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오피니언칼럼, 기고“홍범도 장군의 자취도 찾아 뵙고 체험수기 수상자께 직접 상패와 선물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자취도 찾아 뵙고 체험수기 수상자께 직접 상패와 선물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황형선(KBS 사회공헌방송부장)

이곳 서울은 짧은 가을을 지나쳐 옷장에 넣어두었던 두꺼운 외투를 갑자기 꺼내 입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곳의 날씨는 어떤가요?

동포여러분 반갑습니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대표 공영방송 KBS에서 28년째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황형선 PD라고 합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한민족방송’은 북한주민을 비롯해 북방동포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방송입니다. 방송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북방동포 체험수기’ 공모사업을 통해서도 동포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80년대 대한민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본 많은 중국 내 동포들께서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이뤄지면서 가족을 찾는 편지를 한민족방송으로 보내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땅에서도 여전히 우리말과 글을 배우고 있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담을 그릇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1998년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업의 이름이 ‘북방동포’에서 ‘한민족’으로 품이 넓어진 것은 제 개인적인 경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2019년, 저는 우연한 계기로 러시아 사할린에 한글로 된 신문이 있고 창간 70주년을 맞게 됐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됐습니다. 소련의 공산주의체제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를 포함해 지난 7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발간을 멈춘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저에겐 말 그대로 충격이었습니다. 책으로만 알던 ‘강제이주’와 그 이후 동포들의 지난한 삶은 사할린에서 만난 동포 어르신들의 증언을 통해 지금의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역사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픔과 고통을 함께 했던 모든 동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반성에서 늦게나마 이름을 ‘한민족 체험수기’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동포들의 참여가 늘어가고 있고 23회째를 맞이한 올해에도 많은 분들께서 우리말과 글에 얽힌 각자의 ‘체험’을 글로 그리고 영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특별상을 수상한 남경자 님, 전옐레나 님, 그리고 청소년부문 장려상을 수상한 최니나 학생, 세 분께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흔히, 동포들의 시간은 떠나온 그날에 멈춰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끊어진 기억을 그렇게 표현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늘 마음 한켠엔 고향이란 단어가 마음을 아리게 하지만, 지금 딛고 선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하루하루는 어김없이 닥치다보니 말도 글도 잊게 됩니다. 쓸 데가 없는 우리말과 글을 자식에게 강요하긴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냉전체제의 붕괴와 다시 이어진 한국과의 인연은 1세대에겐 감격이었지만, 후손들에겐 난감한 일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최니나 학생의 글처럼, 영원히 거기서 살 줄 알았던 터라 한글과 우리말을 배울 동기도, 계기도 없었던 겁니다. 한국기업이 현지에 진출하고, 그로 인해 일자리가 생기면서 한글학교가 생기고 활기를 띄게 됐습니다. 손자, 손녀들은 막연하게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라로만 알던 그곳의 음악(K-POP)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서 비로소 우리말과 글을 배울 이유를 얻게 됐습니다. 필요가 수요를 낳은 셈이지요.

세상이 너무나 빨리 변하다보니 불과 10년 전 가수로 활동했던 사람이 최근 방송에 나온 모습을 보고 그의 직업을 ‘방송인’으로 알고 있는 청소년이 많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겐 너무도 당연한 추측일 겁니다. 같이 공유한 추억이 없기 때문이겠죠. 가끔, 한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하소연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주변인들로부터 “넌 한국인인데, 왜 한국말을 못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반응은 한마디로 한국인의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사할린에서, 알마티에서, 중국 하얼빈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함께 나눌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지는 결국 무관심으로 이어집니다. 방송을 만드는 저로선, 더욱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자꾸 생깁니다. 동포 어르신들의 기억이 그들만의 기억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기록해야겠다, 미래의 동포세대들이 우리말과 글을 배울 필요성을 느끼게 해줘야겠다, 그리고 무지가 무관심으로 퇴화되지 않도록 알려야겠다는 반성과 다짐을 하게 됩니다.

세계적인 역병으로 인해,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가족끼리도 휴대폰으로만 소식을 전한 지 2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서서히 일상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내년엔 동포여러분께서 소중한 마음을 담아 고국으로 돌려보내신 홍범도 장군의 자취도 찾아뵙고 체험수기 수상자께 직접 상패와 선물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들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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