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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카슴-조마르트 토카예프(Kassym-ZhomartTokayev) 대통령이 전통적인 우정, 동맹 및 키르기즈 공화국과의 전략적 파트너십 원칙에 따라 우방국 키르기즈스탄 국민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한다고 전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의 언론 담당비서는 1 만톤의 밀이 이웃국가로 보내질 것 이라고 밝혔다. 지난 주말, 토카예프 대통령은 키르기스스탄 자파로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를 진행하며 키르기스-타직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 결과로 당시 지역상황을 논의하면서 카자흐스탄이 필요할 경우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900km 이상의 국경선을 통해 분리가 되어있지만, 국경선의 대략 절반가량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국경 인근 거주자들은 물, 목초지 및 도로접근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분쟁지역은 두 나라 국경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2021년 5월 2일 양국간 국경 분쟁동안, 키르기즈스탄 36명, 타지키스탄 20명이 사망 했고 사망자에는 어린 아이들도 포함 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민간인이며, 58,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분쟁 지역에서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자흐스탄은 즉각적인 평화적 분쟁 해결을 위해 해당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전에도 카자흐스탄은 누르술탄 정상회담에서의 시리아 내전협상과 같은 국제 분쟁의 중재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카자흐칸국과 러시아의 등장  지난호(8회)에는 현재의 카자흐스탄이라는 국가의 원형이 되는 카자흐칸국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즉, 징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의 영역이었던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에서 떨어져 나온 한 유목집단이 15세기 중반, 서서히 남하하여 현재의 알마티주(세레레치예 지역)과 시르다리아강 중류 지역을 주요 거점으로 해서 카자흐칸국을 세웠다는 것과  18세기  전반기까지 대, 중, 소 쥬즈(오르다)   라는  카자흐인들의  정치  연합체를 구성하며 살았다.   이번호에는 카자흐 현대사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카자흐칸국 성립(15세기 중반) 후부터 18세기까지 카자흐초원과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겠다.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의 화려한 반격 킵차크 칸국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카잔칸국, 크림칸국, 아스트라한칸국, 시비라칸국 등으로 분열되었다는 말은 이미 지난호에서 언급했다. 분열된  칸국 중에는카자흐칸국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한 나라가 5개로 쪼개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과거, 몽골의 대칸이나 킵차크칸국의 칸을 대리하여 러시아계 공국들로 부터 세금징수업무를 대행하면서 세력을 키운 모스크바공국은 서서히 힘을 키워나갔다. 드디어, 16세기 중반(1552년) 볼가강 중류 유역의 요충지 카잔을 공격하여 카잔칸국을 멸망시켜버렸다. 이는 오랫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계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반 4세가  이 승리를 기념하여 현재까지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 있는 바실리 대성당을 건립한 것을  보면 그가 이 전쟁의 승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 사건은 앞으로 전개될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러시아가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이 전쟁 승리 4년 후 모스크바공국은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가는 볼가강의 하류 유역에 자리잡은  아스트라한 칸국도 병합하고 종가인 킵차크칸국의 영토의 절반을 차지한다. 세력을 키운 모스크바공국은 이후 '짜르 러시아'로 국가면모를 일신하고 러시아인들에게는 '짜르'로서, 주변의 유목민들에게는 '위대한 벡 차간 칸'으로 간주되었다. 세계사에 러시아의 등장을 알린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통치하던 카잔 칸국의 유민을 타타르라고 부르고 그 후에 정복한 주변 유목민들도 오랫동안 이 이름으로 통칭했다. 타타르 라는 명칭은 옛날 몽골의 침략에 질린 유럽 지식인들이 그들의 전설에 나오는 타르타루스(그리스어로 지옥에서 온 사람)와 몽골을 구성하는 유명한 부족인 타타르를 동일시하여 몽골 전체에 부여한 이름인데, 러시아인도 이를 답습하여 타타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볼가-우랄 지역의 사람들은 그 후에도 계속 타타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말에는 항상 러시아를 괴롭힌 '야만인'이라는 뉘앙스가 따라 다녔다. 