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선언 이후, 왜 카자흐스탄인가?
한·중앙아 협력의 ‘실행 무대’로 떠오른 카자흐스탄
핵심광물·에너지·중간회랑·AI…한국의 미래 공급망과 유라시아 전략이 만나는 곳
한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이 정상회의를 정례화하고 핵심광물, 에너지, AI·첨단기술, 물류, 환경, 문화 등 전방위 협력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바라보는 한국의 시각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2028년 제2차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 개최지가 카자흐스탄으로 결정되면서 카자흐스탄의 전략적 의미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번 ‘서울선언’을 카자흐스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단순히 정상회의 개최국 하나가 추가된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제시된 협력의 상당 부분을 실제 사업으로 연결할 수 있는 국가가 카자흐스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국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카스피해를 거쳐 유럽으로 연결되는 지리적 위치를 갖고 있다. 여기에 핵심광물, 에너지, 물류, 산업, 디지털 전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기반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서울선언 이후 한·카자흐스탄 관계는 기존의 자원 협력을 넘어 ‘유라시아 공급망과 연결성(connectivity)을 함께 만들어가는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자원국에서 ‘가치사슬 파트너’로
서울선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경제협력 분야 가운데 하나는 핵심광물이다.
세계 경제가 공급망 재편과 자원 안보 경쟁에 들어가면서 핵심광물의 안정적인 확보는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방산, 첨단 제조업의 경쟁력과 직결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우라늄을 비롯해 다양한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희소금속과 핵심광물 분야에서도 개발 잠재력이 거론되는 국가다.
그러나 앞으로의 한·카자흐스탄 협력은 단순히 광물을 한국으로 가져오는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서울선언이 제시한 ‘탐사→채굴→정제→가공→제조’로 이어지는 가치사슬 구축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한국은 기술과 자본, 제조 역량을 제공하고 카자흐스탄은 자원과 현지 생산 기반, 시장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카자흐스탄은 한국의 단순한 자원 공급국이 아니라 핵심광물 공급망을 함께 구축하는 산업 파트너로 성격이 달라진다.
이는 카자흐스탄에도 중요한 변화다. 자원 채굴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정제와 가공, 제조업으로 산업의 부가가치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축은 에너지다
에너지 분야 역시 한·카자흐스탄 협력의 중요한 축이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에너지 생산국이다.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 등 전통적인 에너지 자원뿐 아니라 우라늄 생산에서도 국제적인 비중을 갖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안정적인 에너지와 자원 공급망을 다변화할 수 있는 협력 대상이다.
동시에 카자흐스탄이 추진하는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한국의 기술과 기업이 참여할 공간도 커질 수 있다.
서울선언이 청정에너지, 에너지 효율, 전력망 등을 협력 분야로 제시한 것도 이러한 변화와 연결된다.
즉, 한·카자흐스탄 에너지 협력은 과거의 ‘석유와 가스’ 중심에서 미래의 ‘에너지 전환’까지 범위를 넓히는 단계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카자흐스탄의 또 다른 가치, ‘길’이다
카자흐스탄을 단순한 자원국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자흐스탄의 진정한 전략적 가치는 자원뿐 아니라 지리적 위치에도 있다.
중국에서 출발한 물류가 중앙아시아를 지나 카스피해로 이동하고, 다시 코카서스와 유럽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중간회랑은 유라시아 교통·물류망 재편 과정에서 주목받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이 노선에서 광대한 영토와 철도·도로망을 가진 핵심 통과국이다.
이는 한국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은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이지만 유라시아 대륙과의 물리적 연결에서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반면 카자흐스탄은 중국과 유럽 사이에 자리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넘어 카스피해와 코카서스, 유럽으로 연결되는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기업이 카자흐스탄을 생산·물류 거점으로 활용할 경우 단순히 중앙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유라시아 시장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경로를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
서울선언에서 교통·물류와 중간회랑 협력이 중요한 의제로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와 첨단산업에서 새로운 기회
서울선언은 전통적인 자원·인프라 협력에 머물지 않고 AI와 디지털 전환, 과학기술, 연구개발, 인재 양성까지 협력 분야를 확대했다.
