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 크즐오르다를 가다]
홍범도 기념공원, 고려인 자긍심으로 새 단장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11월 3일 개원…참배,전시공간 구성
유해 한국 봉환에 따른 약속으로 재탄생…시 당국이 관리 맡아
교포사회, 육사에서 흉상 이전한다는 소식에 분노 삭이지 못해
“홍범도 장군 기념공원은 고려인들이 민족의 역사와 항일독립전쟁 영웅들의 생애를 배우는 현장교육센터로 활용될 것입니다.”
박데니스 크즐오르다고려인협회장은 최근 새롭게 단장하고 개원한 홍범도장군 기념공원의 입구인 ‘통일문’을 열면서 이렇게 말했다.
2021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할 당시 정부는 크즐오르다의 홍범도 장군 묘역 터에 고려인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할 ‘홍범도 기념공원’ 건립을 약속했었고, 그 뒤 2년여 만인 11월 3일, 장군의 유해가 안장돼 있던 크즐오르다의 묘역 터가 참배공간과 전시공간을 갖춘 기념공원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박데니스회장은 “지난 3일 윤종진 보훈부 차관과 우원식 홍범도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해 모국에서 온 손님들과 주알마티총영사관의 박내천 총영사, 현지의 동포 대표 등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공원 개원식을 열었다”면서 “홍 장군 묘역 기념공원은 1067㎡(약 300여 평) 부지에 홍 장군 흉상 등이 있는 참배공간과 홍 장군의 삶 및 독립운동 공적을 보여주는 전시관, 휴게공간으로 구성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홍범도·계봉우 전시관의 경우, 현재 전시물을 제작하고 있으며 내년 상반기까지 모두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전시물 제작 내년 상반기까지
공원의 출입구는 작은 성문 느낌의 나무문이었다. 대문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통일문’이라고 한글로 적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로 정면에 홍장군의 흉상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엔 전시관이 오른쪽에는 방문객을 위한 휴식공간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날 방문한 기념공원은 개원식이 끝난 지 불과 며칠밖에 안 되어서인지 그날 헌화한 꽃다발과 꽃송이들이 홍장군의 흉상 앞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그러나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 때문인지 아니면 최근 육군사관학교 교정 내 홍 장군 흉상의 이전 논란 때문인지 흉상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바닥은 과거 ‘잡초와 억새가 무성한 묘역’이라는 오명을 벗으려는 듯 큰 블록이 깔끔하게 깔려 있었고 일부는 기념 식수한 나무와 잔디로 조성된 것이 눈에 띄었다. 공원의 초입부 왼쪽, 그러니까 과거 정자가 덩그러니 있던 자리에는 새로 지은 전시관이 있었고, 내부는 화장실과 큰방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인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입구에서는 전시관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대문에 들어선 후 10여 발자국 들어가면 좌측에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의 흉상이 서 있다. 300평이 조금 더 되는 이곳은 원래 크즐오르다시 공동묘지의 일부로써 30년 전 문민정부 초기, 역사바로세우기 운동과 함께 추진되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사업이 북측의 ‘평양으로의 봉환’주장에 따라 좌절되고 현지에 그대로 두기로 결정된 후 조성된 묘역이다.
홍 장군과 함께 계봉우 선생의 유해도 함께 있던 이곳은 홍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기 전까지 40여 년 동안 이분들에 대한 추모의 공간으로써 고려인 동포사회가 관리해왔다. 계봉우 선생의 유해는 알마티에 있던 황운정 선생의 유해와 함께 홍 장군보다 2년 먼저 국내로 봉환된 바 있다.
기념공원 인근엔 홍범도 거리
이 공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홍범도 장군 참배공간은 봉오동 전투 현장지형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 각기 다른 높낮이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참배공간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가운데 두고 좌우 측에 각각 광복 50주년에 세운 기념비와 지난 2021년 유해봉환을 설명한 검은색 대리석의 공식 표지석이 서 있었다.
이날 데니스회장과 함께 공원을 안내해준 고려인 윤쟌나 씨는 이 도시에서 홍장군이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시가 있다면서 흉상에 다가가서는 QR코드가 새겨진 동판을 가리켰다.