요컨대, 카자흐칸국의 성립과 러시아의 등장은 킵차크칸국이라는 중앙권력의 약화와 함께 시기적으로 큰 시차없이 이루어진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건이었다.   러시아의 '억압'과 '동화'정책 러시아는 자신이 차지한 볼가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러시아 귀족과 수도원 또는 도망온 러시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과정에서 타타르인들은 이주해온 러시아인들 때문에 오히려 거주지와 직업에 제한을 당하게 되었고 18세기 말 무렵에는 인구가 역전되어 러시아인이 인국의 52%를 차지하고 타타르인들은 42%에 불구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는 러시아정교의 포교를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개종자에게는 면세특권을 주거나 죄를 사면해주는 방법으로 개종을 유도하는 한편, 반무슬림정책을 펼쳐 한때는 카잔 부근에 있었던 모스크 약 70%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타타르인들은 자신들의 고향 땅을 떠나 카자흐초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중앙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타타르인 디아스포라'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이들은 카자흐초원의 현대사 전개에 있어서 러시아인들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18세기말 중앙유라시아쪽을  눈을 돌린 예카테리나 여제는 동방영토의 안정과 동방무역의 확대를 위해 타타르인들에게 활동의 자유를 주고 이는 상업을 장려하는 등 실용주의적인 포용정책을 폈다. 이 결과 타타르인들은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동방의 이웃 사람들과 친근함을 무기로  러시아인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카자흐  초원과 투르키스탄에서  상권을 확대했고  이들 가운데는  초원을  돌아다니는  잡화상에서부터  대규모 대상 무역을  하는 거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인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동방에서 양모, 피혁, 면사를 가져오고,   러시아에서 직물,  금화,  금속 제품을  가져와서 팜으로써  러시아와  중앙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상업망을  구축했다. 타타르의 부흥 킵차크칸국의 수도가 있었고 주우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의 중심 거점이었던  볼가강유역과 우랄지역에는 상업으로 거부가 된 타타르인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자신이  모든 재산을  고향에  모스크와  마드레사를  짓고 유지하는 비용에 기꺼이  내놓았다. 또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은  투르키스탄, 특히  이슬람교학의  중심지인  부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들은  러시아의 통치하에  쇠퇴한 이슬람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부하라유학을 통해서  러시아문명의  도전에 대항해서  이슬람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이슬람  해석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무슬림도  근대과학과  러시아어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러시아 당국이 초기에  취했던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개종화를  중단하고  중앙아시아 거주민들을  러시아와(정교화)하고  그들 사이에  러시아문화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한 데  영향 받은 바 크다.   카자흐초원의 병합 러시아는 카잔 칸국을  손에 넣고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16세기 말에는 주치 후예를  군주로 추대한  시비르  칸국을 병합하고 18세기 초부터는  카자흐초원  북쪽에서  부터 군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는  러시아 변경방위와  무역의 거점 역할을  동시에  했다. 이때 큰  활약을  한 이들이  바로 '코사크'들이다.  카자흐 초원에  러시아의 패권을  수립하는데 첨병의 역할을 한 이들은 러시아 농민병이라고  할 수 있는데, 15~6세기에 러시아의  동남부 변경지대로 도망간 러시아  부랑민들이 투르크계 종족들과  접촉하면서 생겨난  특이한 집단이다.  원래 '카자흐'와  똑같은 어원 즉, '모험자', '독립적이고 얽매이지  않는  백성'을  뜻하는 투르크어에서 유래했다. 러시아인들은  양자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카자흐인에게 '키르기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들은 이른바  '키르기스-카자흐'인데,  카자흐인은  러시아 혁명  후  1925년까지  이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명칭은  카자흐와  본래  키르기스  사이에  혼동을 일으키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러시아 세력이  카자흐  초원북쪽에 다다를  무렵  유목  카자흐는 이미  정치적 통합성을  상실하고 서쪽에서  부터 차례로 소쥬즈, 중쥬즈, 대쥬즈라고 불리는  3개의  부족  연합체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카자흐의  최대 위협은  같은 유목민인  준가르(티베트불교를  신봉하는 서몽골계 유목집단)의  침략과 약탈이었다. 