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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31]

유라시아 패권의 역사 – 3 : 혁명의 동지에서 국경의 적으로 ― 탈스탈린화와 중소분쟁, 그리고 소련 붕괴의 시작

김상욱 알마티 고려문화원장/본지 주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중국과 소련은 사회주의 진영의 양대 축으로 떠올랐다. 이듬해 체결된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은 두 나라를 명실상부한 혈맹으로 묶었다. 소련은 중국의 산업화와 군사력 증강을 적극 지원했고, 중국은 소련을 사회주의 혁명의 맏형으로 존중했다. 당시만 해도 세계는 두 나라의 동맹이 오래 지속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두 나라의 관계를 뒤흔든 결정적인 사건은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소련의 새 지도자가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이른바 ’탈스탈린화’를 선언했다. 그는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대숙청을 강하게 비판하며 사회주의 노선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의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하면서 핵전쟁을 피하는 것이 공산권의 새로운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마오는 스탈린 개인을 무조건 옹호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우려한 것은 공산주의 혁명의 정통성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스탈린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의 권위까지 흔드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강조하는 흐루쇼프의 노선은 혁명 정신을 버리고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때부터 양국의 갈등은 이념 논쟁으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국익과 패권 경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1960년 소련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수천 명의 기술자와 전문가를 갑작스럽게 철수시켰다. 공동으로 추진하던 공장 건설과 산업 프로젝트도 중단됐고, 핵기술 이전 계획 역시 취소됐다. 갓 산업화를 시작한 중국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중국이 외부 지원에 의존하지 않는 ‘자력갱생’ 노선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국의 갈등은 결국 국경에서 폭발했다.

  1969년 3월, 우수리강의 작은 섬인 다만스키섬(중국명 전바오다오에서 중국군과 소련군이 무력 충돌을 벌였다. 작은 섬 하나를 둘러싼 분쟁이었지만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양국은 국경지대에 수십만 명의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당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소련은 중국의 핵시설을 선제 타격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혁명의 동지였던 두 나라가 이제는 핵전쟁 직전까지 치닫는 적이 된 것이다.

  중소분쟁은 냉전의 흐름 자체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균열을 새로운 전략적 기회로 보았다. 당시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고,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 양국 정상회담의 길을 열었다.

  이어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이른바 ’핑퐁외교’가 시작됐다. 미국 탁구대표팀이 중국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한 것은 단순한 스포츠 교류가 아니었다. 이는 냉전 질서를 뒤흔드는 외교적 신호였다. 이듬해인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중국을 방문했고, 세계는 다시 한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던 시대를 뒤로하고 전략적 협력의 길을 선택했다. 그 배경에는 소련이라는 공동의 견제 대상이 있었다.

  닉슨의 방중은 국제정치의 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미국은 중국과 손을 잡음으로써 소련을 견제할 수 있었고,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의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양극 체제에서 미국·소련·중국이 서로를 견제하는 ’전략적 삼각관계’로 바뀌었다.

  이 변화는 결국 소련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미국과 군비 경쟁을 계속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긴장도 유지해야 했다. 두 개의 거대한 전략 전선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던 소련은 막대한 국방비를 지출했고, 계획경제의 비효율성까지 겹치면서 경제는 점차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1985년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추진했다. 그는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동시에 중국과도 화해를 시도했다. 1989년 고르바초프의 베이징 방문은 30년 가까이 이어진 중소 대립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미 소련 내부의 균열은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경제난과 민족주의 확산, 공산당 체제에 대한 불신이 겹치면서 연방은 급속히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마침내 1991년 12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련의 붕괴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끝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념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양국은 과거의 적대보다 현실적인 국익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국경 문제를 해결하고 중앙아시아의 안정을 공동의 목표로 삼으면서 두 나라는 다시 협력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훗날 상하이 파이브, 상하이협력기구(SCO)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오늘날 시진핑과 푸틴이 강조하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역사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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