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리즈 : 카자흐스탄에 사는 다양한 민족들 1 – 잉구쉬]
대표적인 다민족국가인 카자흐스탄에는 카자흐인들외에도 고려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을 포함한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통상, 카자흐스탄에는 100여 민족이 살고 있다고 말하는데, 잉구쉬, 체첸, 오세티야, 둥간, 위구르, 아프카니스탄, 우즈베크, 투르크멘, 유대인, 터어키, 쿠르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쟌, 카자끼,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민족이 카자흐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무슨 이유로 이 땅에 왔을까? 이런 질문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카자흐스탄인이라고 뭉둥거려서 일컫는 이들 중에는 예부터 갈등의 역사를 가진 민족들이 있을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전혀 다른 민족의 기원과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
사실, 우리와 얼굴모양이 흡사하다고 해서 카자흐인들과 고려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서양인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조금은 서운해 할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민족을 아직도 모르는 세계인이 있냐고……
마찬가지로 이땅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다면 우리는 카자흐스탄과 고려인에 대해서도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민족에 대한 관심은 결코 미세한 차이를 극대화 시켜 소수민족별로 갈라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각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더 잘 이해함으로써 세계시민으로서 또는 카자흐스탄 국민으로서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함임을 분명히 해 둔다.
고려인에 대한 아픈 역사를 안다면 고려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우리도 기타 소수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잘 앎으로써 이들을 더 잘 이해해 보도록 하자. 그리고 형제가 되자.
본지에서는 이러한 취지로 이땅에는 어떤 민족들이 살고 있나? 시리즈를 기획하였다. <편집자 주>
- 잉구시
<잉구쉬 인들은 큰 키와 서양인의 얼굴을 가졌다. 이들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 >
카프카스산맥에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 중 하나인 잉구시 민족은 7세기경부터 카프카스에 살아왔다. 카프카스 라고 하면 ‘체첸’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체첸 인들이 국제뉴스를 자주 등장했다는 증거일텐데, 오늘은 체첸과 형제간이나 다름없는 잉구쉬 민족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다.
세련되고 용맹하며 호의적인 것으로 알려진 예의 바른 민족, 잉구쉬인들은 비교적 키가 크고 서양식 의상을 입는 카프카스민족이다. 이들은 이슬람을 믿는데 19세기 초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 이전에는 토속신앙을 믿어왔었다. 잉구쉬인들은 자기들의 가족과 종교를 통해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역사와 문화적으로 체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언어와 혈연적으로 구분된다.
인구쉬인들은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면서 살아간다. 평지에 사는 이들은 농사를 짓고 산간지역에 사는 이들은 목축을 주로 하면서 낙농제품을 생산한다.
잉구쉬 민족의 전체 인구는 약 47만 명으로 대다수가 러시아 내 잉구쉐티아 자치공화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인접 지역인 북오세티아 자치공화국에도 거주하고 있다. 잉구쉐티아 자치공화국 지도‘잉구시’라는 명칭은 ‘잉구쉬트’라는 마을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원래는 체첸과 잉구쉬를 함께 일컫는 ‘우리 민족’이라는 뜻의 ‘바이나흐’ 혹은 ‘나흐’라고 불렸다.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잉구시인들은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와 정서를 가지고 있다.
18세기 카프카즈 전쟁 당시, 남하하는 러시아에 맞서서 동부에 거주하던 나흐족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서부의 나흐족은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 후 러시아인들은 이 두 집단을 각각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거주 지역 중 큰 마을의 이름을 따라 동부의 나흐족을 ‘체첸’, 서부의 나흐족을 ‘잉구시’라고 구별하여 부르게 된다.
소련에 저항하는 체첸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던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말 스탈린 치하에서 체첸-잉구시인들은 독일군에게 협력했다는 혐의로 인해 1944년 2월 당시 체첸-잉구시인 전체에 해당하는 약 50만 명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당시 강제이주 대열에서 도망친 소수의 사람들은 카프카즈 산악 지역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소련에 대항했다.
