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 수교 30주년 기념 특별기획 : 우리는 고려사람이오 – 2]
강제이주와 카자흐스탄 고려인 역사의 시작
김상욱 알마티고려문화원장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과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은 소련정부가 관련 문서를 철저히 통제하여 공개되지 않았지만 고르바쵸프 공산당 서기장의 뻬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공개되어 지면서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성과를 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1937년 8월 21일에 열린 소련 인민 위원회와 소련 공산당 결정으로 ‘극동 지방 국경 부근 구역에서 한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결의문의 주요 내용은 극동 지방에 일본 정보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극동 지방에 살던 모든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는 극동이나 유럽을 불문하고 독일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파시즘, 군국주의 세력이 전쟁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일반인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이들 두 세력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 당국자의 입장에서는 갈등과 전쟁의 빌미를 사전에 제거하여야 할 필요성이 높아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결정은 이듬해 1월1일까지 완료시키는 것을 목표로 즉시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강제 이주의 책임자인 추바르가 12월 29일에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카자흐로 20,789 가구, 총 98,454명이 이주되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버려진 사원, 창고, 움막, 축사 같은 곳에서 이주시 가져온 식량과 옷가지로 첫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1938년 봄이 되자, 급히 세워진 이주 계획은 중앙아시아 현실에 맞게 조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약 60%에 달하는 한인들이 가깝게는 20km~50km에서 멀게는 카자흐스탄 전역으로 재이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년 봄에 카자흐스탄의 8개 주내 21개 지역에서 70개의 고려인 농장(꼴호즈)이 조직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11개는 어업 꼴호즈였고, 나머지는 농업 꼴호즈였습니다. 이와 같이 알마티 주 카라탈 지역의 경우 15개의 벼농사 꼴호즈가, 크즐오르다 주에서는 22개의 벼농사 꼴호즈가 생겼는데, 실로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려인들이 점차 새로 이주된 지역에 적응되어 갔었지만 1941년 6월 22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고려인들은 적성민족으로 분류되어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었고 대신, 카자흐스탄과 우랄, 시베리아 등 후방에서 노동군으로 복무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고려인들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자원하여 독일전선으로 투입되었고, 이들 중에는 알렉산드르 민(Александр Мин) 중위, 잠수함 지휘관 알렉세이 한(Алексей Хан), 발렌찐 최(Валентин Цой)와 스테판 정(Степан Тэн) 등 소비에트 정부가 인정하는 걸출한 전쟁영웅들을 배출하였습니다.
1950년대가 되자, 카자흐스탄 침켄트 지역이 면화 재배지역으로 개발하려는 결정이 내려지자 고려인 들이 주를 이루던 탈띠꾸르간 주의 «프라그레스» 농장이 침켄트로 이주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에도 같은 방식으로 탈띠꾸르간 주 발하쉬 군을 쌀 재배 지역으로 개발하기 위해 카라탈구역 고려인들을 집단 이주시켜서 «박박듸»라는 벼농사 국영농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농장이 소련 해체 후 많은 고려인들인들이 도시로 떠나갔지만 아직도 가장 중요한 수리조합장을 고려인이 맡고 있음으로써 농경지가 잘 관리되어 카자흐스탄의 대표적인 벼 생산농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중앙아시아를 제2의 조국이라고 여기고 살았던 고려인들은 벼농사 부문에서 기록적인 수확량을 기록하고 시베리아 처녀지 개간사업 등에서 수많은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배출하는 등 역경을 극복하고 사회 각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살았습니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스탈린 격하 운동이 일어나자, 고려인들은 잃었던 민족문화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강제이주 때 고유의 문화와 교육 및 모국어의 손실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 사범 대학과 수많은 학교들이 1937년 이주시 옮겨왔습니다. 당시, 총 1,102명의 사범대학생과 14, 327명의 초중고생이 있었지만 1938년 민족교육이 중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소비에트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원칙으로 인해 고려인 지식인들의 전통 문화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뻬레스트로이카는 모국어 재생과 전통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고 1989년 카자흐스탄에는 고려문화중앙이 조직되기 시작하여, 고려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알마티를 위시하여, 잠블, 침켄트, 크즐오르다, 카라간다 및 딸띄꾸르간에 각각 설립되었습니다.
한-카 관계는 서울과 알마티에 대사관이 개설되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2009년 5월 양국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고, 2014년 11월에, 카자흐스탄과 한국 간에 비자 면제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2017년에 카자흐스탄고려인 정주 8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현재 구소련지역 고려인 현황은 아래 그림1과 같습니다. 다만 이 그림에는 한국내에 거주하는 약 8만명에 달하는 고려인는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