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오피니언칼럼, 기고카자흐스탄의 별이 된 데니스 텐

카자흐스탄의 별이 된 데니스 텐

카자흐스탄의 별이 된 데니스 텐

지난해 7월 19일,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요절한 카자흐스탄의 피겨 영웅 데니스 텐 선수를 기억하는가? 그가 사망한 사고 현장에 오늘 추모비가 세워졌다.

카자흐스탄을 넘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던 피겨스케이터이자 항일 독립운동가 민긍호 선생의 외고손자였던 그의 조국 사랑은 유난했다. 나고 자란 카자흐스탄은 물론, 할아버지의 땅이자 자신의 뿌리인 대한민국을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다.

피겨스케이팅 커뮤니티에서는 그를 불모지에 피어난 꽃이라 부른다. 대부분의 피겨스케이팅 꿈나무들이 실내경기장이나 피겨스케이팅 전용 빙상장에서 연습할 때, 데니스는 한겨울에 주차장에 물을 뿌려 얼린 얼음 위에서 겹겹이 옷을 껴입고 스케이트를 탔다. 그가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했던 90년대 말, 카자흐스탄에는 아직 실내빙상장이 없었던 탓이다. 그나마 몇 년 후 쇼핑몰에 위치한 작은 아이스링크에서 연습하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주중에 쇼핑몰 아이스링크를 사용하는 대가로, 주말에는 쇼핑몰 손님들을 위해 공연을 해야 했으며, 러시아로 유학 가기 이전에는 제대로 된 스케이트화조차도 없었다.

러시아에서의 유학 생활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돈이 없어 어머니와 단칸방에서 지냈으며 대회 참가 때마다 경비를 아끼려고 비행기 대신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코치는 러시아 아이들 위주로 레슨을 진행하며 데니스의 뛰어난 재능을 시기하고 견제했다. 러시아 유망주를 긴장시킨다는 이유로 데니스에게만 고난도 점프를 가르쳐 주지 않았고 혼자서 연습하는 것마저도 막았다. 역경을 극복하고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시상대에 오른 그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낮은 점수를 받고 등수에서 밀리는 일도 허다했다.

하지만 데니스는 좌절 대신 극복을 택했다. 남들보다 몇 배 더 열심히 했고 포기하고 싶을 때는 자신이 얼마나 스케이팅을 사랑하는지만 생각했다.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와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조국 카자흐스탄에 올림픽 출전 티켓 2장을 안기며 만 16살의 나이로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다. 최연소 선수로 출전하여 남자 싱글 부문에서 30명의 선수 중 당당히 11위를 차지한 데니스. 당시 결선에 진출한 한국 남자 피겨 선수는 없었지만, 그가 경기 직전 방송되는 선수 소개 멘트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긍호 장군의 후손으로 카자흐스탄 출신 한국계 선수’로 본인을 소개한 덕분에 경기장 내는 물론 수억 명의 시청자들이 지켜보던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통해 ‘민긍호’와 ‘코리아’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

노련한 선수들 사이에서 어린 나이와 경험 부족 탓에 메달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이때 데니스의 재능과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본 이가 있었다.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에반 라이사첵 선수의 코치였던 프랭크 캐럴의 제안으로 데니스는 피겨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훈련지를 옮긴 데니스는 캐럴 코치와 함께 2013년 세계선수권 종합 2위, 2014년 소치 올림픽 동메달, 2015년 4대륙 선수권 우승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성과를 일구며 전성기를 맞게 된다.

데니스가 2014년 러시아 소치 올림픽에서 획득한 동메달은 11개 종목에 52명의 선수를 출전시킨 카자흐스탄의 유일한 메달이자, 카자흐스탄 동계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피겨스케이팅 부문 올림픽 메달이었다. 이를 계기로 데니스는 세계적 스케이터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고 카자흐스탄에서는 스포츠계를 넘어선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데니스는 고질적인 부상과 음악에 대한 미련 때문에 오래전부터 소치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인 카자흐스탄의 미래와 후배 양성을 위해 고민 끝에 은퇴를 미루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4년 후 올림픽이 할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 그것도 민긍호 장군이 전사한 원주와 가까운 평창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2014년 말부터는 2022 알마티 올림픽 유치 홍보대사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며 유창한 영어 실력과 능변으로 카자흐스탄을 홍보하는가 하면, 주요 국가 행사 때마다 미국에서의 훈련을 중단하고 카자흐스탄으로 날아오는 책임감을 보였다. 피겨스케이팅 강국인 일본, 미국, 캐나다 등의 경쟁 선수들에게는 오로지 훈련과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데니스는 누적된 부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쉴 틈조차 없었다. 어릴 적부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성하지 않은 몸으로 훈련과 대회 참가를 반복한 탓에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데니스 사후에 캐럴 코치가 회고하기를, 2016년 즈음부터는 빙상에서 훈련한 다음 날엔 며칠 동안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고, 다시 훈련하고, 목발 신세 지기를 반복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하였다고 한다.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사랑과 정신력으로 고통을 인내하던 데니스에게 커다란 불운이 닥친다. 평창 올림픽을 고작 반년여 앞둔 2017년 중순, 한국에서 열리는 아이스 쇼 준비를 위해 점프 연습을 하던 중 오른 발목 인대 4개 중 2개가 파열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 것이다. 데니스를 진료한 의사들이 하나같이 1년 이내에 스케이팅 재개가 불가하다고 진단하였으며,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고관절 부상까지 진단받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2017년 말부터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한다. 올림픽 참가자격을 얻으려면 해당 시즌에 열리는 국제빙상연맹 공인대회에서 포인트를 얻어 일정 순위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데니스는 각고의 노력으로 시즌 순위 10위로 평창에 오게 된다.