1944년 2월에 소연방 스탈린 서기장은 소수민족들에 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면서, 강제 이주 정책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소연방 국방위원회는 잉구시 민족을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공화국으로 강제이주하기로 1944년 1월 31일에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실제로 옮기는 명령은 2월 21일에 하달되었다. 강제 이주는 3월 6일에 전격 시행되었으며, 3월 7일에 소연방 최고소비에트는 체첸-잉구세티아 공화국의 폐기를 결정했다.
체첸-잉구세티아 공화국에 그로즈니라는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졌다. 소연방 정부는 체첸 인들을 포함한 강제 이주 사건을 즉각적으로 공표하지 않았다. 강제 이주 당한 2년 4개월 후 이즈베스티야 지에 그 내용이 실렸다. 즉 체첸-잉구세티아 공화국이 폐기되었고, 해당 민족이 이주했다는 내용이 신문에 실림으로써 공식적으로 처음 알려졌다. 스탈린은 잉구시와 체첸인들이 독일의 스파이 노릇을 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강제 이주를 결정했으며, 당시 스탈린은 소련 국경 근처에 있는 그 어떠한 소수 민족들이라도 독일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의심스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비에트시기 강제이주당한 다른 소수민족들처럼 잉구시 인들도 비자발적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그러나 독일 군대는 전쟁 도중에 체첸과 잉구시 민족의 거주 지역을 침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죄목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시행된 강제 이주 사건은 매우 폭력적이고 타민족을 억압하는 행위이다. 이주의 배경에는 수세기 동안 러시아에 대항해 저항을 벌이던 잉구시-체첸 인들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강제 이주된 민족들에 대한 소비에트 정부의 차별 정책은 지속되었다. 체첸과 잉구시 민족의 예전 주거지는 러시아 인들 뿐 만 아니라 그루지야 국민들에게로 넘겨졌다. 과거의 땅을 원주인에게로 반환하지 않는 것도 차별 대우였지만, 귀환 이후에도 소비에트 정부는 새로이 재편된 체첸-잉구세티아 공화국을 강력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 지역에서 소비에트 化를 강하게 추진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들은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구직을 위해 떠나는 빈도가 점점 증가했다. 정치적 불만족, 경제적 빈곤 등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불만이 증대했다.
스탈린의 죽음과 더불어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쟁취하면서 과거에 강제 이주 당한 민족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되었다. 강제 이주에 대해서 외국으로부터의 비판과 압력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강제 이주 당한 민족들이 고향으로 귀향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았다. 전적으로 흐루시초프의 실용적인 희망에 의해 귀환이 이루어졌다.
강제 이주 당한 민족들의 입장에서도 땅과 삶의 터전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시대의 정책들이 일부 잘못되었다고 인정했으며, 이를 수정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1956년 20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이 있은 이후에 체첸 인들의 귀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56년 11월에 소비에트 당국은 1957-60년까지 4년간 체첸과 잉구쉬 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귀환하도록 결정하였다. 1957년 2월 11일,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는 체첸-잉구세티아 공화국을 복원하는 결정을 내렸다.
1973년에 체첸-잉구세티아 공화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중앙정부가 이 지역 민족들에 대한 통제 정책을 의도적으로 실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체첸-잉구세티아 공화국에서 초대와 제 2대 서기장들은 러시아인이었다. 강제 이주 시기 동안 체첸 인들이 이슬람에 깊게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체첸 지역에서는 정부에 의한 반종교 분위기가 매우 팽배해 있었다. 1979년에 이르러서야, 연방 정부는 모스크 건립을 용인하였다.
프리고로드니 지역은 잉구시인들이 강제이주 당했을 때 당시 소련이 북오세티아에 넘겨주었던 곳인데 1957년 강제이주로부터의 귀환이 허용된 뒤, 이전에 그 지역에 거주했던 잉구시인들이 본래의 소유지를 요구하면서 오세틴과 잉구쉬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1992년 영토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이 발발하자, 평화유지군의 명목으로 러시아 군대가 진주하여 오세틴군과 연합하여 잉구쉬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이 전쟁으로 6만여 명의 잉구시인들이 북오세티아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이 후 이 지역에는 남오세틴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다. 영토반환을 위한 전쟁에서 오히려 더 많은 영토를 빼앗기게 된 잉구시인들은 오세틴 민족과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자료원 : EU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