탄압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일제로 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는 이 날이 공개적으로 기념되지 못했다. 역대 정권이 이 날을 사회주의 영향하에 탄생된 것으로 여겼고 또한 여성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들어 한국이 민주화되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행사를 치룰 수 있게 되었고 2018년에 비로소 '여성의 날'이 법정 기념일이 되었다. 한국사회가 여성의 인권과 권리에 대해 얼마나 둔감한 가부장적인 사회였는지를 반증해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녀평등이 실현되었고 특히나 한 자녀를 둔 가정의 증가로 인해 아들 딸 구분없이 모두 다 귀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의 일부 영역에서는 여전히 여성차별과 혐오가 있고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사노동에 대해 공적영역에서 전면적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전환이 아쉽다. 펠르랭과 김 알렉산드라 빼뜨로브나 2012년 프랑스에서 장관이 된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펠르랭. 한국 이름은 김종숙이며, 태어난지 3~4일만에 서울의 길거리에 버려졌다가 고아원에 들어갔고 생후 6개월때 프랑스로 입양되었다. 2012년 중소기업·디지털경제 담당장관으로 입각했다. 이후 통상국무장관을 거쳐 ‘문화대국 프랑스’의 문화 행정을 책임지는 문화부장관 등 3년 반 동안 3개 장관을 역임했다. 장관 퇴임 후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기사)장을 경제 부문에서 받았다. 한국에서는 그녀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신문과 방송은  "한국인이 프랑스 장관이 되었다!"고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그녀가 성장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자신을 외국으로 입양보낸 나라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그녀의 ‘화려한 성공’과 ‘위대한 한국인’에만 포커스를  맞췄다. 그러나 그녀는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프랑스인이고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 뿐'이라고 분명히 선을 긋었다. 사실, 펠르랭보다 먼저 외국에서 여성장관이 된 재외동포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한세기나 앞서서… 그녀의 이름은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그녀의 이름은  <소련 공산당 역사> 제2권에 10월혁명과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아르만드, 아르쮸히나 등의 여성 혁명가들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고,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 백과사전에도 사진과 함께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의 생애에 대해서는 <조선역사> 제2권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는 1885년에 니꼴쓰크 - 우수리스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금지된 마르크스작품을 탐독했다.  1914~1917년 수천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던 우랄의 사업장에서 통역으로 일했다. 그는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하였고,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탁월한 혁명가이자 국제주의자였으며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랬던 첫 한인 여성공산당원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공식 자료는 이게 거의 전부이다시피 하다.  김 마뜨웨이 찌모페이비치가 쓴 <원동에서 소비에트주권을 위한 투쟁에서의 조선인 국제주의자들 (1918~1922)>이란 책에 그녀에 대해 그나마 조금 기록되어 있지만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크즐오르다 사범대학 교원 우 블라지미르는 최대한 문헌자료, 친척들 그리고 혁명가와 함께 투쟁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회상기 등에 기초하여 그녀의 삶을 재현한 후 고려일보에 기고하였다. 김 알렉산드라는  1885년 2월 22일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교의 시넬니코보 한인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동중철도 건설장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국인과 조서인 철도건설 노동자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 노동자들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하는 《만인산》과 《왕정산》이라는 비단으로 만든 우산을 선물했다고 한다.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블라디보스톡의 오빠에게 온 16세의 김 알렉산드라는 독서에 탐닉하며 열정적으로 학창생활을 보냈다. 검은 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았던 그녀는 러시아의 진보적인 사상가였던 게르첸이나 체르느이쉐프스키 등의 사상서적들을 탐독하며 미래의 혁명가를 꿈꾸었다. 노동자의 통역가에서 대변자로 결혼과 출산, 자녀양육을 하며 블라디보스톡에서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아가던 김  알렉산드라는 러시아혁명 직전,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수천명 규모로 모집했던 우랄지방의 나제쥔스키 벌목장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된다. 체불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속에서 일하던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민족 차별까지 받았다.  