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토), 알마티 시내 바이세이토바 꾸르만가지 거리 교차로에서 거행된 데니스 텐 추모비 제막식에서 아르만 쿠륵바예프 알마티시 부시장이 동상을 제막하고 있다. 김상욱 > 카자흐스탄을 넘어 세계적 피겨스케이트 선수이자 항일 독립운동가 민긍호 선생의 외고손자였던  데니스 텐의 추모비가 22일(토), 알마티 시내에 세워졌다.  이날 오전에 열린 제막식에는 고인의 부모님, 카자흐스탄의 역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일리야 일린을 비롯한 올림픽메달리스트들과 카자흐스탄의 문화체육부, 고려인협회 관계자,  ‘데니스 텐’ 재단 관계자와 일반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데니스 동상은 러시아 조각가 마트베이 마꾸쉬낀이 제작한 것으로 2.4 미터 높이로 고인이 동메달을 딴 소치 올림픽에서 펼친 마지막 동작을 형상화 한 것이다.  아르만 쿠륵바예프 알마티시 부시장은 “우리는 데니스가 이룬 승리의 기쁨을 카자흐스탄의 젊은 세대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게 해야 한다”면서 “오는 10월 알마티에서 아사다 마오 등 세계적 피겨 선수들이 참가하는 세계피겨선수권대회를 개최하여 고인의 업적을 기릴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고인의 어머니인 악사나씨와 함께 데니스선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 만 16세의 최연소 선수로 참가한 데니스 텐은 2013년 세계선수권 은메달, 2014년 소치 올림픽 동메달, 2015년 4대륙 선수권 금메달, 2017년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금메달을 따내며 카자흐스탄에서는 스포츠계를 넘어선 국민적 영웅이 됨으로써 고려인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고인은 작년 7월 19일, 알마티 시내에서 차량 백미러를 훔칠려는 절도범들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25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김상욱 )

카프카스 3개국 중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여행하였다.  이번 여행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의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글은 단순여행정보를 나열한 글은 아니고 필자가 보고 느낀 감상을 적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다.  틈틈이 정리해서 시리즈로 연재할 예정이다. 아라라트 꼬냑의 나라, 아르메니아 <가르니신전> 아르메니아는 카프카스산맥에 있는 여러 국가들 중에서도 남카프카스에 있는 작은 국가이다. 남쪽으로 터어키와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북쪽과 동쪽으론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쟌을 이웃국가로 두고 있다.  우리에게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있다면 아르메니아인들에겐 아라라트산이 있다. 비록 터어키 땅에 속해 있어서 쉽게 갈 수는 없지만 수도 예레반의 어느 곳에서도 눈덮힌 아라라트 산을 볼 수 있다. 국토면적은  경상도 만하고 인구는 3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가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역사적 부침을 경험했지만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해온 것처럼 아르메니아인들도 자신들의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면서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영국의 수상 처어칠이 즐겨마셨다는 아라라트 코냑의 고향이고 이웃나라 조지아와 함께 카프카스 음식의 본향임을 자부하는 이들이 사는 땅, 아르메니아를 다녀왔다.  기원전 782년에 시작된 도시, 예레반 <예레반 시내에 있는 카스카드 조각공원> 수도 예레반은 '잘 보인다' 또는 '전망이 좋다'라는 뜻을 가진 아르메니아의 수도이다. 방사형 도시인 예레반에서 제일 먼저 볼 것은 단연코 카스카드 조각공원에 올라서 아라라트 산을 조망해 보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같은 위상을 지니는 산이 바로 아라라트 산이다.  노아의 방주가 걸린 곳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아라라트 산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현재의 도시 모습은 1920년에 계획된 것이고 주요건물들은 1930년대에 건축되었다. 10개의 역을 갖춘 지하철이 운행되는 예레반에는 150만명이 살고 있다.  ‘장미의 수도’라는 또다른 이름 가진 도시 답게 깨끗하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정이 넘친다. 예레반 시내투어는 걸어다니면서 할 수 있는데, 노천카페에서 여유있게 식사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만약 그들과 눈길이 부딪혔다면 피하지 말고 살짝 웃어주자. 그러면 그들은 길을 가는 여행자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면서 와인이나 아라라트 꼬냑을 한잔 따라 줄 것이다.  나도 이번 여행에서 이런 경험을 하였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점심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서기를 5분쯤 경과할 무렵, 노천카페에서 식사를 하던 현지인들이 천천히 길을 걸어가든 우리 일행에게 질문공세가 이어졌고 우리가 한국에서 왔음을 알고는 그때부터 꼬냑과 와인을 연거푸 권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나는 대낮에 코냑 2잔을 연거푸 마시게 되었고 동료들은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면서 결국 예초에 예정된 식당이 아니라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나는 좌장인 듯한 분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이다면서 대낮부터 노천카페에서 술 파티를 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 좌장인 듯한 분은 자신이 아르메니아국립 오페라하우스의 총감독이라고 먼저 소개한 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와인은 생활음료이라면서 여행중에 이런 풍경을 자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해줬다.  