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 록의 레전드 빅토르 최, 15일 30주기 맞아
8월 15일은 광복 75주년이기도 하지만, 구소련의 유명한 고려인 록가수 빅토르 최가 요절한 지 3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30년 전인 1990년 8월 15일, 80년대 러시아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던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평소 낚시를 즐겼던 빅토르는 자신의 승용차 ‘모스크비치’를 몰고 가던 중 마주오던 버스와 정면충돌하는 사고를 당해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 때 빅토르의 나이는 고작 만 28세.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소련 전역에서 추모행사가 열렸고 장례식이 수차례 연기될 정도로 그 열기는 뜨거웠다. 빅토르를 따라가겠다고 5명의 팬들이 투신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열성팬 30여 명이 무려 4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도 러시아의 여느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매년 8월 15일이면 그의 삶과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이 시내 중심가인 ‘아르바트 거리’나 그의 동상앞에 모여 거리 콘서트를 개최하거나 추모모임을 해 오고 있다.
20세기 대중음악의 선두였던 록음악을 통해 소련 젊은이들을 열광케 만들었던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 21일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최대 거주지였던 크즐오르다(이곳엔 홍범도 장군의 묘소도 있다) 에서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에서 태어났다.
5살때 가족과 함께 뻬쩨르부르그(당시의 이름은 레닌그라드)로 이주한 그는 그림과 조각에 뜻을 두고 미술학교에 전학했었다. 그러나 기타와 록에 빠져 록그룹 ‘제6병동’을 결성했고 세로프 미술대에 진학한 뒤에도 록그룹 활동을 이어갔으나 저항 정신을 불어넣는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당국이 록음악을 탄압해 퇴학당했고 ‘제6병동’도 해체됐다. 그러나 그의 음악열은 1982년 여름, 록그룹 ‘키노’를 결성하게 된다. 80년대 소련의 격변기에 당시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의식을 담아낸 것이 바로 그가 결성한 그룹 ‘키노’의 음악이었다.
빅토르는 러시아에서 록 시인이라고 불리운다. 그는 음악성 못지 않게 그의 노래와 음악속에 시대성을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과 아프칸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를 노래했고, 변화를 원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음악으로써 대변했다. 원문으로 그의 노래를 불러보면 감탄할 정도여서 학자들사이에서도 그의 노래들은 최고의 문학작품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대학에서도 강의가 되고 있다. 철학적 메세지 혹은 사회현상에 대한 고발 등의 요소보다 더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미학적 요소들이 그의 작품속에서는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소련의 90년대하면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와 옐친의 등장을 손 꼽을 수 있는데 문화의 영역에서 본다면, 바로 빅토르 최를 꼽을 수 있다. 그때 그는 한 명의 가수의 수준을 넘어 소련 젊은이들의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한마디로 80년대 러시아의 문화현상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사망 직후인 1990년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언론인 ‘콤소몰스카야 쁘라브다’는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했다.
“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최 그 자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인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최이다. 그는 그가 노래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15일에는 록의 마지막 영웅을 위해 알마티시내의 툴레바예바 / 카반바이바트라 거리에 서 있는 그의 동상앞에 추모의 꽃다발을 놓고 와야겠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그의 영면을 빌면서….(김상욱 알마티고려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