알렉산드라는 유창한 러시아어와 해박한 지식으로 노동자들의 입이 돼 주었고, 그들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주면서 서서히 이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된다. 이를 기초로 그녀는  ‘우랄노동자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김알렉산드라는 그곳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최초의 한인여성 사회민주노동당원(볼셰비키)이 되었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여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라는 제1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대표자회의(1917년 9월)에 참가하는 등 곧바로 당 및 소비에트 혁명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12월 김알렉산드르는 크라스노쉐코프가 지휘하는 극동소비에트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초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 김알렉산드르는 3월에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이자 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등과 주축이 되어 한인사회당과 적위군을 조직했다.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자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불어에 능통했던 김알렉산드라는 그 혁명적 지도력을 인정받아 연해주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1차대전 포로문제와 관련한 혁명사업들, 조선인, 중국인, 헝가리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주의부대 편성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한편 1918년 8월말 극동지역의 내전상황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소비에트 볼셰비키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정권을 붕괴시킬려는 미,영,독,프 등 서구 열강과 함께 일본은 외국간섭군으로는 가장 대규모인 7만명의 육군을 연해주에 파견했다.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홍범도 부대 등의 항일독립군부대를 이 기회에 소탕하겠다는 목표를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1918년 8월 25일-28일기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개최된 제5차 극동지역 노동자대회에서 일시 전선을 포기하고, 한인 혁명지도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아무르주로 이동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1918년 9월 2일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일단의 한인혁명가들은 백위파 군대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죽음앞에서도 변치 않는 신념 김 알렉산드라 일행은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어 ‘죽음의 객차’에 감금되었다. 칼믜코프의 백위파군들에 의해 그녀는 엄청난 고문과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고 혁명열사로서의 기백을 보였다.   9월 14일 새벽 4시. 백위파 군인들은 ‘죽음의 객차’에서 눈을 가린 채 김 알렉산드라와 사회노동위원 티쉰, 하바로프스크시 재판소장 네페도프를 끌어냈다. 티쉰과 네페도프는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김 알렉산드라를 양쪽에서 부추기고 수많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총살당한 일명 ‘죽음의 골짜기’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다. 김알렉산드라는 눈을 가린 수건을 풀어 던지며 외쳤다. “(너희들은)  내가 여자이고 둘째로 내가 조선 여자이니까 끝까지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목숨을 바치며 지킬려는 신념은 로씨야에서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승리할 것이다." 총살 직전 마지막 소원을 묻는 질문에 “여덟 발자국만 걷게 해 다오” 라고 말했다. 집행관이 “왜 하필 여덟발자국이냐”라고 되묻자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스포츠 강국 카자흐스탄은 동계종목에서도 넓은 저변과 함께 뛰어난 선수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강국들 중 하나이다.  침불락이라는 천혜의 스키장은 설상 종목을  하기에 안성맞춤이고 알마티 인근의 악불락은 크로스컨트리와 바이애슬론 등의 경기를 하기에 역시 천혜를 조건을 갖추었다. 이외에도 알마티에만 해도 '발루얀샬락'과 '알마티 아레나', '할릭 아레나'등 국제규격을 갖춘 실내 빙상경기장들이 있고 수도 아스타나에서도 국제빙상경기장이 있어서 국제대회가 자주 개최되곤 한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감동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그 직전까지 극에 달했던 남북, 북미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적으로 평화모드로 바꾼 역사적인 대회로 기록됨과 동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올림픽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평창올림픽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른다. 고려인들은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정상회담 등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비핵화를 위한 일련의 회담과 조치들이 숨가쁘게 벌어지는 것을 희망찬 눈으로 지켜보면서 머지 않아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서울 찍고 평양 나들이를 할 수 있을 기대감에 벅차 있었다. 