아르메니아 음식과 고기 굽는 방법에 대한 얘기며 남북한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며 복숭아 수제 보드카와 석류와인도 맛보다 보니까 마치 오래된 친구와 함께 하는 식사자리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가까워져 버렸다. 나와 계속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그들을 뿌리치고(?) 난 일행들이 식사를 하는 옆테이블로 돌아왔지만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미소를 띤 얼굴로 와인 한잔을 권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아르메니아인들이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예레반 시내 노천 카페에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만남이 있다>

팔도의 대표적인 용기면인 '도시락'이 러시아 진출 이후 50억개가 넘게 팔리면서 러시아 '국민 라면'으로 등극했다. 11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도시락 누적 판매량은 1991년 러시아 진출 이후 지난해까지 50억3천만개를 돌파했다. 수출 초기 러시아 선원과 보따리상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인기를 끌던 팔도 도시락은 1997년 현지 사무소 개소와 함께 러시아 전역으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가

체불임금으로 고통을 당하던 광주정착 고려인동포가 고려인마을법률지원단(단장 강행옥)의 도움으로 돈을 받게 돼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됐다. 다름 아닌 우즈벡 출신 고려인동포 3세인 유가이 이고르(43세) 씨다. 그는 용역회사를 통해 파견직 근로자로 일하던 중 지난 3월 4개월 임금과 퇴직금을 받지 못해 생계가 어려워지자 고려인마을을 찾았다. 이고르 씨는 자신의 아픈 사연을 고려인마을을

“새로운 유럽파 한정우, 카자흐스탄을 징검다리 삼아더 큰 무대에서 활약하고파”  최근들어  어느 스포츠 종목보다 축구가 우리 생활에게 큰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한번쯤 뛰고 싶어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유럽챔피언스리그에 우리의 손흥민선수가 큰 활약을 펼친데 이어, 오늘 새벽엔 정정용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이  2019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카자흐스탄에 사는 다양한 민족들    대표적인 다민족국가인 카자흐스탄에는 카자흐인들외에도 고려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을 포함한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통상, 카자흐스탄에는 100여 민족이 살고 있다고 말하는데, 잉구쉬, 크림타타르, 체첸, 오세티야, 둥간, 위구르, 아프카니스탄, 우즈베크, 투르크멘, 유대인, 터어키, 쿠르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쟌, 카자끼,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민족이 카자흐초원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무슨 이유로 이 땅에 왔을까?  이런 질문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카자흐스탄사람이라고 뭉둥거려서 일컫는 이들 중에는 옛부터 갈등의 역사를 가진 민족들이 있을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전혀 다른 민족의 기원과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   사실, 우리와 얼굴 모양이 흡사하다고 해서 카자흐인들과 고려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서양인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조금은 서운해 할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민족을 아직도 모르는 세계인이 있냐고……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다면 우리는 카자흐스탄과 고려인에 대해서도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민족에 대한 관심은 결코 미세한 차이를 극대화 시켜 소수민족별로 갈라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각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더 잘 이해함으로써 세계시민으로서 또는 카자흐스탄 국민으로서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함임을 분명히 해 둔다.     고려인에 대한 아픈 역사를 안다면 고려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우리도 기타 소수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잘 앎으로써 이들을 더 잘 이해해 보도록 하자. 그리고 형제가 되자.   본지에서는 이러한 취지로 이 땅에는 어떤 민족들이 살고 있나? 시리즈를 기획하였다. <편집자 주> 5. 위구르 <위구르민족문화중앙 간부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알리는 홍보부스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양고기 샤슬릭’, ‘쁠롭’, ‘베스빠르막’ 등과 함께 가장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라흐만’이다.  