불운의 연속이었다. 쇼트 프로그램 경기 전날부터 장염과 감기로 당일 컨디션마저 좋지 않았던 데니스. 사실 그는 모든 악재를 감수하며 좋지 않은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평창 올림픽 참가를 강행했다. 이번에는 메달권에 들기 힘들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나라, 할아버지가 순국하신 원주 근처에서 열리는, 꿈에도 그리던 평창 올림픽에 도저히 불참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선수 경력 처음으로 프리 프로그램 진출이 좌절되었다. 경기 직후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말하며 애써 희미하게 웃었지만, 슬픈 미소에서 데니스의 회한을 읽을 수 있었다. 소치 올림픽 이후 그는 어딜 가나 누구와 인터뷰를 하든 ‘나의 꿈은 평창 올림픽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는 것’이라고 했었다. ‘할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손자가 되고 싶고, 한국의 친지들과 팬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고 했었다.

평창 올림픽 이후 잠시 가진 휴식 기간에는 아쉬움을 추스르며 작곡과 노래를 했고, 사진전을 열었다. 시와 영화 시나리오도 썼다. 잠시 미뤄둔 학업을 재개하여 MBA 학위 취득을 하였고, 아이스쇼를 개최하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무료 강습도 이어갔다.

재능만큼이나 진로 고민도 많았던 데니스는 불굴의 의지로 또다시 은퇴를 미루었다. 평창에서의 부진한 성적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고 싶지 않았다. 팔순의 고령으로 은퇴를 앞둔 캐럴 코치를 대신할 새 코치를 물색했고, 새로운 시즌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데니스의 새로운 꿈과 계획은 2018년 7월 19일 늦은 오후에 그의 심장과 함께 멈추고 말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 탓에, 흉기를 든 강도들과 맨몸으로 다투다가 과다출혈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데니스는 사고 당일 오전에도 새 프로그램 연습을 했고, 후배 스케이터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25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재다능하고 인품마저 훌륭했던 피겨 영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카자흐스탄 전역은 비통함에 빠졌다. 고인과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던 동료 스케이터들의 추모 공연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팬들의 염원은 알마티의 할릭 아레나 빙상장을 데니스 텐 아레나로 개칭하자는 청원 운동으로 이어졌다. ‘D10 World’라는 이름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으며, 그가 남긴 영화 시나리오는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올 10월에는 카자흐스탄 최초의 국제 피겨대회인 ‘Denis Ten Memorial Challenge’가 개최될 예정이다.

내년 2020년 2월에는 데니스가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그의 고향, 한국에서 4대륙 선수권 대회가 열린다. 그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2015년 대회 개최지도 한국이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떤 형태로든 고인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가 한국에서도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데니스는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한국을 사랑했지만, 우리는 정작 그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생각해보니 미안해진다. 나고 자란 땅에서 재능을 펼치며 세계적 인재로 성장한 후에도 한민족임을 잊지 않고 자랑스러워하는 제2,제3의 데니스 텐의 등장을 기대한다면, 우리도 그를 오랫동안 기억하며 진심으로 추모함이 마땅하다. 더불어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전역에 수천, 수만의 또 다른 데니스가 자라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피를 뿌린 항일 운동가들 자손의 상당수는 정작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한 채 데니스처럼 외국인으로 살고 있으니 참으로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사회가 심각한 인구절벽에 마주해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해외의 우수한 동포 인재를 적극적으로 불러들이자’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우수한 동포 인재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고 싶다면, 자국민과 차별 없이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속히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된 제1야당 대표의 외국인노동자 비하성 발언이 더욱 유감스러운 이유이다.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 중 상당수가 100만 국내 거주 동포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전 세계의 제2, 제3의 데니스가 더 큰 꿈을 키워 한민족 공동체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우리 사회에 고질적으로 남아있는 배타적 의식을 하루 속히 버려야 한다.

작은 체구의 양쪽 어깨에 카자흐스탄과 대한민국을 짊어지고 짧은 한평생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고군분투했던 데니스 텐. 보장된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고난의 항일운동을 택했던 민긍호 장군처럼 데니스 또한 러시아의 귀화 요청을 뿌리치고 피겨 약소국 출신 선수로서 일생 부당한 편견과 차별에 맞서 고달프고 외로운 길을 걸었다.

스포츠 스타이기에 앞서 의로운 고려인 청년으로서의 데니스의 일생과 민긍호 장군 후손들의 유랑의 길을 돌이켜 보니 새삼 숙연해진다. 모쪼록 그가 사랑했던 대한민국도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추모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아울러 긍정적이고 포용적인 재외 동포 관련 정책이 수립되어, 국내 산업 현장에서 성실히 한국 경제에 기여하는 수많은 재외 동포들을 국적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대우하는 성숙한 대한민국을 꿈꾼다. (알마티/ 글·사진 김상욱 알마티고려문화원장)

Share With:
Rate This Article

almatykim67@gmail.com

No Comments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