그래서 평창동계올림픽 경기들을 그 어느때 보다 열심히 지켜보았고, 최민정, 김아랑, 김예진, 심석희, 이유빈, 이승훈 등의 금메달을 목에 걸 때마다 마치 자신이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인 양 기뻐했고 대한민국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메달을 딸 수 있는지 의아해 하기 까지 했다.   우리나라가 동계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 덕분었다. 서양선수들보다 체격이 작아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쇼트트랙,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강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흔히, 선수들은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내린다'고 말한다. 평소의 실력 못지않게 대회 당일의 심리적 안정감과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만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시간과 노력, 재능, 투자 등 수많은 요소가 어우러져야지만 메달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경우 2010년 밴쿠버 올림픽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 등이 주인공들이었고 이들은 TV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국민들의 기억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겼다. 남조선 스뽀르트 선수 배기태 <사진설명 : 고려일보는 1988년 3월 8일자 4면에 '경기는 치열했다'는 제하의 기사로써  당시의 경기를 보도하고 있다.> 그럼, 이런 결실을 맺게 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는 70년대의 간판스타 이영하로 부터 시작되어 80년대 중반부터는 배기태라는 선수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배기태는 1988년 캘거리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1987년 월드컵 3차대회 500m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서 198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메데우 경기장에서 열린 세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소련은 적성국가로써 교류가 없었을 뿐더러 모스크바도 아니고 알마아따(현재의 알마티)에서 열리는 대회는 국민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바로 이 대회에서 배기태 선수가 500미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7년 알마티에서 열렸던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국의 빙상국가대표팀 감독은 “제가 배기태 선수에 이어 그 대회에서 동메달을 땄어요”라면서 “그때 우리 선수들은 소련에서 대회가 열린다고만 알고 비행기를 탔는데, 몇 번 갈아타기를 거듭해서 도착한 경기장이 바로 이 메데오 경기장이었습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직항노선으로 6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을 수십시간을 돌아서 왔었죠”고 당시를 회상해주었다.         한편, 고려일보는 1988년 3월 8일자 4면에 '경기는 치열했다'는 제하의 기사로써  당시의 경기를 보도하고 있다. “'세계기록소유자이며 남조선 쓰뽀르트선수인 배기태가 36.89초간에 이 거리를 돌파하여 첫자리에 나서 금메달을 쟁취하였다”          특히, 시상식에서 활짝 웃으며 팔을 벌리고 있는 배기태 선수의 사진과 함께 <500메뜨르경주에서 남조선 선수 배기태가 승리하였다>고 사진 설명을 붙여놓았다. 고려일보의 김훈 기자는 1988년 3월 5~6일  알마티의 메데오 경기장에서는 세계남자스피드스케이드선수권대회가 진행되었다면서 메데오 경기장에 선수와 진행요원, 관중 등 1만 2천명이 모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고려일보에 따르면, 경기장의 중앙관람석에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게.웨.꼴빈을 비롯한 당, 쏘베트, 직업동맹, 공청동맹 기관 책임일군들이 있었다. 경기개막식에서 선수권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알마티시집행위원회 위원장 세.까.누르까질로브 그리고 국제빙상스포츠연맹을 대표하여 이.뻬루크(이태리)가 축사를 하였다. 제82차 세계선수권대회 참가자들의 다수는 금년 동계올림픽에서 참가한 선수들이였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진행된 이틀간의 날씨는 아주 따뜻하였다. 때문에 경기장의 얼음판을 리상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경기장에서 여러 나라 국기들이 휘날렸고 수많은 외국손님들이 특별히 눈에 띄우게 만든 가지각색의 플랭카드, 맑고 푸른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봄 태양,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관중들의 함성 등은 경기장을 흥겨운 명절분위기로 휩싸게 하였다. 500메터 경주가 시작되었다.  제12번째로 출전한 세계기록소유자이며 남조선스포츠선수인 배기태가 3689초간에 이 거리를 돌파하여 첫자리에 나서 금메달을 쟁취하였다. 둘째 자리를 에. 플레임(미국), 셋째 자리를 띠 아오야나기(일본)이 차지하였다.   