타쉬켄트, 투르키스탄, 사이람 등  카자흐인의 거점도시들에 대한 침탈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난민은  사마르칸트,  부하라,  페르가나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1730년 소쥬즈의  아불 하이르 칸은  러시아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청원하고 이를 계기로  다른 쥬즈의  칸들도 그의 전례를 따랐다.  이는 준가르의 약탈로  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안보와  통상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외교전략이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러시아는  카자흐 초원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미  권위를 상실한  소쥬즈와  중쥬즈의  칸을  대신하여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초원  동남부에  퍼져  있던 대쥬즈의  정치 지도자들도 러시아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러시아당국은 이렇게 차례로 러시아령에  편입된 카자흐  초원을 악몰린스크, 세미팔라찐스크,  세미레치예,  우랄스크,  투르가이,  시르다리아 의  여섯게 주로  나누고 이  중  일부를  '옴스크'에  소재한 초원 총독부 관할 아래 두었다.   요컨대, 카자흐 초원과  러시아는  오래전부터역사적으로 연결성을  가져오고 있었지만 킵차크칸국이라는  하나의 통치권  아래에 놓이면서  좀 더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이는 변방의 작은 공국이었던 러시아가 킵차크 칸국의 지위를 차지한 후에도그 관계는 계속되었고 19세기  부터 펼쳐지는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등장하게 된다.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이번 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카자흐스탄은 언제부터 존재했었나?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와 국경선은 20세기 초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연방 성립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936년 카자흐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연방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중의  하나가 되었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떤 상태였나? 고대부터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땅이었던 이곳은 징기스칸이 세운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징기스칸 이전에도 훈제국, 돌궐제국(투르크제국) 등 수많은 유목제국이 성립되어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역사의  연결성측면에서 보자면  대몽골국부터 시작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은 징기스칸 사후 최근 19세기까지도 징기스칸의 직계 후손이나 그 일족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피의 정통성'을 통한 통치의 정당성 확보라는 유목사회의  오랜 전통이  매우 강하게  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몽골국의 부흥을 목표로 내세웠던 티무르마저 티무르대제국의 건설 이전부터도 현재의  우즈벡지역에서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자신이  직접  칸의 지위에 오를 수는 없었다. 징기스칸의 일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징기키스탄의 피를 물려 받은 공주와 결혼을 함으로써 비로소 칸 가계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자신이 스스로를 칸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땅(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은  징기스칸 생전에 그 아들들에게 나눠졌던 4칸국중 큰아들  주치의  영지였던 킵차크칸국(주치 울루스)과 차가타이칸국(카가타이 울루스)이 시르다리아강을  경계로 서로  교류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북쪽의  유목민들과  남쪽의 오아시스  농경민들은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면서도 교류하면서 살아왔다. 카자흐칸국의 탄생 그러던 중  15세기가 되면서 킵차크칸국(주치 울루스)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그  동부지역에는 '우즈베크'라고 불리는 유목민 집단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을 통솔한 사람은 주치의 다섯째 아들 샤이반의 후손인 아블 하이르칸 (1428~1468)이었다. 