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 수교 30주년 기념 특별기획 : 우리는 고려사람이오 – 3]
고려인의 설 풍습과 명절 음식
김상욱 알마티고려문화원장
고려인들은 한민족 최대 명절의 하나인 설날에 차례를 지낼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아니오”입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약 10% 정도는 차례를 지낸다고 해야 더 정확한 답이 됩니다. 그 이유는 고려인이라고 뭉퉁거려서 부르는 동포사회중에서 큰땅배기라고 불리는 사람들, 즉 좁은 의미의 고려인(1937년 강제이주 이전에 연해주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경우 차례를 지내지 않습니다만 이들과 전혀 다른 경로와 다른 시기에 소련에 편입된 사할린 동포들의 경우는 차례상을 차리고 세배를 하는 우리의 풍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원고에서는 사할린 동포들을 제외한 소위, 큰땅배기라고 불리우는 좁은 의미의 고려인들의 설풍습에 국한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고려인들은 설날 차례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린 자녀들이 부모님께 새배를 하는 풍습도 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각 도시의 고려문화중앙을 공연위주의 설날행사를 가집니다. 올해에도 설날인 25일, 알마티와 누르술탄 등 카자흐스탄 전역에서 크고 작은 설날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런 행사는 물론 고르바초프가 뻬레스트로이까를 한창 추진하던 89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려인으로서가 아니라 소련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고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하는 소비에트 문화속에서 살아오다 민족의 전통문화를 부활시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자 고려인들은 매년 음력 설날에 맞춰 공연위주의 설날행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한국과의 국교수립 후 쏟아져들어온 선교사, 유학생, 교민들의 영향으로 음력설날은 점점 중요한 명절이 되어갔습니다. 알마티의 경우 고려극장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훨씬 수준 높은 공연들이 무대에 올렸습니다. 소련의 수도는 모스크바였지만 고려인들의 마음의 고향은 중앙아시아이고 특히 알마티는 고려인들의 문화수도 였습니다. 올해도 알마티의 고려인들은 카자흐국립대학교 학생궁전에 모여서 고려극장이 꾸민 1부 공연과 알마티고려문화중앙이 꾸민 2부 공연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고려극장이 꾸민 무대는 12간지에 대한 내용을 노래와 춤으로 엮어서 무대에 올렸고, 2부에서는 고향합창단의 합창을 시작으로 남성, 인삼, 무지개, 비단길, 비둘기 등의 문화단체들이 꾸민 춤과 노래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올해는 우리의 전통무용이나 노래 위주의 행사에서 진일보하여 젊은이들이 직접 꾸민 K-POP 무대와 고 데니스텐이 작곡한 음악 등이 무대에 올려짐으로써 모든 세대가 함께 공감하고 즐기는 설날행사가 되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또한 올해는 우리나라의 가수 이미자씨에 해당되는 카자흐스탄의 국민가수 로자 롬바예바씨가 출연하여 아리랑을 불러 대미를 장식함으로써 관객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이는 우리민족의 설날이 우리만의 명절이 아니라 전 카자흐스탄국민들과 함께 기뻐하는 명절로 승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누르술탄에서는 동포어린이들이 무대에 올라가 객석을 향해 세배를 함으로써 우리전통의 명절 설날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게 하자 김대식대사는 이들에게 직접 세배돈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설날과 같은 명절이나 잔치음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고려인들은 ‘체면’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래서 설날과 생일, 혼례, 돌, 환갑 등 잔치때에는 체면 때문에 상차림이 화려해집니다. 잔치는 보통 점심이나 오후에 시작하여 저녁때까지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나 밤 늦도록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올해 필자는 평소 친하게 지내는 따찌아나 할머니댁에 초대를 받아서 갔습니다. 그 집에는 형제들과 조카, 손주 등 그녀의 가족들이 와 있었고 상다리가 휠 정도로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습니다.
설날상위에 오른 음식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찰떡, 증편, 감자 배고자 (감자전분으로 된 만두피에 고기와 양배추를 잘게 썰어 넣어 만든 것. 만두피의 쫄깃쫄깃한 맛 때문에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음식), 살라드(계란삶은 것을 잘게 썰고 토마토, 오이 등 야채와 마요네즈에 버무린 것), 김치, 당근채 김치, 순대, 훈제 연어, 물고기혜(수닥을 양념과 식초에 버무린 것), 떨(소 혀 삶은 것을 얇게 썬 것), 가즈이(말순대), 이끄라(연어알), 가지채, 깔바사(소시지), 묵, 쁠롭(중앙아시아식 볶음밥), 김밥, 가주리(가즐), 사과, 사과피클, 바나나, 포도, 레몬, 물, 사이다, 보드카, 포도주 2가지, 꼬냑, 샴페인 등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전통음식과 중앙아시아음식, 러시아식이 혼합된 상차림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의 명절상차림은 일반 생일, 환갑, 돌잔치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이와 비슷하게 차려집니다. 고려인들은 잔치를 하게 되면 반드시 주문하여 준비하는 것이 찰떡과 증페이 입니다. 알마티에는 전문적으로 찰떡과 증페이(증편)를 만드는 떡집이 있습니다. 이 떡집들은 보통 떡외에도 두부나 가주리 를 만듭니다.
잔칫상에 꼭 올라가는 것 중에 하나가 ‘고려국시(국수)’입니다. 더운 여름철에 시원한 ‘고려국시’는 고려인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이나 카자흐인 모두가 좋아하고 즐겨 찾습는다. 카자흐스탄 전역에 있는 고려식당의 메뉴에 ‘고려국시’는 빠짐없이 들어있습니다. 국수의 면은 흔히 하는 방식데로 삶아서 건져네고, 국시추미(꾸미를 말함)를 준비한다. 국시추미에는 양배추 김치, 오이채, 쇠고기를 얇게 썰어서 볶은 것, 고추 볶은 것, 계란 지단 등이 포함되고 국물은 물에 설탕을 조금 타고, 콩지러이(간장), 토마토 잘게 썬 것, 우크롭, 소금, 욱수수(식초)를 넣고 미리 만들어 둡니다. 국시추미는 미리 따로따로 만들어 두었다가 국수를 먹을 시점에 면만 삶아 건져서 그릇에 담고 그 위에 국시 추미를 얹고 국물을 붓는다. 잔치가 잦은 집에는 국시분트리(손으로 눌러서 국수 뽑는 기계)가 있어서 직접 면을 뽑아서 먹습니다.
배고자는 고려인들이 잔치때 반드시 준비하는 음식의 하나로 돼지고기, 양배추, 마늘, 상채, 고치갈기를 주재료로 하여 만드는 것으로 만두의 일종입니다. 감자배고자는 밀가루 반죽 대신 감자전분으로 만든 만두피에 잘게 쓴 고기와 양배추, 마늘, 상채 등을 넣어 만든다. 만두 찜기에 넣고 찌면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입니다.
순대는 밥, 시래기, 돼지피, 소금, 양념을 돼지의 창자에 넣어서 삶은 것입니다. 가주리는 찹쌀가루로 만든 것으로 강원도에서 한과의 일종으로 뜨거운 홍차와 함께 먹는 후식입니다. 고려인들이 직접 만든 엿(설탕이 원료)을 바르고, 그 위에 깨를 살짝 뿌립니다. 시장에서 인기리에 판매됩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