본사기자   김훈         배기태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차례나 500m 우승을 차지하고 1990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는 종합챔피언에 오르는 등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당시 대한민국 최초의 메달 획득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으나, 근소한 차이로 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그는 1990년,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후 은퇴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최수호 특파원 =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이 28일(현지시간) 안보, 에너지 등 분야에서의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하는 데 합의했다고 타스·스푸트니크 통신 등이 보도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이날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에서 열린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우리는 안보와 에너지, 무역, 투자 등과 같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많은 분야에서 오랜 기간 신뢰할만한 파트너십을 구축했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킬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의 독립과 영토 보전, 주권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이고 확고한 지원에 감사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또 미국이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5개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에도 환영 의사를 밝혔다.   이에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미국과 카자흐스탄의 관계는 굳건하며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며 "우리는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토카예프 대통령과의 회담에 이어 중앙아시아 5개국(C5) 외교장관들과도 만난 뒤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할 예정이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과 미국은 2015년부터 매년 'C5+1' 형식의 외교 회담을 열고 지역 경제와 환경, 안보 문제 등을 논의하고 있다.   서방 언론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2년 차에 접어든 시점에서 이뤄진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이번 카자흐스탄 방문은 러시아와 전통적인 우호 관계에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미국 등 서방 입장에 더 가깝게 끌어들이려는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옛 소련권 국가인 카자흐스탄의 경우 러시아와 경제·군사 등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가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에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 지난해 카자흐스탄은 친러시아 세력이 세운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또 헤르손주 등 우크라이나 4개 지역에 대해 러시아가 주장하는 합병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카자흐스탄은 러시아를 비판하는 유엔 결의안 채택을 위한 투표에서는 기권 또는 반대 입장을 보여왔다.   또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종식을 위해 정치적 해법을 촉구한 중국의 주장에 대해 서방과 달리 찬성 입장을 밝혔다.   한편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카자흐스탄 방문이 이뤄진 이 날 러시아도 맞대응 차원에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외교 정책의 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이번 방문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 간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냐는 질문에 "우리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양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우리만의 협력 플랫폼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비단길 합창단원들이 남자의 날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알마티=한인일보) 최재형 기자 =  알마티고려민족중앙회 산하 '장교클럽'(회장 : 서게르만)은 지난 23일 ‘남성의 날’을 맞아 알마티에 거주하는 고려인원로, 퇴역군인, 아프카니스탄 참전군인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면서 춤과 노래가 곁들여진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신유리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장, 신안드레이 알마티고려민족중앙회장, 황마이 소련공훈체육인, 강게오르기교수 등 동포사회 원로들과 퇴역군인이 참석했다.   ‘비단길’합창단의 노래, 김겐나지 공훈예술가의 기타 연주가 곁들어진 이날 행사는 ‘장교클럽’과 동포사회의 대표적인 합창단인 ’비단길’합창단이 주축이 되어 준비하였다.   일부 참가자들은 가슴에 훈장을 달고 나왔는가 하면 구소련시절의 군복을 입고 나온 참전노병도 있었다. 이들은 음악이 흘러나오자 왈츠를 추면서 청년장교시절 당시로 돌아가는 듯 했다.   ‘비단길’합창단원이면서 행사 사회를 본 김 스베틀라나씨는 “오늘은 남성들을 위한 날인데, 특히 참전노병들과 현역 군인들이야 말로 오늘의 주인공이다”고 말했다.   또 “‘남성의 날’은 구소련 군대의 전신인 ‘붉은 군대’가 만들어진 1922년 2월 23일을 기념하여 만들졌고, 곧 다가오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과 함께 구소련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큰 국경일 중의 하나이다.”