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공존과 함께 통일 가능성을 보존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봉기(李鳳棋)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
북한이 2023년 12월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한 이후 취하고 있는 일련의 조치는 1960년대 후반부터 동독이 서독에 대해 2국가성을 주장하고, 1970년 이후 2민족론을 내세우며 서독과의 차단을 강화했던 과정과 닮아있다. 이제 북한이 동독이 밟았던 전철에서 아직 취하지 않은 것은 ‘2민족론’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북한이 두 국가관계를 주장하면서, 남한을 공존의 상대가 아니라 차단하거나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 간 대화와 교류의 통로는 사실상 닫혔고, 군사적 긴장과 상호 불신은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적대적 관계를 평화적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통일도 중요하지만 평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통일이 무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공존은 1969년 이후 동서독 간 평화공존의 역사로부터 타산지석의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서독이 동독에 대한 관계에서 지켰던 기본 원칙, 그리고 서독이 평화공존 정책이 성공적으로 귀결될 수 있었던 두 가지 요인(국내적 합의와 분단관리정책)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서독이 동독에 대하여 유지한 기본 원칙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독일 영토 위에 두 개의 국가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인정하였다. 둘째, 동독을 국제법적으로 국가로서는 승인하지 않았다. 셋째, 민족의 단일성을 유지하고 통일 가능성을 보존하였다. 그럼에도 분단기간 동안 통일 원칙과 현실 인정 사이의 긴장은 지속되었다.
서독의 독일정책에서 첫 번째 성공 요인은 일관된 대동독정책 추진을 위한 “국내적 합의”를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1969년 집권한 사민당(SPD)의 빌리 브란트(W. Brandt) 정부는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eherung)’ 정책을 통해 동독과의 관계를 제도화하고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기민련·기사련(CDU/CSU)은 통일 원칙이 약화되고 동독의 국제법적 승인으로 가는 정책이라고 비판하며 대립하였다. 그러나 1973년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조약을 합헌으로 판결하면서, “통일 과정에서 어떤 방법이 정치적으로 옳고 목적에 부합하는지의 결정은 정부에 위임되어 있다”라고 함으로써 정치적 논쟁에 대한 헌법적 지침을 제시하였다. 이후 기민련은 교류협력에 대해 적응 과정을 거쳤고, 1982년의 집권 후에는 이를 운용적 차원에서 수용함으로써 “일관된 대동독정책 추진을 위한 국내적 합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서독의 독일정책에서 두 번째 성공 요인은 “어떠한 대동독정책을 추진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이었다. 1982년 집권한 기민련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정부는 통일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동서독 관계의 안정적 관리와 교류협력을 운영적 차원에서 계승하는 대동독정책을 추진하였다. 사민당은 교류협력과 평화공존에 방점을 두었고, 기민련/기사련은 통일 원칙의 유지를 통해 평화공존이 스스로 목표가 되어 통일을 대체하는 것을 막았다. 양당의 이러한 접근은 각 당의 정체성에 따른 것으로 정치적으로 대립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분단을 평화적으로 관리하고, 통일 가능성을 보존하는 분단관리전략, 즉 대동독정책을 상호 보완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서독의 분단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남북 간 교류협력의 통로를 열어야 하고, 평화공존을 제도화하며, 동시에 통일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단관리전략은 통일을 일상 정치의 전면에 배치하지 않으면서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며 적대의 악순환을 완화하고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려는 접근이다. 이는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통일 원칙을 잃지 않으면서 내부적으로 통일 역량을 축적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적대는 쉽게 고착된다. 그러나 평화는 의식적으로 설계하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는다. 통일의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공존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