그는 “이 QR코드가 새겨진 동판은 크즐오르다시에서 관리하는 역사적 건물이나 위인들의 동상에만 부착된다”면서 “홍범도 장군의 일관되고 헌신적인 삶은 우리 고려인들뿐만 아니라 카자흐인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서울의 고궁이나 사적지 건물에 있는 QR코드와 같다고 이해하면 되겠네요?”라고 되묻자 윤쟌나 씨는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기념공원을 둘러본 후 홍범도 거리로 향했다. 기념공원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뒤 자동차로 약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 홍범도 교차로를 시작으로 거리가 나타났다. 초입의 붉은 벽돌 건물에는 홍장군의 얼굴과 업적이 새겨진 동판이 붙어 있어서 설사 그를 모르는 사람들도 이 표지판을 읽고 이곳이 홍범도 거리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고려극장은 알마티로 이전
자동차를 이용해 약 10분간 달려본 홍범도 거리 양편에는 일반 주택과 상가 또는 창고인 듯한 건물이 있었고 건물에는 ‘홍범도’와 번지수를 가리키는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음으로 홍범도 장군이 일했던 예전 고려극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지금은 크즐오르다시 문화회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려한 조명과 잘 설계된 대극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 카자흐 여성 배우들이 공연준비를 위해 연습에 몰입하고 있었다. 혹시 방해가 될까 봐서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다시 한번 로비와 대극장을 둘러본 뒤 밖으로 나왔다.
1942년 고려극장의 젊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태장춘은 연극 ‘홍범도’를 무대에 올렸다. 당시, 맨 앞줄에서 이 연극을 본 홍장군은 공연이 끝난 뒤 태장춘에게 “나와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운 나의 빠르티잔(빨치산) 동료들이 진정한 주인공이다”라면서 이름 없이 싸우다 전사한 그들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고 한다.
이는 태장춘의 부인이자 춘향전의 ‘춘향’역을 도맡아 하던 당시 최고의 인기 여배우 이함덕 선생이 기자에게 해준 말인데, 그는 알마티국립대학교 조선어과 교수로 파견된 기자를 자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고려극장에서 홍범도 장군과 함께 보냈던 자신의 젊은 배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 해주곤 했다.
당시, 알마티국립대학교 조선어과에는 북한에서 파견된 교수들만 재직하고 있었는데, 한국 정부가 보낸 첫 교수라는 점 때문이었는지 이함덕 선생뿐만 아니라 동포사회의 과분한 관심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벼’가 상징물인 도시
70세를 훌쩍 넘긴 노인 홍범도는 비록 몸은 늙었지만, 기백만큼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던 ‘날으는 홍범도’ 그대로이셨던지 마침 그가 경비로 근무하던 어느 날 밤, 고려극장 분장실에 든 도둑 네 명을 쫓아낸다. 그러나 건강한 현지 청년들이었던 도둑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앓아누운 홍장군은 결국 병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운명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어느 날 장군이 직접 키우던 돼지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잡아 예전 함께 총을 들었던 독립군 동료들을 초대해서 잔칫상을 차린 뒤, 남은 한 마리의 돼지는 자신이 죽거든 잡아서 자신의 장례식에 온 조문객들을 잘 대접하라고 동료들에게 당부했다는 말까지….
위 내용은 이미 국내에도 여러 경로로 알려진 내용이지만 옛 고려극장 터를 둘러보는 순간 이함덕 선생에게서 들었던 홍 장군에 관한 이야기들이 마치 엊그제 들은 것처럼 생생히 기억의 창고 문을 열고 떠올랐다.
그런 기억들을 수습하면서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시르다리야강(江)으로 차를 몰아갔다. 황무지와 같은 이 땅이 지금의 옥토로 바뀐 것은 바로 저 시르다리야강물을 관개수로를 파서 벼농사를 성공시킨 고려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양에 비친 강물과 그 강물을 여기저기로 보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수문이 석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크즐오르다는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큰 강인 ‘시르다리야’강의 하류에 있는 도시이다. 공항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다 보면 도시의 상징탑 맨 꼭대기에 벼 이삭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조각되어 있을 정도로 중앙아시아 최대의 벼 생산지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 고려인의 숨결과 홍범도 장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홍범도 기념공원을 둘러보고 그의 이름이 붙여진 거리와 그가 근무했던 고려극장의 옛터를 둘러보면서 위대한 독립 영웅 홍 장군의 숭고한 생애와 정신을 기억하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는 것은 정부가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대원칙임을 다시 확인하고 이것이 지켜지기를 소망해본다.
(김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