고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한편, 카자흐스탄은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남성의 날’을 5월 7로 옮겨서 기념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직도 2월 23일을 ‘군인의 날’ 또는 ‘남성의 날’로 부르며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지면서 축하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구소련시절 군장성 또는 군 간부를 역임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장교클럽'이라는 단체가 있고, 매년 '남성의 날'을 기념해오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최수호 특파원 = 러시아 송유관 운영사인 트랜스네프트가 독일에 카자흐스탄산 원유를 공급하기 시작했다고 27일(현지시간) 타스·로이터 통신 등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트랜스네프트는 이날 오후 3시 폴란드를 경유하는 드루즈바 송유관을 통해 카자흐스탄산 원유 첫 공급분인 2만t을 독일로 보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운영하는 드루즈바 송유관은 벨라루스를 지나 폴란드, 독일,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등으로 이어지는 육상 수송로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카자흐스탄산 원유 1차분은 지난 1월 말 이 송유관을 통해 독일로 공급될 예정이었으나 지금까지 미뤄졌다.   카자흐스탄 측은 지연 이유에 대해 "기술적인 문제는 없으며 공급자와 구매자 간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제재 가운데 하나로 올해부터 송유관을 통한 러시아산 원유 수입도 중단하고 대체 물량 확보를 위해 카자흐스탄과 협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카자흐스탄 국영 송유관 회사인 카즈트랜스오일은 작년 12월 러시아 트랜스네프트에 올 한 해 드루즈바 송유관을 통해 원유 120만t을 보낼 수 있도록 신청했다.   독일은 해당 송유관으로 카자흐스탄산 원유를 수입하면 러시아산 원유 공급에 의존해온 슈베트 PCK 정유공장 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suho@yna.co.kr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원장 이혜란)은 오는 3월 2일(목) 봄학기 한식강좌를 개강한다. 이번 강좌는 5월 18일(목)까지 매주 목요일, 총 10회 진행된다(공휴일 및 원내 행사일 제외). 한식강좌는 회차당 15인 내로 진행되며, 인당 최대 3회까지 신청 가능하다.   3월 한 달간은 ‘밥’을 주제로 강좌가 진행된다. 해당 강좌에서는 계란밥, 간장계란밥 등 구하기 쉬운 재료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메뉴를 배울 수 있다. 또한, 불닭치즈주먹밥과 같이 SNS상에서 유행하는 최신 메뉴 역시 해당 강좌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다.   4월, 5월에는 면과 국물 요리를 주제로 총 6회의 강좌가 진행된다. 면을 주제로 하는 강좌에서는 지금은 평소에도 쉽게 맛볼 수 있지만, 이전에는 혼인이나 회갑 등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던 잔치국수를 배울 수 있다. 또한, 잔치국수에 어울리는 겉절이, 비빔국수에 어울리는 오이초무침 등 주메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반찬 레시피도 함께 배워 더욱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번 한식강좌는 실제 한국인들이 작성한 레시피를 바탕으로, 현지의 숙련된 요리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진행할 예정이다. 따라서 강좌를 듣는 이들은 개인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레시피를 전문 요리사와 함께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배울 수 있다. 한식의 기본적 이해부터 트렌드 파악까지   이번 봄학기 한식강좌는 단순한 수업을 넘어, 한식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번 강좌의 테마인 밥, 면, 국물은 모두 한식의 중요한 주재료 및 조리법으로, 수업을 통해 한식의 기본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반찬 문화는 외국인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는데 이는 주메뉴인 잔치국수에 겉절이를 반찬으로 곁들이는 방식을 통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또한, 한식의 기본 개념을 넘어 최신 트렌드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흔히 떠올리는 한식으로는 비빔밥, 김치, 불고기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전통음식으로서 해외에 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다. 한식에 대한 지속적인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음식을 알릴 필요가 있는데, SNS가 발달한 한국의 특성상,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메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번 강좌에서 다루는 간장비빔국수 등의 메뉴는 한식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는 동시에 한식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 이혜란 원장은 ‘이번 한식강좌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음식과 더불어, 실제 한국에서 유행하는 음식을 다루게 된다. 이번 강좌를 통해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한식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4, 5월 강좌 신청자 모집 공지는 문화원 홈페이지 및 SNS를 통해 게시될 예정이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홈페이지와 SNS를 방문해주시길 바란다. 일시 : 2023년 3월 2일 - 5월 18일(매주 목요일, 공휴일 및 원내 행사일 제외) 참여대상 : 2023 봄학기 한식강좌 신청자