아블  하이르칸은 종가인  킵차크칸국으로 부터  분가를 선언하고 서서히 남하하여 티무르제국의 영역인 호라즘을 약탈하고 그를  추종하는 유목민들을 통합하여 1446년 '우즈베크 울루스' 세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카자흐스탄의 남부지역을  흐르는  시리다리아 강  중류지역을  근거지로 삼아오던 유목민들은  케레이칸과  자니 벡  칸(두 사람  모두 주치가문의  일원)을  따라 천산산맥 북쪽 세미레치 지역(오늘날의  알마티주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이주하여  카자흐칸국을 세우게 된다.  이들이 오늘날  카자흐 민족의  기원이 된다. 이들은 킵차크  초원의 유목민들을  추가로 받아들여 자니  벡의 아들인  카심 칸 시대에는 강력한  유목국가인 카자흐칸국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시르다리아 강  중류  유역과  세미레치에 지방의 오아시스  도시를 지배 아래에  넣고 주위의  여러  세력을  위협했다   이들은  적어도 18세기  전반기까지 대, 중, 소 쥬즈(오르다)   라는  카자흐인들의  정치  연합체를 구성하며 살았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와서  정치인들의 출신 배경을 비롯한 현재의   카자흐의  정치와  사회실태를 파악하는데  유용한  분석틀로써 사용되어 지고 있다.  옛 소련의 카자흐 공산당은  대부분 대 쥬즈(울르 쥬즈)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독립 후에도 대쥬즈  출신인 나자르바예프가 대통령이 되고  기타 중,  소쥬즈를 대표하는 정치집단이 존재한다      한편, 아블 하이르칸의  손자인 샤이바니는  카자흐원정은 실패하지만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영토(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사이의 비옥한  오아시스 농경지대)를 차지하게 되는데, 부하라에 입성하고  사마르칸트까지 정복하여17세기초까지 이 지역을 통치함으로써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원형을 만들어나갔다. 주변정세 : 러와 청제국의  등장   킵차크칸국과 티무르제국간의 관계는 한마디로 '협력'과 '경쟁' 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대몽골국의 후예들중에서 종가를 자임해온 킵차크칸국은 과거 차가타이칸국과 일칸국의 영토를 모두 아우른  티무르제국은 물론이고 징기스칸의 직할지 였던 몽골 고원과 중원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이나  후계자 선정 등의 일에 간여를 하여 분쟁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종가로써의 권위를 유지해 왔었다. 그러나 대대로 비옥한 페르시아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오던  킵차크칸국의 칸들은 티무르가 페르시아와  아랍, 소아시아지역까지 정복하자 잦은 갈등을 빚어왔다. 때로는 형제국으로써 '협력'관계를 유지했지만 기습적인 약탈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는 티무르의 킵차크칸국에  대한 원정을 불러왔고 수도 바투사라이가 그의 손에 함락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런 역사가 전개되자 킵차크 칸국의 중앙권력 약해지고 칸의 권위도 실추되었다. 세금이나 공물납부를  거부하고  중앙에  반기를 지방정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모스크바 공국이었는데, 16세기 접어들면서 세력을 키운 모스크바 공국은 루시인들이 사는 땅의 북동부를 중심으로 짜르 러시아를 세우고 분열된 킵차크 칸국의 후예들인 크림칸국, 카잔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시비리 칸국 등을 차례로 손에 넣으면서 대제국으로 성장해 나간다. 이때 러시아를 동진시킨 주요 동력은 모피였는데, 마치 미국의 골든러시 때문에 서부개척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시베리아산 모피는 유럽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구가하였고, 러시아의  모피 사냥꾼들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시베리아 진출 60년 만에  베링해에 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다. 한편,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의  대칸인 쿠빌라이가 몽골고원과 중원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세운  원은  주원장이  세운 명에 의해 중원을  빼앗기고 몽골고원으로 축소되었다가  마침  만주에서 흥기한  여진족이 세운  후금(나중에  대청으로 고침) 에 의해 징기스칸으로  부터 내려오던 대몽골국의  옥쇄를 헌납당하게 된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대몽골국의 정통성과  유라시아유목민에 대한  종주권은 청으로 넘어가고 청의 황제는 중원에 사는 한족들의 황제임과 동시에 유목민들의 대칸으로서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  더해  17세기에  접어들면  몽골고원에서는 대몽골국의  부흥을 내걸고  서몽골 지역의  오이라트부가 몽골고원을 통합하게 된다. 이들은 세계적 제국으로 발전한 청과  러시아 사이에서 과거 대몽골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준가르 유목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준가르는 한때 몽골고원과 티벳을 연결하여 큰 세력을 떨치게 되고 현재의  카자흐스탄 남동부지역인 세미레치에를  자주  침략한다. 