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사회카자흐 고려인들 ‘오늘 목놓아 우노라’

카자흐 고려인들 ‘오늘 목놓아 우노라’

육사, 홍범도 흉상 철거 소식에 동포사회 ‘배신감, 충격’
100년 된 한글신문 고려일보 “장군에게 낡은 이념 씌워”
박 따지아나 후손회장 “소련에 살았다는 이유로 모욕줘”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 소식이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전달되면서 현지의 동포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올해 창간 100주년을 맞은 고려일보(카자흐스탄 한글신문)가 운영하는 텔레그램 채널에는 ‘대한고려인협회(AKRK)’가 올린 ‘(이미) 돌아가신 독립영웅들이 누구에게 방해가 되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되었다.

이 글은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홍범도 장군에게 낡은 공산주의 이념을 씌우려 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홍범도 장군과 마찬가지로 과거 소련 공산주의 국가 출신인 우리(고려인)도 홍범도 장군과 같은 대우(운명)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흉상 철거 결정은 독립운동가 단체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분노를 샀고 국방부는 여론의 동향을 살피고 있지만, 흉상 철거 결정이 취소되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이 모든 행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에 있는 정치탄압희생자 위령비. 2사진=김상욱

고려인 차세대 지식인 중 한 사람인 남 나탈리아 알마티국립대학교 교수는 “홍 장군의 소련공산당 가입 이력을 흉상 철거 논리로 삼는 데 대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 나탈리아 교수는 또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은 미국 정부의 도움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지사들은 각각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하나라도 더 얻어 내려고 애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남 교수는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다 바쳤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존경을 망각할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박 따지아나 독립유공자후손회장(자손재단 이사장)은 “홍범도장군이 공산주의자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였고, 우리 동포들의 행복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고 일본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군의 유해가 대통령 특별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김상욱

박 따지아나 회장은 또 “항일유격대(항일 빠르티잔) 역사상 가장 큰 승리 중 하나는 청산리 대첩인데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일본제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한 것”이라며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 일본 식민주의자들을 물리치는 독립전쟁에서 새로운 자극을 주었고 더 많은 승리를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안겨준 것이야말로 이 전투가 가져다준 더 큰 승리였다”고 덧붙였다.

또한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자신의 안위와 생명을 조국독립전쟁에 바치고 투옥, 고문 등 온갖 고난을 겪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그들이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단지 그들이 소련에 살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공로를 폄훼하고 모욕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의를 생각하면 눈물이 핑돈다”며 안타까워 했다.

박 회장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이며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 선열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사실, 한국 정부는 지난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하면서 성대한 봉환 행사를 치르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홍 장군 유해를 안장했다. 당시 카자흐스탄 고려인 동포들은 홍 장군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하게 되면 고려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적 중심축이 없어진다고 우려했지만 홍 장군에 대한 한국 정부의 선의를 믿고 유해 송환에 동의하는 대승적 결단을 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정권이 바뀌었다고 불과 2년 만에 홍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일어났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고려인 동포사회에 전해졌고, 고려인들은 모국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우국 독립지사들에게는 ‘조국의 독립’이야 말로 지고지순의 가치였기 때문에 조국의 독립을 도와주겠다면 당시 러시아 공산당뿐만 아니라 악마와도 손을 잡을 태세였던 게 사실이었다.

실제로 홍범도 장군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해서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선물 받고 독립운동자금까지 지원받아왔다. 이때 홍 장군이 소련에 입국하며 쓴 서류에는 직업은 ‘의병’, 목적과 희망에는 ‘고려독립’이라고 썼다. 이 입국조사서는 러시아 문서보관소에 있던 것으로 2021년 홍 장군 유해 봉환 당시 국민들에게 널리 공유되었었다.

러시아 내전(적-백 내전) 당시,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일본 정규군을 파병해서 백군(반혁명파)을 지원하는 한편, 연해주 지역의 항일독립군들을 토벌하고 신한촌을 기습하여 우리의 한민학교 등 주요 건물을 불태우고 어린이와 부녀자를 끌어내어 학살했다. 독립운동의 배후기지 역할을 한다는 이유였다.

‘4월 참변’이라고 불리는 이 비극을 목도한 동포들은 항일 빨치산부대로 몰려갔고 러시아 백군과 한패가 된 일본군을 향해 총을 들었다. 수많은 항일 빨치산부대는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는데, 이것이 곧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이미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날으는(나는) 백두산 호랑이’, 백전노장 홍범도 장군의 부대도 있었다.

1943년 그러니까 조국광복을 2년 앞두고 돌아가신 홍범도 장군은 소련 땅,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살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었고, 그 연합국은 일본 군국주의자, 독일 나치주의자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홍범도는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한 지 4년 만에 터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겠다고 자원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73세. 누가 보아도 전선으로 갈 수 없는 고령이었지만 항일 독립전쟁을 통해서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기백만큼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았다.

1941년 11월 7일 자에 실린 홍범도 장군의 기고문, ‘원쑤를 갚다’ 사진=고려일보 갈무리

이는 고려일보 전신인 ‘레닌기치’ 1941년 11월 7일 자에 홍범도 장군의 기고문 ‘원쑤를 갚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나의 마음은 지금 파시스트들과 전쟁을 한다”고 쓰고 있다. 이 칼럼은 홍장군이 ‘일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차에 고려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자원입대 신청을 했다가 거부당한 직후에 쓴 것으로 짐작된다.

말년의 홍범도는 자신이 근무하던 고려극장에서 만난 극작가 태장춘이 쓴 ‘의병들’이라는 희곡속에서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보면서 겸연쩍어하며 자신과 함께 전장을 누빈 독립군 동료들에게 그 공을 돌렸다고 전해진다. 이 모든 것들은 노년에도 동포사회의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동포사회로부터 항일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 끝까지 존경을 받았다는 간접증거기도 하다.

비록, 조국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운명했지만, 그의 이러한 항일무장투쟁의 공적과 건국의 공로는 대한민국의 건국 후인 196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서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2021년 문재인 정부는 유해를 국내로 모셔와 대전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건국훈장 가운데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고 고려인들은 마치 자신이 훈장을 받은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했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소련 공산주의자였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영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사에서 그의 이름이 아예 사라지고 한국 국민의 기억에서 지워질 처지에 놓인 것이다.

고려인들이 ‘시일야방성대곡’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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