  (서울=월드코리안신문) 이석호 기자  = 외교부 산하에 재외동포청을 신설하고, 국가보훈처를 장관급인 국가보훈부 로 격상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2월 27일 오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해 10월 행정안전부가 정부에 제출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에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지만, 여야가 합의를 보지 못해 여성가족부는 그대로 존치된다.   732만 재외동포를 지원하고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재외동포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신설하는 재외동포청은 외교부의 재외동포 정책기능과 재외동포재단의 사업기능을 이관받는다. 재외동포청은 영사, 법무, 병무 업무도 함께 처리하고 재외동포·단체 교류 협력, 네트워크 활성화, 차세대 동포교육, 문화홍보 관련 사업도 하게 된다. 재외동포청 청장은 차관급이다.   앞서 지난 2월 14일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원내대표, 원내수석부대표, 정책위원장으로 구성된 ‘3+3 정책협의체’는 행안부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해 논의하고 국가보훈부, 재외동포청에 대해서 이견 없이 처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 2월 2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이 개정안이 의결되고 27일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지난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9개월 만에, 행정안전부가 국회에 제출한 지 4개월 만에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은 것이다. 재외동포청 신설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 연 재외동포 초청 행사와 해외 동포간담회에서도 재외동포청 신설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번에 통과한 정부조직법은 공포 후 3개월이 지난 날부터 시행된다. 이에 따라 오는 6월쯤 재외동포청과 국가보훈부가 출범할 것으로 보인다.

이동순 시인 ‘민족의 장군 홍범도’ 순국 80주기 맞아 일대기 출간   대한독립군과 일본군의 결전이 코앞으로 다가온 1920년 10월 어느 날 백두산 부근 산악지대 청산리 근처. 대한독립군을 포함한 연합부대가 모여 긴급 작전회의를 연다. 이전까지는 방어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던 상황. 부대 지휘를 총괄했던 홍범도 장군(1868∼1943)은 “청산리 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이용해 적의 선두부대를 기습 공격하자”고 제안한다. 결국 그의 주장이 채택됐고,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다.   홍 장군 순국 80주기를 맞아 이동순 시인(73)이 1일 출간하는 ‘민족의 장군 홍범도’(한길사)의 한 대목이다. 1982년부터 홍 장군과 관련된 사료를 모아 온 이 시인은 28일 기자간담회에서 “41년 만에 마침내 홍 장군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은 이 책을 그의 묘소에 바칠 수 있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840쪽에 이르는 이 책은 홍 장군의 출생부터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에서 눈을 감기까지의 일생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일대기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 시인은 할아버지인 독립지사 이명균 선생(1863∼1923)의 삶을 전해 들으며 “언젠가 조부처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삶을 문학으로 엮어보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목한 인물이 바로 홍 장군. 이 시인은 “홍 장군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남긴 족적을 제대로 조명하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다”고 했다.   이 시인은 ‘홍범도 일지’(홍 장군이 카자흐스탄에 살아 있을 때 고려극장 소속 극작가가 기록한 구술 채록집)에 드러난 홍 장군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2003년 민족서사시 ‘홍범도’ 1∼10권을 펴내기도 했다. 이후 20년 만에 산문으로 홍 장군의 생애를 다시 써내려간 이유에 대해 “단순 사실의 조합은 생애를 평면화하기 쉽다. 홍 장군의 생애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입체화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이어 “홍 장군에 대한 새로운 사료들이 추가로 밝혀진다면 얼마든지 새롭게 써내려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연해주에 살던 홍 장군은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에 안치돼 있던 홍 장군의 유해는 순국 78주년인 2021년 광복절 고국으로 돌아와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돼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1937년 스탈린 강제 이주 당시 기근 속에서도 환대 고려인들은 크질오르다 개간하며 ‘번영과 풍요 일궈 김유리 헌법위원회위원장 등 정‧관‧재계에서 맹활약 지난  27일, 카자흐스탄국립도서관에서 열린 고려일보 100주년 기념전시 개막식 <카자흐인들은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에게 빵을 건네며 포용했다. 