카자흐인들은  이 때를 '수난의  시기'로 역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 같은  유목민으로서 좋은 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은  잔인한 복수를  동반한 전쟁이었고  이를 계기로 카자흐인들은  서쪽의 러시아 짜르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이는 19세기 말까지 진행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 또는 카자흐에  대한 러시아의  병합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하게 된다. 18세기 말에는 아블라이 칸이라는 유능한 지도자가 내부 갈등을 통합하고, 청과 러시아 사이에 균형 외교를 펼치며 준가르 잔당들을 제압했으나, 그 후임자들은 러시아에 휘둘리게 되었고 청의 준가르 정복으로 인해 알마티와  일리 강 지역과 발하쉬 호수 동남부는 청의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  카자흐스탄 북부와 중부지역에 8개의 러시아식 행정구역을 두어 지배하에 두었다가 1860년대에 이르면 카자흐스탄 전역이 러시아의 영토가 된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 및 적백내전 기간 동안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키르기스 자치 공화국'의 일부로서 편입되었다가 1924년부터 추진된 민족 구성을 바탕으로 한 자치 공화국 구성 개편으로 1925년 4월부터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으로 명명되었다가 1936년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카자흐스탄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저지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일방적 무비자 제도의 잠정중단' 조치를 올해 12월 31일까지 연장했다고 '텡그리뉴스'가 5일 보도했다.   카자흐스탄 외교부는 "연장 대상국은 57개국으로써 해당 외국인에 대한 무비자 입국·체류·출국제도가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대상국에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국과 이스라엘, 태국, 오만, 멕시코 등 신규 확진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국가들이 포함됐다.   다만, 한국과 러시아, 아랍에미리트(UAE), 터키 등 19개국에 대해서는 기존처럼 무비자 제도를 적용한다.   이와 함께 카자흐스탄을 경유하는 중국과 인도 국민을 위한 72시간 비자 면제제도도 올해 12월 31일까지 중단됐다.   카자흐스탄은 작년 4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정부령으로 2020년 11월 1일까지 비자면제 중단 조치를 내렸다가 올해 5월 1일까지 연장한 바 있다.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카자흐스탄 보건부는 스푸트니크V 백신의 접종 간격을 기존의 3주에서 45일로 늘리기로 했다고 현지의 일간 '자콘'이 4일 보도했다.   보건당국은 이같은 내용을 담은 백신 접종 간격 조정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만약 업무 출장 등으로 인해 45일째 2차 접종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90일 이내에 접종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예를란 키야소프 카자흐스탄 수석 공중보건의는 "현재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재확산 상황을 감안할 때, 1차 백신 접종자를 최대한 늘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 백신 접종 속도를 더욱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영국 옥스퍼드대 등의 연구진이 지난 2월 의학학술지 '랜싯'(The Lancet)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6주 미만의 간격을 두고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1·2차 접종을 한 사람들의 예방 효과는 55.1% 정도에 그친 반면 12주 이상 간격을 늘려 접종한 경우 예방 효과가 81.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영국은 백신 접종 간격을 21일에서 3개월로 그 간격을 늘렸다. 스푸트니크V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과 같은 플랫폼으로 개발되었고 21일 간격으로 2회 접종을 전제로 설계됐다.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에서는 이슬람 사원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접종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일간 '자콘'지가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알마티시 보건당국은 이날 백신접종의 속도를 내기 위해 알마티중앙모스크를 비롯하여 누르, 알마디나, 압둘라 등 시내 6개 이슬람사원에서 백신접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알마티 중앙모스크의 경우 예배나 기도시간에 모스크를 찾는 신도들을 위해 이동식 백신접종 데스크를 운영한다.   