이 역시 카자흐스탄의 변화와 맞물린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의 경제 중심국으로서 디지털 경제와 산업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ICT와 AI, 스마트시티, 제조 자동화 등 기술과 결합할 경우 새로운 산업협력 모델을 만들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자원과 첨단기술을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물 탐사 과정에 AI와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고, 채굴·정제 과정의 효율성을 높이며, 물류 과정까지 디지털화한다면 자원산업 자체가 첨단산업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기술력과 카자흐스탄의 자원·공간·시장이라는 서로 다른 강점을 결합할 수 있는 분야다.
환경·물 문제도 새로운 협력 분야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가 직면한 물 부족과 사막화, 대기오염, 기후변화 문제 역시 한국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다.
서울선언에는 식수와 폐기물 관리, 대기질 개선, 생물다양성, 사막화 방지, 훼손지 복원 등이 협력 분야로 포함됐다.
이 분야는 한국 기업과 기관에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이 축적한 수자원 관리와 환경기술, 도시 인프라 관리 경험을 중앙아시아의 환경 문제 해결과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카자흐스탄은 광대한 국토를 보유하고 있어 에너지와 자원뿐 아니라 물과 환경 문제를 포함한 대규모 인프라 협력의 가능성도 갖고 있다.
‘사람의 연결’에서는 고려인이 있다
서울선언에서 경제협력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 교육·문화·관광·청년교류 등 사람을 중심으로 한 협력이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관계에는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역사적 연결고리가 있다. 바로 고려인이다.
2027년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지 90년이 되는 해다.
1937년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인들은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역사적 가교 역할을 해왔다.
서울선언에서 고려인 역사와 관련한 공동사업이 언급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연결을 미래의 협력 자산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경제적 이해관계만으로 만들어지는 협력은 국제환경 변화에 따라 흔들릴 수 있지만, 역사와 문화, 사람을 통한 연결은 장기적인 관계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8년 카자흐스탄 정상회의가 중요한 이유
따라서 2028년 카자흐스탄에서 열리는 제2차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는 단순한 차기 회의가 아니다.
서울에서 선언된 협력 방향이 실제 사업으로 얼마나 구체화됐는지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핵심광물 공동개발과 정제·가공, 에너지 협력, 제조업 투자, AI·디지털 프로젝트, 중간회랑 물류사업, 환경·수자원 협력, 고려인 90주년 관련 문화사업 등이 어떤 형태로 발전하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카자흐스탄은 이 모든 협력 분야가 한 국가 안에서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자원은 있지만 기술이 필요한 나라와 기술은 있지만 자원과 대륙적 연결성이 필요한 나라.
한국과 카자흐스탄의 협력 가능성을 압축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유라시아의 심장’에서 ‘협력의 플랫폼’으로
카자흐스탄의 전략적 의미는 과거처럼 ‘석유가 많이 나는 중앙아시아 국가’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핵심광물과 에너지 공급망의 관점에서는 자원 파트너이고, 제조업의 관점에서는 산업협력 파트너다.
중간회랑의 관점에서는 유라시아 물류 거점이며, AI와 디지털 전환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기술협력 시장이다.
여기에 고려인이라는 역사·문화적 연결고리까지 갖고 있다.
이번 서울선언이 만들어낸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카자흐스탄의 복합적인 가치를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정상급 협력 틀 안에서 구체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는 점이다.
결국 앞으로의 한·카자흐스탄 관계에서 중요한 질문은 ‘카자흐스탄에서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가 아니다.
‘한국과 카자흐스탄이 무엇을 함께 만들어 유라시아로 연결할 것인가’가 핵심이 될 것이다.
2028년 카자흐스탄에서 열리는 제2차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는 그 답을 구체화하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서울에서 선언된 협력이 카자흐스탄에서 실제 사업과 연결될 때, 카자흐스탄은 한국에게 단순한 중앙아시아의 한 국가를 넘어 유라시아 협력의 플랫폼이자 전략적 파트너로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다. (김상욱 주필)