그 덕분에 고려인들은 낯선땅에서도 잘 정착할 수 있었고 고려일보, 고려극장, 고려말  라디오  등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2023.2.27 almatykim67@yna.co.kr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정착한 이 땅에서 더욱 큰 감회로 104주년 삼일절을 맞고 있다. 2023년 3월 1일은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한 3.1봉기 104주년이 되는 날이다. (‘3.1운동’에는 이 역사적 사건을 다 담아낼 수 없어서 ‘3.1봉기’라고 표현한다)   104년 전 이날 우리 겨레는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극악무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조선의 자주독립을 외쳤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이후 3개월간 전국 방방곡곡에서 진행된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7000여 명이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려일보는 당시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되고 있었는데, 조선의 218개군 중에서 211개 군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약 200만 명이 참가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일보에 따르면, 석달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든 독립의 함성은 일제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잔학하게 진압되어 조선 땅은 애국지사들의 피로 물들었다. 8000명이 피살되었으며 약 1만6000명이 부상을 당했고 5만2000명이 감옥에 갇혔다.   조선에서 일어난 3.1봉기의 메아리는 10만여 명의 동포들이 살고 있는 두만강 건너 연해주에서 울려 퍼졌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니꼴스크-우수리스크, 스빠스크를 비롯해서 동포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3.1봉기에 동조하는 시위행진과 군중집회가 진행됐다. 여기에는 연해주 동포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인, 중국인 그리고 기타 소수민족 대표자들도 적극 참여했다.   일례로 1919년 3월 18일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일제식민주의자들을 반대하고 조선독립을 외치는 대중적 시위운동이 진행되었고 '독립선언서'가 일본영사관구내에 뿌려졌다. 이를 목격한 러시아인 야로멘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은 태극기와 붉은기로 장식되었다. 조선인의 시위는 신한촌에서 시작하여 시내 중심으로 행했다. 자동차를 탄 사람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조선독립선언서’를 뿌렸다. 시위 운동 참가자들의 압도적 다수가 조선의 청년들이었지만 러시아인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조선 대표단은 러시아어, 영어, 조선어와 중국어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외국 영사관에 뿌렸고 왜놈들은 '독립선언서'가 눈에 띄면 그것을 뜯어 찢어버렸다.”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간도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대중적 시위와 군중집회가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10월 혁명(1917년)과 이어진 내전으로 인해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조선의 땅과 자주독립을 빼앗아갔으며 조선의 우수한 아들들을 사형시키거나 감옥에 가둔 일본강도들과 벌써 15년동안 싸우고 있다” 고 실상을 전하면서 “조선의 항일독립군이 소련의 붉은 군대와 함께 행동할 때 왜놈들을 블라디보스톡과 조선에서 쫒아낼 수 있다”고 단합을 호소하였다.   이때 연해주에 살고있는 동포들은 이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기 구매를 위한 자금을 모으고 있었고, 국경 부근지역에서는 일제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준 조선인 빠르티잔 부대들이 조직되었다. 항일 빠르티잔부대들은 일본수비대를 공격하여 무기를 노획했고, 철도 교통 연락을 마비시켜 일제의 군부대가 3.1봉기를 진압하는데 출동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3.1봉기 1주년에 즈음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진행되었고 당시 출판물에는 “3월 1일은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국경일이다”라고까지 했다. 1920년 3월 1일 하바롭스크, 니꼴스크-우수리스크 및 기타 동포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조선독립을 위한 시위가 있었고, 동포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도 함께 참가했다.   언론도 호응했다. ‘쁘라브다’, ‘이즈베스찌야’, ‘에호’ 및 당시 연해주에서 발행되던 동포신문들인 ‘로농신보’, ‘경종’, ‘로동자’ 등의 신문들이 자유와 독립을 위한 조선인들의 투쟁에 관해 기사를 쏟아냈다. 1926년 3월 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군중 집회에서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1919년 3월 1일에 휘날린 조선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기치를 승리의 날까지 들고 나가리라 굳게 확신한다”는 연설이 나왔다.   요컨대, 3.1봉기는 자주독립을 향한 온 겨레의 뜨거운 피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하게 만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래서 삼일절은 우리만의 민족 기념일이 아니라 재외동포가 사는 이웃 나라들에서도 그 나라 주민들과 함께 경축하는 국제적인 명절이 되었다. 카자흐에서는 ‘감사의 날’   카자흐스탄 대통령 직속 기구인 ‘민족회의’는 2016년, 국가전략문제연구소에서 회의를 갖고 3월 1일을 ‘감사의 날’로 지정했다. 민족회의 소속 위원들과 카자흐스탄 내 소수민족 대표들뿐만 아니라 의장인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130여 민족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국경일로 지정한다”고 결의한 것이다.   이날이 이 땅에 사는 우리들(고려인)에게는 삼일절과 함께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국경일로 다가오는 이유는 193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거의 1만km에 이르는 거리를 강제 이주당한 우리(고려인)에게 빵을 건넨 이들이 바로 이 땅에 살던 카자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 카자흐초원에 몰아친 가뭄과 기근으로 인해 자신들이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실려 온 우리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의 부모들은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시리다리야 강물을 끌어들여 반사막 기후인 카자흐 땅을 황금빛 벼 이삭이 넘실대는 옥토로 바꾸어 놓는 것으로 화답했다. 