라흐만은 이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어디서든지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면요리인데, 필자는 아직 이 음식을 맛을 보지 못한 분들에게 때 ‘고기와 야채를 볶아 간짜장처럼 면위에 얹어주는 음식. 쉽게 말해 해물이 없는 볶음 짬뽕’ 이라고 설명한다.  ‘구이류 라흐만’이나 ‘수이류 라흐만’ 등은 그 맛이 정말 일품인데, 한국인이면 누구나 금방 친해지는 대표적인 중앙아시아 음식 중 하나이다.  이 요리는 알마티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시골에서도 ‘라흐만하나’라고 써져 있는 식당에 들어가면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이 요리를 즐길 수가 있다.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인 알마티의 경우 알마스 구역에 가면 갓 구운 ‘고기 삼싸’(고기가 들어가 있는 구운 만두 같다고 비유할 수 있는 현지 음식)와 함께 맛있는 라흐만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알마스구역은 알마티도심을 기준으로 볼 때 서쪽에 위치한 지역인데, 서울시에 비유하자면 영등포구나 양천구쯤에 해당되는 곳이다.  특히 이 지역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직선으로 쭉 뻗은 ‘야사위’거리에는 ‘라흐만’ 을 파는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길가에 화덕(탄드라뻬치)을 만들어 놓고 직접 빵을 구워서 팔기도 하고 ‘라흐만하나’라고 간판을 단 면요리집들도 많이 있다. 이런 집들에 들어가면 메뉴판은 구이르 라흐만, 수이르 라흐만, 다마쉬니예 라흐만, 쪼면….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이름의 라흐만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걷거나 골목을 따라 한블럭 안쪽으로 들어가보면 이곳이 알마티가 아니라 위구르인자치구의 어디쯤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 곳 외에도 알마티시내에는 라흐만 식당들이 곳곳에 있다. 근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라흐만을 파는 대부분의 식당들은 주류를 일체 팔지 않는다는 점이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주류를 팔지 않고 음식만을 판다는 것은 매상을 높이고자 하는 식당주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식당을 이용하는 손님의 입장에서도 고기와 야채를 볶은 라흐만을 먹을 때 시원한 맥주 한잔을 곁들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시내 일부 식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라흐만하나’에서는 주류를 판매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식당들의 주인이 이슬람교를 믿기 때문이다.  필자가 글의 서두에서부터 음식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음식의 원조 민족을 소개하기 위함인데, 바로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 민족이다.  <위구르인들의 대표음식인 구이르 라흐만> 위구르인들은 누구?   위구르인들은 카자흐스탄의 남동부 지역과 중국 신장지역에 걸쳐 살고 있는 투르크계 민족이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 터키의 기원이 되는 돌궐(투르크)부족이 속해 있는 몽골고원의 유목집단이었던 철륵의 일원이었다. 약 6세기경에 떨어져 나왔으나 돌궐부족이 돌궐제국으로 성장하면서 그 휘하에 복속되었다가 당의 보호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돌궐이 동서돌궐로 분열되고 내분에 빠지자 주변 부족과 연합해 동돌궐을 무너트리고, 741년 위구르 제국을 건국한다.  위구르는 자신들의 말과 중국의 비단을 거래하는 이른바 견마무역을 통해 이득을 얻었는데 원래 말과 비단의 환율은 1대1이었으나 위구르는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이 환율을 1대40, 1대50 등으로 멋대로 올려버리면서 당나라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위구르는 북방에서 일어난  키르기즈에 의해 840년 멸망했다. 그러나 키르기스도 위구르 제국을 대체할만한 제국을 세우지는 못했고 많은 위구르 유민들은 원 거주지인 몽골 고원 지방에서 현 거주지인 동투르키스탄으로 이주하여 천산 위구르를 세웠으며 타림 분지 현지에 거주하는 인도유럽어 계통 백인들과 혼혈하여 지금의 위구르인을 형성하였다.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인과 투르크메니스탄인들이 이들과 외모가 매우 비슷하다. 위구르인들은 징기스칸이 대몽골제국을 건설할 때 큰 기여를 한 집단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어 있다. 원래 유목제국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불안정한 유목경제를 보완할 경제적 토대를 확보해야만 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만리장성 이남에 대한 약탈 혹은 교역을 통해서거나 아니면 실크로드를 장악함으로써 동서 교역을 통해 경제력을 신장시킬 때만이 가능하다.  대몽골제국 건설과정에도 이 원칙이 적용되어 지는데, 징기스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실크로드를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되고 이에 적극 호응한 이들이 바로 위구르 집단이었다. 위구르 문자를 이미 가지고 있던 이들은 몽골어까지 능통했기 때문에 대몽골제국의 테크노크라트로서 지배계층의 한 축으로 역할했다.  이들과 우리역사와의 관계를 따져 보면, 위구르인들은 당시 고려에 시집 온 몽골 공주나 지배관리였던 다루가치들을 따라 온 사람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