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서 카자흐로…고려일보 100주년
삼일운동 영향,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
삼월일일–선봉–레닌기치 제호 바꾸며 ‘명맥 이어’
홍범도 장군 기고 게재…문예면은 한글문학 보고
1923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투사들이 창간했던 한글신문이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와 감격스러운 창간 100주년을 맞는다. ‘삼월일일(三月一日)’, ‘선봉’, ‘레닌기치’ 등의 제호를 거쳐 현재는 ‘고려일보’라는 제호로 발행되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한국 근대의 시기 국내외에서 발행된 신문의 수는 적지 않았다. 근대신문의 효시는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06년 도산 안창호가 창간한 공립신보 창간호 논설에서 안창호는 ‘국권 회복과 자주독립’이라는 발행 목적을 분명히 했다. 이 신문은 미주는 물론 러시아 연해주와 국내에도 배포됐다.
중국에서는 1909년 발행된 ‘월보’를 시작으로 3·1운동 이후, 조선독립신문 등 90여 종의 신문들이 발행되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고 현재에도 연변일보·흑룡강신문·료녕신문·길림신문 등의 한글신문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해나가는 데 기여하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1908년 해조신문이 처음으로 발행됐다. 청주시 옥산면 출신의 주필 정순만은 창간호 사설에서 ‘국권 회복과 동포 구제’를 사시로 내세웠다. 그해 11월 최재형 등이 주도해 만든 대동공보의 기자 중에는 안중근이 있었다. 하얼빈역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경술국치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대동공보 기자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우리의 근대신문들은 항일독립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3년, 3·1운동 4주년을 맞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삼월일일’이라는 신문이 창간되었다. ‘3·1 독립선언문’ 이 창간호 1면을 장식했고 신문의 주필과 주요 임원들 또한 항일운동에 직접 가담했거나 깊은 관련을 맺은 인물들이 맡았다. 제4호부터 ‘선봉’으로 제호를 바꾼 이 신문은 강제이주라는 수난에도 불구하고 한글 활자를 보따리에 싸 와서 중앙아시아에서도 신문발행을 이어갔다. 그 신문이 바로 올해 역사적인 창간 100주년을 맞은 고려일보다.
고려인 이주사 담긴 소중한 기록
고려일보의 기사는 150여 년 고려인 동포들의 이주사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모국을 떠나 왔지만, 우리의 전통과 풍습을 유지하는 한편 현지의 문화와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신문 지면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37년 강제이주 당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홍범도 장군은 이주 다음 해인 1938년 6월 10일 자 신문에 강제이주 과정에서 소식이 끊어진 사위를 찾는 광고를 게재했다. 1938년~1939년 사이에는 ‘오라비를 찾소’, ‘친척을 찻소’, ‘족하를 찾소’ 등의 광고뿐만 아니라 9세 딸을 찾는 광고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주 후 38년부터 40년까지 고려인들은 거주여건이 좀 더 나은 곳 또는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서 중앙아시아 내에서 또 한 번의 이주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시 고려인 꼴호즈(구 소련의 집단농장)의 주택건축비가 800만 루블이라는 사실도 신문을 통해 알 수 있고 벼농사 생산 기록을 세운 고려인 농부에 관한 인터뷰 기사, 꼴호즈 간 축구경기 기사, 이밖에도 극작가 태장춘의 ‘행복한 사람’이라는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는 기사를 통해 고려인들이 점차 중앙아시아에 적응하고 뿌리를 내려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41년 히틀러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73세였던 홍범도 장군은 11월 7일 자 ‘원쑤를 갚다’라는 칼럼을 통해 “나의 마음은 지금 파시스트들과 전쟁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칼럼은 일제의 총칼에 부인과 아들을 잃은 홍장군의 입장에서 우리 동포들에게 씌워진 ‘일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차에 고려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자원입대 신청을 했다가 노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직후에 쓴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혈기왕성하던 홍범도는 안타깝게도 조국 해방을 1년 10개월 남겨둔 1943년 10월 25일에 운명하게 되는데 이틀 뒤인 10월 27일 자 홍범도 부고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우리 현대사의 최대비극이자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관련 기사는 조선인민군 총사령부 명의로 게재되어 있고 1953년 4월 19일 자에는 ‘판문점 담판에 대하여’라는 기사 등을 통해 휴전회담 소식을 전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고려일보 문예면은 한반도 밖의 한글 문학에 관한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조기천, 한 아나똘리, 주송원, 차원철, 한상욱, 림하 등의 중견 작가와 신인들의 모국어작품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또한 신문은 태장춘, 연성용 김증손, 김광현, 리은영 등이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고 지면을 통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문예페이지’는 고려인 한글문학을 도약시켰다.
김콘스탄틴 고려일보 총주필은 “지금도 스타니슬라브 리 같은 시인이 한글 시를 고려일보에도 발표하며 과거보다 양이 줄었지만 문예면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며 “고려극장에 올리는 동포 연극, 연주를 비롯해 우리 전통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있는 인민예술가 김 림마 이바노브나의 활동 소식을 꾸준히 보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글 기사작성 어려움 등 삼중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는 위기 상황에도 ‘레닌기치’라는 제호로 신문발행을 이어왔으나 90년대 들어 진행된 소련의 해체와 시장경제로의 급격한 체제전환의 혼란기는 고려일보를 큰 위기에 빠뜨렸다. 여기에 더해 고려인 사회의 모국어 상실과 민족 정체성 약화, 한글 기사작성 인력의 고갈 등 ‘삼중고’가 겹치자 더는 버티기 어려운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포사회의 구독운동과 모국의 관심과 지원 덕분에 고려일보는 한글판을 유지, 발전시키며 올해 영광스러운 100년 주년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향후 새로운 100년을 위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동포언론 본연의 역할인 정보전달, 모국과 동포사회 간의 교량 역할뿐만 아니라 우리말 교육·보급 등의 역할을 과연 잘하고 있는가, 독자들로부터 과연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가, 또 이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노력했으며 자체역량을 얼마나 강화해 왔는가를 자문해 봐야 한다.
‘기자는 역사의 최초 기록자다’라는 말이 있다. 고려일보가 향후 100년을 위해서는 이 문장에 주목해야 한다. 고려일보 기자는 카자흐스탄과 CIS 고려인 역사의 최초 기록자라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양질을 콘텐츠를 생산하며 스스로 자존감을 높여갈 때 독자들의 호응은 늘어날 것이다.
김콘스탄틴 총주필은 “모국과 고려인 동포 사이에 교량 역할을 강화하는 게 고려일보의 목표”라면서 “이런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 모국도 함께하고, 도움을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동포언론에 대한 모국의 관심이 더해진다면 좀 더 안정적이고 수준 높은 언론을 만들 수 있다. 모국은 현지화되어 있는 동포언론들이 생생하고 신속하게 현장의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것이 현지 여론이다.
고려일보 임직원들은 올해를 기점으로 고려일보가 동포언론의 사명을 훌륭히 잘 감당하면서도 세계적인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네트워크를 강화하여 동포언론의 선봉에 서는 날을 바라고 있다.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알마티국립대 조선어과 교수로 카자흐스탄 땅을 밟은 지 29년. 한글 동포신문 주필이고 연합뉴스를 통해 중앙아시아 5개국 뉴스를 전하고 있다. EBS ‘세계테마기행’에 여러 차례 출연했고 KBS ‘1박2일’에서도 고려인 강제이주에 관해 이야기했다. 부부사진전 ‘카자흐스탄’을 열었고, 사진집 <카자흐스탄>과 공저로 두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