고려인 꼴호즈들은 수많은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탄생시키면서 국가의 계획생산량을 초과 달성했다. 흐루시초프 당서기장 시절, 서방의 대표단에게 단골로 보여주었던 농장이 바로 고려인들의 피땀으로 만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던 선봉(아방가르드) 꼴호즈였다.   이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이 독립된 후 신생국 카자흐스탄의 국가기반을 닦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다시 한번 화답했다. 김유리 헌법위원회위원장은 카자흐스탄의 헌법의 기초를 닦았고, 김 블라지미르 카작므스회장은 적자에 시달리던 구리 콤비나트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들었고 런던 증권시장에 상장까지 시켰다.   채유리 카스피언 그룹회장(전 상원의원)은 한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했고, 김 베체슬라브 카스피은행 회장은 카자흐스탄의 금융산업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일조했다. 김 에두아르드 테크노 돔 회장과 남 올렉 쿠아트건설 회장은 카자흐스탄의 가전유통업과 건설업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이외에도 카자흐스탄의 문화예술 분야의 발전과 과학, 의학분야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모국과의 관계를 통해 카자흐스탄 공연문화의 수준을 높이고 한류 확산의 선봉장이 된 고려극장과 코로나19 유행 시기에 보건부 장관으로 활약한 최 알렉세이를 꼽을 수 있다.   포브스지가 발표하는 카자흐스탄의 상위 50위 부자명단에 8명의 고려인들이 포함되는 사실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1937년 강제 이주의 굶주림에 지친 우리에게 빵을 건네던 카자흐인들의 그 따뜻한 마음은 오늘날 평화와 화합의 민족정책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인들의 성공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삼일절이면서 ‘감사의 날’로써 한국과 카자흐스탄에서 동시에 국경일이 되는 3월 1일, 올해는 선조들의 항일 독립정신과 함께 고려인들을 품어준 카자흐초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그 어느 해보다 진하게 가지는 해가 될 것 같다.

고려극장에서 열린 제104주년 삼일절 기념행사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26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에서 열린 제104주년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고려극장 배우들이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겨레의 염원을 담은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2023.2.26 almatykim67@yna.co.kr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제104주년 삼일절을 앞두고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회장 신유리)와 독립유공자후손회(회장 박 타티아나)가 코로나19 여파로 중단했던 기념행사를 4년 만에 다시 열었다.   카자흐스탄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에서 26일(현지시간) 열린 기념행사는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기억을 담은 특별영상 시청과 어린이 독립유공자후손들의 독립선언서 낭독,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겨레의 염원을 담은 고려극장의 공연, 어린이 가무단 '남성'이 준비한 '내 나라' 공연에 이어 독립운동가 김학만의 후손 김 빅토르 선생의 선창에 따른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고려극장이 유관순 열사와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 독립운동가의 대화 형식을 빌어 3.1운동의 의미와 실상을 부각시키는 공연을 선보이자 객석의 일부 관객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박타티아나 독립유공자후손회장(자손재단 이사장)은 기념사에서 "고려인협회와 고려극장의 적극적인 참여와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으로 인해 행사가 잘 진행됐다"면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조들의 활동을 후대들과 함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고 말했다. 신유리 고려인협회장은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은 4년 뒤 3월 1일에 '삼월일일'이라는 이름의 신문을 탄생시켰다"면서 "연해주에서 창간된 이 신문의 창간호에는 기미독립선언서 전문이 실렸고 이후 고려인들의 고난과 영광의 역사를 100년 동안 기록한 고려일보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어, 주알마티총영사관 박내천 총영사는 "카자흐스탄은 해외 어느 곳보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생을 마치셨고 또 후손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특별한 곳"이라며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예우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위한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에는 독립운동가인 최재형, 이동휘, 계봉우, 민긍호, 김경천, 오성묵, 황경섭,황운정, 최계립 등의 후손 550명이 살고 있다. almatykim6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