한편 최 알렉세이 보건부 장관은 이날 열린 코로나19 범정부대책회의에서 "현재까지 예방접종 대상자의 15%에 해당되는 150만명의 국민들이 백신접종을 완료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그는 "백신접종에 속도를 내기 위해 총 1만 1천명의 의료진과 1천곳 이상의 백신접종센터, 400여 이동식 예방접종팀이 참여하고 있다"면서 "지난 1주일 동안 사망률은 변동이 없지만 발병률은 2% 감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의 '스푸트니크 Ⅴ'와 카자흐스탄에서 자체 생산된 '카즈박'과 '하야트박스' 등 세종류의 백신을 사용하고 있다.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중앙아시아의 중심국가인 카자흐스탄의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간)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국경분쟁과 관련한 재발 방지책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지 매체인 '누르'지에 따르면 토카예프 대통령은 "카자흐스탄은 이번 국경분쟁에서 양국이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찾고 상호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준비가 돼 있다"며 "중앙아시아 정상회의 틀 안에서 이런 분쟁 해결을 위한 메커니즘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키르기즈와 타지크 민족은 우리(카자흐 민족)와 한 형제이며, 우리는 공통된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평화와 관용, 상호존중 정신은 우리 민족의 몸속에 내재해 있다"면서 국경교전 직후 휴전에 합의하고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앞서 전날 오후 타지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지대인 이스파라강 상류 지역에서 수자원 접근권을 두고 양국 군인들 간 교전이 발생, 최소 1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부상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26일(월) 부터 자체생산한 코로나19  백신인 QazVac으로 접종을 시작하였다.   현지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에서 자체 생산하는 백신인  QazVac (QazCovid-in)이 지난 4월 22일에 첫 생산되었다.   예를릐 투그자노프 카자흐스탄 범정부코로나대책위원장(부총리)은 현지 공장을 방문하여  “이로써 코로나 19 감염에 대한 자체 백신을 개발 한 세계 상위 5개 국가에 진입하게 되었다”면서 “국민 보건의 문제 일뿐만 아니라 국내 과학의 잠재력과 국가의 국제적 위상을 드러내는 바이오 의약품 분야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고 말했다.   QazVac 백신의 처음 5만 회분은 전국의 보건소에 배송되어 26일부터 백신 접송이 시작되었다.   5 월에는  5만회 분량이 생산될 예정이고, 향후  백신 생산량은 한 달에 50만~60만 회분으로 점진적으로 증가시킬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백신은 구소련시절부터 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내에 있었던 유명한 의학연구소와 공장에서 러시아제 스푸트닉 V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세계 보건기구에 등록되었고 안전성과 코로나 19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강력한 면역력을 형성하고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QazVac 백신은 운송과 보관측면에서 탁월한 성능이 있는데, 미국의 화이자 처럼 영하 70도를 유지하기 위한 복잡한 냉동 장치가 필요하지 않으며 상온(+2~8도)에서 냉장보관과 운송이 가능하다.     한편, 카자흐스탄은 연내 추가 백신 생산공장을 건설완료할 예정이다.(한인일보)

 카자흐스탄은 올해 9 월까지. 전체 인구 1 천800만중에서 55%에 해당되는 1000만 명에게 백신 접종을 제공할 계획이다.   백신은 러시아산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사용하고 있고,  현재, 병원과 시내 곳곳에 설치된 임시백신접종센터에서 자국민들 뿐 아니라 외국인 주재원들도 신분증을 제시하면 무료로 접종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 최대도시 알마티의 경우 대형쇼핑몰 등에 설치된 임시접종센터와 병원, 보건소 등 200개 이상의 장소에서 백신접종을 받을 수 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4월 1일부터 일반인들에 대한 대량접종이 시작되었고, 당연히 현지에 사는 교민들도 백신접종이 가능했으나 이러한 현지정보를 미처 모르고 있는 분이 많았었다. 어디에 가서 맞아야 하는지? 사전에 뭘 준비해야 하는지?  등등 초기에는 약간의 정보부족으로 인한 혼동이 있었으나 동포신문사가 운영하는 SNS 나 교민 단톡방 등을 통해 먼저 접종을 받은 사람들의 체험담과 기본 정보 등을  공유하고 스푸트틱 백신에 대한 효과들을 알리면서 이제는 2차 접종까지 완료한 교민들이 늘고 있는 상태이다.         이에 앞서 지난 4월1일 토카예프대통령은 코로나19범정부대책회의에 참석하여, 지난 2월 1일부터 실시된 백신접종률이 두달 동안 채 1%에도 미달된다는 보고를 받고 보건부 장관을 비롯하여 정부부처 장관들을 엄중히 문책하였고,  특히, 최 알렉세이 보건부 장관에게는 4월 한달간 동안 역학상황을 반전시켜 놓으라고 특별 지시를 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은 변이 바이러스로 인해 하루 평균 2000여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한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